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나는 처음 보는 마음을 만났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바라보다 — 의문#6

bybloom

나조차도 내 마음을 잘 몰랐다.

이게 정말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인지.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이제야 선생님과 정이 들었는데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싫었다.


합격하기를 바라면서도 포항으로 가버릴 것 같아 싫었고, 그렇다고 불합격한다고 해서 우리 집에 계속 있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수능을 본 날, 선생님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녁을 먹다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선생님 오늘 안 들어와?”

“밥이나 먹어.”

“만약 합격하면 나 이제 과외 안 해?”

어머니는 대답 대신 나를 몇 번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넌 너 할 거나 제대로 하면 돼. 괜히 선생님 꼬셔서 놀러 가자고나 하지 말고.”

성적도 올랐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금껏 내 공부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이 왜 이제 와서 저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어머니와 나는 참 대화가 안 됐다.

괜히 물어봤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왔다.

수능을 보고 지방에 있는 어머님 댁에 다녀왔다고 했다.

합격 여부를 물어보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말했다.

“미영아. 1년은 너희 집에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그러면 안 되는데,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시험을 많이 망쳤나 보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겨울방학이 시작된 뒤에도 우리는 2학년 과정의 예습과 부족한 수학 공부를 계속했다.

방학 중 어머니는 교사 연수를 가게 되어 며칠 동안 집을 비웠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난 어느 날이었다.

방학이지, 어머니도 없지.

괜히 신이 났다.


원타임 노래를 CD플레이어로 크게 틀어놓고 방 청소를 했다.

그나마 제일 예쁜 옷을 골라 입고 눈썹도 그렸다.

어머니 방에 몰래 들어가 향수까지 뿌렸다.

선생님 방문을 두드렸는데 대답이 없었다.

살짝 열어보니 아직 자고 있었다.

바카라상 위에는 입시 준비 바카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바카라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조민석.

선생님의 이름이었다.


늦게까지 공부하다 주무셨나?

나는 조용히 문을 닫고 주방으로 갔다.

쌀을 안치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괜히 앞치마를 둘렀다가 벗고, 머리도 묶었다가 다시 풀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깨우러 가지는 못했다.


얼마 뒤 선생님 방문이 열리고 화장실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주방으로 갔다.

“선생님 일어났어요? 씻고 오세요. 아침 드세요.”

“미영이가 차린 거야? 어머니는?”

“연수 가셔서 며칠 안 들어오세요.”

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는데 이상하게 어색했다.

그동안 수도 없이 같이 밥을 먹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마치 신혼부부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 드실래요?”

선생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계란프라이 해드릴까요?”

선생님은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밥을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선생님은 행주를 들고 식탁을 닦아주었다.


나는 과외방에 들어가 평소에는 하지도 않던 독서를 하는 척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칫.

오빠 방.

아니, 이제는 선생님 방.

문이 닫히자 괜히 상 위에 털썩 엎드렸다.


잠시 후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얼른 허리를 세우고 다시 바카라 읽는 척을 했다.

드디어 과외방으로 들어오시려나?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선생님은 외출할 차림이었다.

“어? 어디 가세요?”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까 했는데. 집 좀 알아보려고. 계속 신세 질 수는 없어서.”

“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그럼 엄마가 싫어하실 텐데. 엄마는 선생님 여기서 지내면서 과외비 싸게 하려고 그런 건데. 안 알아보셔도 되는데! 1년 더 있는다면서요!”

선생님이 혼자 집을 알아보고 와서 어머니에게 통보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저도!”

부랴부랴 신발부터 신었다.

왜 그렇게까지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나도 몰랐다.

다만 선생님이 혼자 집을 알아보게 두고 싶지 않았다.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었다.


집을 나서면서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선생님이 더 이상 신세 질 수 없다고 집 알아보신대. 아침 드시고 지금 나가셨어.]

내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선생님의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네. 네. 죄송해서 그러죠. 네.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대답만 들렸다.


혹시라도 어머니가 그냥 방을 구하도록 두는 건 아닐까.

통화가 끝날 때까지 괜히 초조했다.

결국 선생님은 집을 구하지 않았다.

그렇게 선생님은 우리 집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겨울방학 아침, 향수까지 몰래 뿌리며 설레던 날도 지나고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학교에 다녀오면 공부했고, 숙제를 했고, 시험을 봤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있는 것도 어느새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성적은 12등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7등까지 올라가기도 했다.

2학년이 되면서 지연이와 나는 다른 반이 되었다.

지연이는 여전히 전교 1등이었다.


예전처럼 지연이의 노트를 빌려보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지연이도 전처럼 선뜻 노트를 빌려주지 않았고, 나도 이제는 굳이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나도 이제는 내 방식대로 공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까.


겨울이 되자 선생님은 다시 수능을 보러 갔다.

그리고 얼마 뒤 뜻밖의 말을 했다.

공부를 그만두고 군대에 가겠다고 했다.


포항공대에 가겠다던 선생님은 입대를 준비했고, 오빠의 방에 있던 짐도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반대로 오빠는 제대를 앞두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군대로 들어가고, 한 사람은 군대에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편지할게요. 기다릴게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2학년 때 다른 반이었던 지연이와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 공부해야 했다.

민석 선생님도 없었고, 숙제를 검사하는 사람도, 교과서를 몇 번 읽었는지 확인하는 사람도 없었다.

혼자 해보려고 했지만 성적이 다시 떨어졌다.

결국 어머니가 또 움직였다.


오빠를 가르쳤던 선생님.

그러니까 민석 선생님의 선생님에게 수능을 볼 때까지만 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앞으로 8개월 정도만 봐달라고 사정했다고 했다.

그 선생님은 완전 스파르타였다.

교과서를 열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아예 외우게 했다.

때로는 몽둥이까지 들었다.

공부하다 졸기라도 하면 말했다.


“1층 내려가서 동네 한 바퀴 오리걸음 하고 와.”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잠 깨고 오라는 말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진짜 오리걸음으로 한 바퀴를 돌라는 말이었다.

나도 가끔 꾀를 부렸다.

오리걸음을 하는 척 나가서는 어묵을 사 먹고 슬슬 걷다가 들어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 역시 속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오리걸음 하고 왔는데 땀 한 방울도 안 나고 이렇게 보송보송하니?”

딱 걸렸다.

생각해 보면 민석 선생님도 이 선생님에게 이렇게 공부를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배운 방법으로 나를 가르쳐주었던 것일 테고.

그때는 몰랐다.


민석 선생님이 내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는지.

군대 간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해놓고 고3이 되자 두어 번 보내고는 더 이상 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방과 후 선생님 댁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선생님이 현관으로 나갔다.

잠시 후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게 누구야. 민석이 아니야?”

민석이?

선생님?

익숙한 이름을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방에서 뛰어나갔다.


“어머, 안녕하세요!”

민석 선생님이 군복을 입고 서 있었다.

오빠가 처음 휴가를 나와 부모님 앞에서 ‘필승!’ 하고 인사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넌 공부 안 해? 얼른 들어가.”

“아…… 네. 목, 목이 말라서요.”

괜히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컵 받았다.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마시면서 선생님을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본 과외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민석아. 쟤 왜 저러니? 좀 같이 살았다고 엄청 반가운가 보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봤다.

“야, 넌 얼른 들어가서 공부해.”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지만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온 신경은 거실에 가 있었다.

수학 문제는 풀지 않고 문제집에 괜히 낙서만 했다.

그러다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더 민망한 것이 있었다.

문제집 귀퉁이에 써놓은 낙서였다.

조민석.

조민석.

조민석.

왜 죄다 선생님 이름이야.


“너 지금 공부 안 하면 민석이한테 너 혼내주라고 한다. 쪽팔리지도 않니?”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남편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혼나는 거 아냐, 그럼?”

“네? 남…… 남편이요?”

“그래. 민석이도 네가 좋은 것 같은데. 그래도 넌 공부해야지. 이게 다 뭐니?”

선생님도 날?

좋아한다고?

어머.

말도 안 돼.


그 말을 듣고 나니 이제야 나도 알 것 같았다.

나도 선생님이 너무 좋았다.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

그럼 목표를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자.


처음 공부를 시작한 이유는 이 집을 떠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갈 것도 아니라면…….

나도 그냥 포항으로 따라갈까?

혼자 피식 웃으며 그런 생각까지 한 내가 어이없었다.


민석 선생님은 잠깐 인사를 나누고 우리 집에도 들르겠다고 했다.

어머니께도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과외를 마치고 민석 선생님과 함께 집으로 향했다.


“선생님, 저 여기서 과외하는지 몰랐죠? 어떻게 지내셨어요? 잘 지내셨어요?”

“응. 그래. 편지한다더니 고3이라 바빴구나. 공부는 잘되고?”

선생님은 내 머리를 이리저리 헤집으며 장난을 쳤다.

“아, 머리!”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휴가는 며칠 동안 나오신 거예요?”

“4박 5일.”

“아, 우리 오빠 군대 갔을 때처럼 면회도 가고 그러면 좋은데. 제가 보시다시피 고3이라…….”

“그래.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어머니께 인사드리고 나도 집에 가야 해.”

“아…… 그렇구나.”

괜히 아쉬웠다.


“선생님 며칠 자고 가면 좋은데. 아! 잘 방이 없나? 오빠도 이제 제대했고.”

선생님이 웃었다.

“어떻게 그래. 그런데 내가 아직도 선생님이냐? 이제 가르치지도 않는데.”

“네? 그럼 뭐라고 불러요?”

“오빠 해봐. 오빠.”

“정말요?”

조금 머뭇거리다가 불러봤다.

“오빠.”

말하고 나니 괜히 웃음이 났다.


과외를 받을 때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있었는데도 그날 집까지 걸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는 오빠가 한 명 더 생겼다.


하지만 짧은 재회는 금세 끝났다.

학교에서는 지연이와 다시 같은 교실에서 하루 종일 얼굴을 마주쳤다.

그런데 예전 같지는 않았다.


어느 날부터 이상한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네 엄마 학교 선생님이라며?”

“응.”

“집에서 엄마가 공부 알려준다며?”

“뭐?”

“아니야? 난 그렇게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러다 더 기분 나쁜 말을 들었다.

내가 지연이의 노트를 베껴서 성적을 올렸다는 말이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지연이의 노트를 빌린 것은 사실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어떻게 필기하는지 궁금했고, 공부하는 방법도 많이 따라 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지연이에게도 말했다.

“그 노트 나도 좀 빌려줘 봐.”

장난처럼 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내 성적을 올려준 비법이 지연이의 노트 한 권에라도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 성적이 오른 것은 아니었다.


수학은 처음부터 다시 배웠고, 모르는 것은 몇 번이고 다시 봤다. 주말에도 바카라상 앞에 앉았고, 나름대로 죽어라 공부했다.

누가 처음 그런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말 때문에 지연이와 멀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좋았으니까.

지연이처럼 되고 싶었고,
지연이와 친구가 된 것이 좋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노트 때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내가 노력하면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더 잘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지연이를 이기고 싶었다.


지연이가 미워서가 아니었다.

늘 나보다 앞서 있던 아이였으니까.
내가 처음 닮고 싶다고 생각했던 아이였으니까.

그런 지연이보다 한 번이라도 잘한다면,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 누구의 노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두고 봐.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