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의 시간 -
몸에 밴 습관이 있다.
바로 헝그리 정신이다.
어릴 때부터 다닌 학원은 꽤 스파르타식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시험 등수가 벽에 붙었고,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틀린 문제의 개수만큼 맞을 정도였다.
어린아이에게 학원은 학교가 아니라 작은 회사와도 같았다. 늘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야 했다.
거기에 나는 원래 무언가에 몰입하면 열심히 하는 성향이었다. 바카라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목표했던 대학 가운데 한 곳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 나는 우울증에 빠져들었다.
더 힘들었던 것은 이유를 몰랐다는 점이다.
매일 울었고, 거울 속의 내가 누구인지조차 낯설 만큼 정체성의 혼란이 심했다.
그때부터 나는 정반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목표 없는 삶.
이 순간을 사는 삶.
레포트는 기한을 넘기면 그냥 내지 않았고, 시험도 공부한 만큼만 봤다.
그렇게 가까스로 졸업했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처음 몇 년은 많이 혼났다.
여전히 열심히 하는 습관이 몸에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설렁설렁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지나치게 몰입하고.
그 두 끝을 오가며 균형을 찾는 데만 십여 년이 걸렸다.
지금 돌아보면, 헝그리 정신으로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의 나는 주변을 볼 여유가 없었다.
에너지가 모두 목표와 성과에만 쓰였기 때문이다.
동료를 돌아보고, 누군가를 돕고, 함께 살아가는 감각은 그만큼 부족했다.
신기한 것은 목표를 쫓지않고 내 마음대로 살던 시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만 보는 방향만 바뀌었을 뿐, 주변을 살피는 능력 자체를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일도 자연스럽게 하고, 주변 사람들의 표정도 보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면 손을 내밀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물론 열심히 살아온 시간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 시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앞만 보고 달리는 삶보다, 주변을 함께 바라보는 삶을 살고 싶다.
내 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위에도 눈과 귀를 열어두어 동료를 돕고,
회사 일뿐 아니라 집안일도 함께하고,
나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배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한때의 나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괴물처럼 몰아붙였다.
그 시절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오래 살아남는 사람은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변과 함께 걸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헝그리 정신.
그 애증의 정신은 이제 현재의 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버텨 냈던 내 한 시대의 역사로 남겨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