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장소, 다른 시간 -
과거는 늘 복합적인 감정을 남긴다.
기쁨도 있고, 아쉬움도 있고, 후회와 안도도 함께 섞여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많은 감정들 사이에서 그리움이 가장 오래 남는다.
나는 그 이유가 이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제주도에 살던 시절이 있다.
온라인 게임을 다니며 스스로 지원해 제주도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이 너무 가고 싶었다.
그 무렵의 나는 많이 지쳐 있었다. 수도권에서의 삶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외로웠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늘 긴장 속에 있었다. 상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 지적했고,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울의 깊은 터널을 지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주행은 새로운 도전인 동시에 도피이기도 했다.
어쩌면 나는 살기 위해 떠났는지도 모른다.
제주에서의 삶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집 앞에는 바다가 있었다.
퇴근길에 잠시만 걸어도 파도 소리가 들렸고, 저녁이면 습한 바람 냄새가 골목을 채우곤 했다. 창문을 열면 바람이 들어왔고, 하늘은 수도권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처음 반 년 동안 나는 퇴근만 하면 바다로 향했다.
모래사장에 드러누워 파도 소리를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바다가 그리웠던 것이 아니라, 마음 놓고 숨 쉴 수 있는 시간을 그리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바다는 늘 내 곁에 있었다.
혼자 가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돗자리를 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바람을 맞으며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내 곁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강아지는 모래사장을 신나게 뛰어다녔고,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는 늘 함께였다.
강아지는 나를 계속 따라다니고 자주 혀를 낼름거리며 뽀뽀했고, 나 역시 강아지를 사랑했다.
특별한 일이 없던 평범한 날들조차 지금 생각하면 눈부시게 따뜻하다.
그래, 그곳에서 나는 자유롭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다.
일도 했고, 사람도 만났고, 사랑도 했고, 웃고 울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 시절에도 고민은 있었다.
늘 행복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답답한 일도 있었고, 미래에 대한 물음표도 있었다. 때로는 제주라는 섬이 좁게 느껴지기도 했다.
제주는 좋았지만 나는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고,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본사로 다시 돌아왔다.
오 년 동안의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집도 처분했다.
그리고 강아지는 친구에게 맡겼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문득 그 녀석이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상하게 가슴 한편이 뭉클해진다.
그때는 그것이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선택 외에 다른 길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제주에서의 시간은 점점 더 아름답게 기억된다.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함께 웃었던 순간들.
매일 바라보던 바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부족했고, 서툴렀고, 여전히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고, 육지에서 얻은 상처들도 조금씩 치유되어 가고 있었다.
잘 있니.
사랑했었던 순간들.
사랑했었던 사람들.
함께했던 동물들.
그리고 나를 품어 주었던 장소들.
장소는 다시 찾아갈 수 있다.
그 길을 걷고, 그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사람들과 같은 계절을 살 수는 없고, 그때의 나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그래서 더 그리운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만약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제주를 사랑했지만 결국 다시 떠났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그때의 나였고, 그 계절 속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니 이제는 후회보다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다.
제주에 머물던 날들도, 제주를 떠나던 날들도 모두 그때의 내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시간들이었으니까.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제주가 아름답고 그리운 이유는 그곳에 바다와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한때의 내가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리움이란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나에게 건네는 늦은 안부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잘 지내고 있니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