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사랑을 모르는 내가, 그 말씀에 공감한 이유
추운 곳일수록 잎이 더 빨리 물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은 유독 추위가 빨리 찾아온다. 북쪽에서 내려온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다. 아직 나무들은 초록빛을 그대로 품고 있지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이 잎들도 하나둘 자기만의 빛깔로 물들 것이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곧 빨강과 노랑, 갈색으로 변한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하나둘 떨어질 것이다. 처음에는 싱싱하고 푸르던 잎이 계절을 지나며 다른 모습이 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사랑도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의 사랑은 뜨겁고 설레는 것이라고들 한다. 보고 싶고, 하루 종일 생각나고, 뭐든 함께하고 싶은 마음. 나도 그런 사랑을 상상해 본 적은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불타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설렘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생기는 마음일 수도 있다. 나는 후자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
예전에 엄마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부부는 결국 의리로 사는 거야.”
우리 부모님은 연애를 하다가 결혼하신 게 아니다. 당시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그렇게 서로를 만나 결혼하셨다. 서로를 충분히 알아가고 좋아하는 시간을 거쳐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먼저 ‘함께 살아보자’는 선택이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말이 더 와닿았다. 한 사람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에 바카라임지는 것. 좋은 날뿐 아니라 힘든 날에도 쉽게 등을 돌리지 않고, 아플 때 챙겨주고, 별일 없는 하루에도 곁을 지켜주는 것. 어쩌면 그런 마음도 사랑의 한 종류가 아닐까. 물론 모든 관계를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사랑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라면 그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서로에게 바카라임을 다하려는 마음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사랑이 꼭 뜨거운 감정이어야 한다면 나는 사랑을 잘 모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 사람의 곁을 오래 지켜주려는 마음까지 사랑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랑을 조금은 알 것 같다. 부모님을 보면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뜨겁게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는데도 두 사람은 수많은 평범한 날을 함께 지나 지금까지 왔다. 같이 밥을 먹고, 아프면 챙겨주고, 가끔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 같은 자리에서 하루를 보낸다. 그렇게 쌓인 시간이 어느 순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아직 초록빛인 나뭇잎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만의 빛깔로 물든다. 사랑도 처음의 뜨거움만으로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다른 색을 만들어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나니 ‘의리’라는 말이 더 이상 차갑게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의리는 사랑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선택한 뒤 오래도록 그 곁을 지켜내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부모님에게 내가 바라는 것도 거창한 것은 아니다. 특별한 곳에 함께 가지 않아도, 늘 사이좋게 지내지 않아도 괜찮다. 가끔 티격태격하고, 같이 밥을 먹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처럼 평범한 하루를 함께 보냈으면 좋겠다. 그런 평범한 시간이 당연하게 계속될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된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금처럼 서로의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나무를 바라본다. 언젠가 잎이 물들고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그 시간을 붙잡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함께 있는 시간이 조금 더 오래 이어지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씀하신 ‘부부는 결국 의리로 산다’는 말.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사랑보다 먼저 선택한 사람을 오래도록 바카라임지고 곁을 지키면서 만들어지는 사랑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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