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찬합

by낮달

머리가 굵어 대학생이 되었을 무렵의 어느 날,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일이다.


버스에서 내려 40번 국도를 건너는 길에 이미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집 쪽에선 개 짖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서자 더 그랬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한숨이 먼저였다.


아버지는 아랫목에 누워 기동도 하지 못한 채 끙끙 앓는 소리만 내고 계셨다. 내가 방문을 열자 아버지는 힘겹게 고개를 돌리셨다. 눈이 마주쳤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니 아부지, 소 팔고 오다가 돈 다 잃어버렸다.”


어머니의 한숨 섞인 설명인즉 이러했다. 애지중지 키우던 소를 내다 팔고 돈을 품에 안은 아버지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거나하게 취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와 한 숨 자고 일어나 보니, 아뿔싸, 소 판 돈이 온데간데없더란다. 길바닥에 흘렸는지, 소매치기를 당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아 며칠째 속만 끓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 안쓰러웠다. 그깟 소 한 마리 값이 뭐라고 저렇게 앓아누우실까 싶으면서도, 아버지에게 그 소가 무엇인지 알았기에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 소에게 아버지는 말을 걸기도 했다. 내게는 하지 않는 말을.


벽장 여기저기, 장판 밑, 장롱 밑, 이불 사이, 점퍼 주머니. 없었다. 마루 밑 안 신던 신발 속까지 뒤졌다. 장독대 뒤도 봤다. 어머니의 한숨이 더 깊어졌다.


나는 한 번 더 방 안을 둘러봤다. 아버지라면 어디다 숨길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을 더 믿는 사람. 말하는 것보다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한 사람. 감춰두고 잊어버리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부엌 쪽 마루 벽면 시렁 위에 놓인 낡은 찬합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되어 쓰지도 않는, 뽀얗게 먼지가 앉은 찬합이었다. 저기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손이 먼저 뻗었다. 무심코 그 찬합을 들어 올린 순간, 나는 숨이 멎었다.


백만 원권 자기앞수표 두 장과 십만 원권 몇 장이 아주 곱게도 두 번 접힌 채 그 밑에 숨어 있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는, 이 거금을 행여나 잃어버릴까 봐, 혹은 행여나 아내에게 빼앗길까 봐, 나름 집 안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찬합 밑에 꼭꼭 숨겨두고는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수표를 손에 들고 한동안 서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뭔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 쪽으로 올라왔다. 어머니가 옆에서 수표를 보더니 혀를 차며 등을 돌렸다.


“아버지, 이거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수표를 내밀자, 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아버지는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굳어 있던 주름진 얼굴에 일순간 안도와 민망함이 교차했다. 한참 수표를 들여다보다가 어머니를 봤다가 다시 나를 봤다. 어디서 나왔냐고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10만 원권 수표 한 장을 빼서 내게 불쑥 내밀었다.


“바카라값 해라.”


그리고 아버지는, “허, 참” 낮게 탄식하며 멋쩍게 웃었다. 어깨가 낮게 출렁였던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가장 사람 냄새나는 표정이다. 나는 그 수표를 받아 들고 방을 나왔다. 손에 쥔 종잇장 하나가 유난히 뜨거웠다.


마루로 나와 시렁을 올려다봤다. 찬합은 다시 제자리에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앉은 뚜껑. 나는 한참 그것을 바라보다가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때 부엌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녁 먹고 나가거라.”


그릇 부딪는 소리가 났다. 나는 마당에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는 곧 일어나셔서 밥상 앞에 앉으셨다. 우리는 밥을 먹었다. 아무 말 없이. 수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그게 우리의 저녁이었다.


(계속)

표지사진은 라이테 작가님의 글 ‘아버지의 등’에서 모셔 왔습니다. 작가님 아버님의 등이, 꼭 평생을 땅만 일구다 가신 제 아버지의 등처럼 보여 오래 마음이 쓰였습니다. 사진을 허락해 주신 라이테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