무언가가 이제야 말되어지는 이유란 무엇인가?
오늘은 오전 강의시간에 젠더갈등이나 노인빈곤 등 여러 논의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를 들어보았다. 다만 한가지 후회되는 점이 있었다. 사실 내가 나서서 논의의 근본점을 집어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제도적 방안들이 어떤 조건 하에 성립하는지, 어떠한 기원에서 이러한 명제들이 정치인들의 입에 비로소 오르내릴 수 있게 되었는지, 이런 물음이 선행되지 않는 모든 정치적 토의란 사실 껍데기이다. 마치 기침하는 암환자에게 항암치료를 하지 아니하고, 기침약을 처방하는 격이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근본을 파고든 자들이 이러한 형식적 논의의 결실을 획바카라할 우려가 크며, 기원의 분석 없이는 그리고 이어지는 권력의 작동 확인 없이는 피상적 논의에 그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내가 강의 시간에 차마 학생들에게 말해주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간단하게 써내려 가고자한다.
페미니즘 등 젠더 문제, 노인의 빈곤은 결국 모두 현재의 담론이다. 모든 문제가 공론장에서 동등하게 논의되지 않기 마련이나 이 이슈들은 정치 현안에서 실시간으로 논의되는 이슈들인데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오래전에는 말되어지지 못하다가 최근에 이런 주제들이 드디어 말되어지는 이유란 무엇일까? 축적되어 온 것이 결국 터졌다라고 볼 수도 있겠다만, 여기서 나는 다른 접근을 하고자 한다.
통치권력이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디어 이런 주제들에 대한 '수단으로서'의 쓸모를 호출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이 담보하는 질서는 나라의 국내총생산을 꾸준히 향상시켜왔으며, 해당 질서를 내면화한 대한민국의 국민들 개개인은 그 이전 보다는 더욱이 유용하고 순종적인 신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강박적인 사교육과 강박적인 인서울 대학 집착, 수도권 시민이 아니면 모두 패배자라는 거대담론. 언론과 커뮤니티 등 슬롯의 다수 권력자들이 그 통치를 유용하게 하고 자신이 우위에 있는 질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들어낸 담론이 필연적으로 배제성을 띔으로써, 쓸모없는 존재를 임의로 규정해버렸고, 이렇게 슬롯적으로 낙인지어 놓은 것을 개별 국민, 그리고 이에 대한 총합으로의 인구가 그 담론을 내면화했기 때문이었다.
시대가 정보화 시대 그리고 ai시대로 접어들수록 이러한 질서는 더욱 '완벽하게' 성립한다. 안전과 인구의 적정 정규분포의 유지라는 명목 하에 통치권력은 지식을 소유할수있으며, 이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자는 예로부터 권력을 가져왔다. 이제 그들은 알고리즘을 통제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규정해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장에 맞지 않는 그 모든 논의가 말로서 성립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공공선과 정의 그리고 자유라는 가치는 사용된다. 얼마나 아름답고 허울 좋은가치들인가? 하지만 모든 지식은 권력의 담론에 있어 그 권력의 승인 없이는 말되어질수 없다. 멘델의 사례를 생각해본다, 지금에서야 동방의 작은 국가의 통합과학 교과서에도 필수적으로 나올정도의 유전학 담론이지만, 학계에서 말되어지지 못했었던 적이 있었다. 음... 사실 여러분들에게 가장 직관적인 사례라면 종교의 사목권력에게 배척당했었던 지동설이 그 예라하겠다. 한국에서 군사정부 시절에 이러한 개인, 민주화 등 가치들이 질서라는 이름하에 말되어지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민주정부가 들어서서 비로서 이 가치들은 말되어지게 되었는데 권력의 질서가 이러한 지식을 먼저 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기 3.1 운동에 의해 일본제국정부가 문화 통치를 시작하게된 것과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이러한 사용된 지식을 기반으로 이젠 '슬롯적 약자'들의 말이 드디어 공론장에서 논의가 되어지고 있다. 오늘 강의 시간에도 그러했다. 지방의 20대 초반 젊은이들에게도 말되어지는 이런 담론은 이제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담론이 된 것이었다. 나는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더욱 형식과 실질은 벌어지게 된게 아니었을까?
위선적인 헤게모니가 더욱 그 질서를 정당화하기위해 이제 슬롯적 약자와 소외를 꺼내들기 시작했다는 관점으로 이 현상을 이해해 본다면, 우리는 항상 근본적인 철학의 물음으로 논의를 시작해야한다. 이에 따르면 슬롯적 약자 담론 역시 권력과 무관한 순수한 선의의 결과라기 보다도 권력의 필요와 사용 속에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누군가는 분명 이게 유리알 유희에 불과한게 아닌가 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현상만을 보고 실무와 제도의 논의에 그쳐서는
그것이 정녕 눈먼 자가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고 그것이 전부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슬롯적 약자 담론이 형식만 남아서 권력을 지지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되는 것, 즉 정치인들의 주인-대리인 문제를 우리는 모든 논의에 앞서 이야기해야만 한다.
언제나 형식은 실질을 가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이러한 논의들은 선의라고해도 실질적으로 공론장의 힘의 배치를 바꾸는 것인데, 이런 담론을 사용해 새로이 권력을 얻는 자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말해야만 한다. 권력획바카라의 수단으로서만 슬롯적 약자들이 쓰이지 않기 위한 방안이란 무엇인가?
권력, 즉 힘이란 다원적이어야만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힘이 한곳에 집중되어서 일어나는 병목을 막기 위해선 그 힘을 꺾어서 여러 군데에 분산해 힘의 배치를 바꿔야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