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철학자 이선우의 《위기의 민주주의》 비평문
이 영화는 브라질 탄핵 정국을 통해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제도 속 언론, 사법, 정치가 결합한 담론권력이 어떻게 특정 인물을 비정상으로 구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위기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아니, 모든 가치가 그러할 것이다. 일종의 보임 안의 보이지 않은, 가려진 것들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데, 모든 글, 그리고 말, 모든 가치가 중립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이러한 위기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대중매체에서 민중이 마주할 수 있는 많은 말말말에 주목해 볼 수 있다. 그들의 말이 중립적이던가? 결국 모든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 비롯된 그것이 편향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브라질 민중은 언론 속의 말을 중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을 보인다. 사법 시스템 또한 그러할 것이다. 법을 기반으로 하는 판단들이 공명정대한가에 대한 생각을 해 보게 한다. 판사의 판단은 결국 한 인간의 가치판단이 함축되어 있는 한낱 인간의 결정이다. 그런데 한 인간은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속에 규정되어 버리길 반복한다.
다만 권위가 인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점을 교묘히 흐리게 한다는 것이다.
한 판사의 결정이, 한 언론인의 기사가 진정 그의 자유의지에서 나온 것일까? 관계의 외력 속에 나오기 마련인 부산물 같은 것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누가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일까? 관계의 총체로서 나온 어떤 담론이 무엇을 호명시킨 걸까? 그 호명이 누구를 부패의 대명사, 악이라고 불리게 만들었는가?
여기서 국가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국가란 국민을 국민의 의견을 대신하는 기구로 여겨진다. 하지만 대표성이라는 가치를 의심해야 한다. 역사 속의 국가는 결국 권력을 통해 슬롯의 질서를 관리함과 동시에 이를 재생산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영화 속 브라질의 탄핵 정국을 되새긴다. 한 정 치인, 한 사람에 대한 도덕성의 규정, 판단, 그리고 결정은 위에서부터의 힘이 이윽고 전도되어 안에서 그것이 퍼지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다. 위로부터의 권력의 정당화라는 특정 권력의 의지가 내면화되어 국민들 전반이 룰라를 낙인찍었던 것이다. 수사기관으로 대변되는 사법, 그리고 정치권, 그리고 언론은 영화 속에서 하나의 담론을 형성한 듯 보인다. 영화는 이러한 악으로 보이는 담론이 민주주의 정치인을 담그는 전형적인 선악의 구도로 흘러간다.
담론권력은 어떠한 것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얻으며, 이러한 판단이 당연한 것으로, 그 담론의 핵심은 모든 사람을 내면화시킨다. 영화 속의 3기구들이 전형적인 담론을 형성하기에 최적화되었던 상황이었다. 정상이라고 여겨졌던 가치는 한순간에 어떤 의도적으로 형성된 담론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으로 영화 속에 그려진다. 그 속에서 담론의 권력이 누군가를 비정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보이지 않기에 누구에게나 스며들어 침투하는 너무나 당연히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종의 가치 판단들이다.
나는 이 영화에서 또한 고정관념과 경향성이 한 개인을 짓누르는 현상에도 주목할 수 있었다. 다른 이전 다른 수많은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룰라도 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았을 것이라는 경향성. 심지어 이 경향성에 근거해 수사를 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론을 통해 중계되었다. 전형적인 경향성이 개인의 역사성과 행위의 특수성을 누르는 기제로 작용한 상황. 여기서 그는 말할 자격을 상실한 채, 침묵하여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중이 규정된 담론의 언어를 언론을 통해 자기 판단의 언어로 내면화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담론 권력의 중추는 언론의 결탁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는 모든 경향성(혹은 그 경향을 굳이 호명하는 존재들) 그리고 가치가 중립적이지 않으며, 사람의 판단이 어떻게 거대한 외력에 의해 선택과 판단의 자유라는 착각 속에 비자유화되는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어떤 권위가 있다고 해서 그 권위가 진실을 담보하는 것, 공공선을 담보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비선형적인 힘과 힘의 충돌이다.
물론 이 영화 자체도 단순화를 통해 악한 담론과 그에 따른 피해자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로 만들어져 있기에, 영화가 형성할 수 있는 외력, 즉 담론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영화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 이분법적 구도에서 브라질 민주운동 등 요소들이 축소되고 배제된 점을 보면 영화 자체도 일종의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지에 대한 담론을 생산할 수 있도록 어떤 요소가 기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세상의 많은 것들이 결국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이에 따른 비중립적인 판단들의 알력, 그리고 암투의 연속에 의해 결정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진실이라고 받아들여 온 모든 것들이 무언가의 산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의, 편의, 공정, 연대, 공공선, 우리, 슬롯, 민주, 자유 등 여러 개념들이 그저 이러한 요소들을 포장하는 말에 불과할 수도 있다. 모든 가치는 부패성을 그 안에 내포한다. 정치는 가치의 장이다. 즉, 어떤 정치든 주류화되고 거대화되는 과정에서 그 씨앗은 커진다. 거대담론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모든 가치,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이념은 지식과 결합해 권력을 형성한다. 그렇다, 이에 대한 끝없는 비판을 통한 반정립 없이는 그러한 가치들이 살아남기에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나는 말하고자 한다.
어떤 가치를 사랑한다면 그 가치를 신성시하지, 절대화하지 말라.
어떤 가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것을 기꺼이 비판하고 해체하길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