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력이 급격히 약해지셨다는 연락을 받은 건 내가 서른을 갓 넘겼을 때였다. 마지막으로 뵌 것이 추석이었는지 설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이 많이 빠져 계셨다. 기침이 심해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이튿날 논일을 다녀온 뒤 아버지는 어머니가 담가 놓은 밀주를 한 사발 떠오셨다. 아버지는 고된 일을 끝내고 난 뒤면, 토방 구석에 놓인 커다란 오지항아리에서 술을 떠 오곤 하셨다. 한가운데 용수를 깊이 박아 놓고 그릇째 담가 술을 떴다. 변변한 안주도 없이 익히지도 않은 돼지고기 몇 점을 썰어 내오셨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익혀 드셔야 한다고 말해도 답이 없으셨다. 그렇게 큰 한 잔을 드시고 아랫목에 모로 누우신다. 그게 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방을 나서며,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다. 웬일로 주무시던 아버지가 마루까지 나왔다. 신발을 신는 나를 보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얼마 뒤 종합검진을 받으러 형과 누이가 살던 인천집 근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대장내시경 검사 전날 밤, 쇼크가 왔다.
그게 끝이었다.
전봉준과 죽창을 들었던 집안의 피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방아쇠를 당겼던 27세손의 기개도, 구름을 타고 임금을 희롱했던 도사의 도술도, 그 아무것도 아버지를 지켜주지 못했다. 아버지는 살아서도 극적이기를 거부했고, 죽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례 준비를 하는 중에 형이 말했다. 아버지는 선산에 묻히길 원하지 않으셨다고.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나는 몰랐다. 아버지는 분모골 밭에 묻히고 싶다고 하셨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모골 밭. 계약금 200만 원을 받아 들고 팔아버리려 했다가, 어머니가 싹싹 빌어 되찾은 그 밭. 다음 날 동트기 전 지게를 지고 돌아갔던 그 밭. 아버지가 평생 흙을 판 그 밭. 아버지는 거기 있고 싶으셨다.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용하다는 지관을 불러 찾은 명당 자리가 비만 오면, 어김없이 질척였다. 계곡에서 스민 물이 솟는 탓이었다. 묘 위쪽으로 물길을 새로 내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원하신 땅이 이런 땅이었나. 아니면 바로 이런 땅이라서 원하신 것인가.
친척 어른들이 올 때마다 말이 나왔다. 선산에 모셔야지 여기가 어디냐고. 처음에는 아버지 뜻이라 했다. 어른들은 그래도 안 된다고 했다. 조상 묘가 다 선산에 있는데 혼자 떨어져 있으면 외롭지 않겠느냐고.
내가 먼저 이장 얘기를 꺼냈다. 형도 그러자고 했다. 더 버티는 것이 아버지 뜻을 지키는 것인지, 고집을 지키는 것인지, 그 경계가 흐려진 것도 오래전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것은 여섯 마지기 논과 천 평 남짓한 밭이었다.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유언도 없었다. 어처구니없이 짧게 끝났다. “바카라값 해라.” 그것이 내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다정한 말이었다.
무심코 든 전화기에 손가락이 번호를 누르는 때가 있다. 041-853-3202. 고향집 전화번호다. 출근길 폭설에 부러진 소나무를 목격하거나, 불도 켜지 않은 자취방에 앉아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이미 해지된 번호다. 나는 한참 빈 전화기를 귀에 대고 가만히 있는다.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전화다. 사라지고 나서야, 손이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거기 닿는 번호가 있었다는 것을.
정작 나는 자주 걸지 않았는데도 손이 기억하고 있다.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그 빈 수화기를 들고 한참 서 있다가 천천히 내려놓는다. 매번 같다. 누르고, 기다리고, 내려놓는다.
(계속)
표지사진은 라이테 작가님의 글 ‘아버지의 등’에서 모셔 왔습니다. 작가님 아버님의 등이, 꼭 평생을 땅만 일구다 가신 제 아버지의 등처럼 보여 오래 마음이 쓰였습니다. 사진을 허락해 주신 라이테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