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비동일성을 보호해야 한다.

정당정치는 필연적으로 거대담론을 형성한다.

정치학자 박상훈 박사


박상훈 박사님의 한국의 대통령제와 청와대 정부 강연 현장에서 직접 질문해 보고자 했으나, 수많은 생각들이 나의 머릿속에 교차하여 그것이 그 순간에는 끝내 말이 되지 못했다. 이 안타까움을 담아 해당 강연에 대한 리뷰는 진심을 담아 눌러써 보기로 하였다.


강연 전체를 관통하는 기조는 권력의 절제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였다. 강연자는 미국 대통령제의 기원을 단순한 헌정사적 사실이 아니라, 권력 집중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빚어진 역사적 산물로 설명했다. 특히 대통령제를 군주의 대체물이 아니라 군주정의 재발을 막기 위한 우연적 장치로 읽어낸 대목이 인상적이었으며, 대통령 주변 비서조직의 확대를 프레토리안적 근위체제의 귀환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신선했다. 현대 한국 정치에서 청와대 내지 대통령실 권력의 비대화를 단순한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공화정의 원리 그 자체와 충돌하는 현상으로 바라본 관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녔다.


그러나 나는 이 강연이 행정부 권력의 팽창을 민주주의 위기의 거의 유일한 원인으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느꼈다. 강연자는 대통령제의 위험성을 짚으면서도, 입법부와 사법부에 대해 행정부가 수행하는 견제의 역동성은 상대적으로 과소평가했다. 미국 대통령제가 유지된 것은 그것이 단지 권력을 제한하려는 제도였기 때문이 아니라, 대통령과 의회, 연방대법원 사이의 끊임없는 충돌과 상호 봉쇄 속에서 민주주의적 균형이 거듭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측면은 강연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 정치사는 대통령 권력이 팽창해 온 역사인 동시에, 의회의 조사권과 예산권, 탄핵권, 그리고 사법심사가 확장되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 워터게이트 이후 닉슨의 몰락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보여주는 사례인 한편,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를 실질적으로 제어해 낸 장면이기도 했다. 근데 이러한 점을 강조하면서 통치권력 구성에 있어 대통령제가 가진 입법부에 대한 견제적 기능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 반론의 여지를 낳는 강의이기도 했다. 이러한 강연자의 서술은 민주주의의 위기를 행정부 집중이라는 단일 변수로 환원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우면서도 위험하다고 생각된 지점은 강연자가 문재인 후보 시절의 정당 바카라임 정치 구상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평가했다는 데 있다. 그는 후보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에서 의회 중심성과 정당 정치, 바카라임총리제의 가능성을 읽어내며 그것이 끝내 좌절된 것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나는 같은 지점에서 오히려 다른 문제를 읽는다. 당시 문재인 캠프와 민주당이 구축한 거대한 도덕주의적 담론 구조는 단순한 정당 바카라임 정치의 이상이라기보다, 정치적 정당성을 특정 진영의 정당성에 과도하게 귀속시키는 위험한 권력 구성 방식이기도 했다.


요컨대 강연자는 대통령 권력의 집중은 비판했으나, 정당의 담론권력이 슬롯 전체를 포섭하며 형성하는 헤게모니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촛불 이후의 정치 공간은 단순한 민주주의의 회복이 아니라 '선한 시민 대 적폐'라는 강력한 도덕적 이분법 위에서 재편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정치적 다원성을 상당히 위축시켰다. 강연자가 말한 합의 민주주의 또한 진영 간 정당성 경쟁 속에서 좀처럼 작동하지 못했다. 오히려 정당은 시민슬롯의 다양한 이해를 중재하기보다, 거대한 정체성 동원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한국 정치의 특수성에 의거하여 나는 진심으로 정당 정부 같은 구호를 선호하지 않는다. 정당자체가 거대담론이란 것이다. 비록 대통령이 민주당이라 하더라도 그는 개인이기에 민주당이라는 개념으로 전부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궤적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노무현 행정부 시절의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기투로 한미 fta를 이끌어 내었듯, 개인이었기에 정당이라는 거대담론에 반항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제의 필연적 제왕화라는 것에도 나는 의구심이 든다. 윤석열 정부의 많은 발의안은 여소야대 정부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상당수 기각되었다. 이미 행정과 입법부는 필연적으로 그 견제의 기능을 수행하기 마련인데 이걸 합치려는 모든 시도가 다원성을 흐린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강연자의 문제의식이 다소 고전적 담론에 머물러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권력을 분산될수록 좋은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지만(물론 타당한 말이다.),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는 단순한 권력 집중에 그치지 않는다. 강연자가 전제한 합의의 낙관을 나는 비판 해야만 했다. 푸코적 관점에서 보자면 권력은 더 이상 청와대 같은 중심 기관에만 자리하지 않는다. 정당과 언론, 플랫폼, 시민 담론, 팬덤 정치, 알고리즘적 여론 형성 속에서 권력은 미시적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라기보다, 대중정치 그 자체가 거대한 감정 동원 체제로 변모하고 있다는 데 있다. 좋은 정부란 담론과 담론 간의 끝없는 충돌과 갈등, 그리고 서로 간의 견제에서 비롯된다. 어떠한 담론이 거대해진 이후의 모든 근대 역사성이 궁극적으로 폭력으로 이어짐을 잊었는가? 삼권 분립에 있어 행정부의 존재는 입법부를 견제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행정부가 비대해졌을 때의 위험 또한 견제해야 한다는 강연자의 문제의식엔 강하게 공감한다. 대통령제의 과잉이 거대담론, 그리고 독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소야대를 이끌어내는 방안에 대해서만 재고해 보아야 하고, 대통령제 자체에 대한 회의에 대해서는 나는 부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의원내각제, 정당정치 등 모든 명제는 권력의 삼원체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행정부라는 한 모서리를 너무나 감쇄시킨다. 이것이 힘의 배치에 있어 입법부에 과잉 쏠림 현상을 낳게 한다. 예컨대 일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한 슬롯에 정당이라는 거대 담론이 의원 내각제에 자리하는 순간 상대 편의 목소리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몇십 년간 정권 교체가 안 되는 것을 보면, 대통령제가 그나마 이걸 억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정당은 너무나 쉽게 국민들에게 그 자신의 정당성을 내면화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정당과 대통령 간의 필연적 비동일성을 제도가 보호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 강연은 한국 정치학계에서 좋은 정부란 무엇인가라는 규범적 질문을 진지하게 던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단순한 제도공학이나 선거전략의 차원을 넘어, 민주주의가 어떤 정치적 태도를 요구하는 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다만 앞으로의 논의는 대통령 권력에 대한 비판을 넘어, 정당 헤게모니와 담론 권력, 나아가 디지털 대중정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시 구성하고 있는지로까지 확장될 필요가 있다. 어떤 특정 개념과 명제라는 동일성에 우리 슬롯가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