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나는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바라보다 — 의문#7

bybloom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자꾸 아팠다.

지연이가 잘못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마음은 자꾸 지연이를 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는
나도 지연이의 마음을 한번쯤 아프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지연이보다 잘하고 싶었다.


그 아이의 노트를 빌렸기 때문이 아니라,
나도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이 조금 낯설었다.


어머니에게 독서실도 끊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직접 독서실을 알아보더니 내가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출입 문자가 자신의 휴대전화로 오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독서실 간다고 하고 딴 데로 새기만 해.”


설레는 마음 하나 마음껏 품고 있을 여유조차 없는 고3 입시생이었다.

학교, 과외, 독서실.

그해의 나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에도 제대로 마음을 쓰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어머니가 안방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형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어머나, 거긴 지금 몇 시예요?”

고모였다.


예전에는 한국에 살았지만 IMF 이후 미국으로 이민했고, 그 뒤로는 어머니와 가끔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나는 별생각 없이 통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 아버지 이야기가 들렸다.

아빠.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잊고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 집에서 아버지는 어느새 없는 사람처럼 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모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속에서 갑자기 아버지가 다시 나타났다.


그러다 내 이름과 오빠 이름까지 들렸다.

“미영이랑 진영이요?”

나는 나도 모르게 어머니 방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이고, 형님. 그거야 그렇죠.”

“아니에요. 형님. 애들한테도 물어봐야 하고요. 지금 당장은…….”

“네, 네. 알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잠시 후 어머니가 전화를 끊고 방에서 나왔다.


“엄마, 무슨 얘기야? 내 얘기는 뭐야?”

“너 미국 오래.”

“미국?”

“응. 놀러 가는 거 아니고 돈 벌러 오래.”

“갑자기?”

어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물었다.


“왜. 너 갈래?”

고모는 미국에서 일손이 부족하다고 했다.


한국 사람이 많은 곳이라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매장에서 쓰는 말 몇 마디만 익히면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와 나를 보내면 어떻겠느냐고 한 것이었다.

미국.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먼 나라.

그것도 아버지가 아니라 고모에게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도 벌써 3년 가까이 되어가는데 고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누나는 아직도 두 사람이 이혼한 것을 모르는 걸까.

나는 이제 고3이었다.


수능도 얼마 남지 않은 입시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국이라니.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어머니가 말했다.


“생각 좀 더 해봐.”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

“너 왜. 집 나가고 싶어 했었잖아.”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맞았다.

나는 이 집을 떠나고 싶어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떠나는 것’은 대학이었다.

미국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오빠는 제대하고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빠에게도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던 이야기를 하려고 오빠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조용했다.


그러다 갑자기 방에서 큰소리가 났다.

“이게 다 뭐야? 아직도 만나는 거야?”

무슨 일인가 싶어 오빠 방 쪽으로 가다가 멈칫했다.


어머니가 오빠의 방에서 편지가 든 상자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오빠가 군대에 있는 동안 받았던 편지들이었다.

“글쎄 싫다고 했잖아. 고등학생 때부터 그년 만나서 성적 떨어지고. 아버지가 목사라며. 난 싫어. 다 갖다 버려.”

나는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쳤다.


오빠에게는 고등학생 때부터 오랫동안 좋아했던 언니가 있었다.

혼자 좋아한 시간만 거의 7년이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제야 제대해서 제대로 만나보나 싶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여전히 그 언니를 싫어했다.

오빠가 고등학생 때 공부를 망친 것도 그 언니 때문이라고 했다.

전에는 나 때문이라고 했는데.

그날 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더 오갔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오빠는 미국에 가는 문제를 두고 한동안 고민했다.

제대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복학도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야 마음껏 만나볼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빠가 미국에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오빠는 미국으로 가기로 했다.


“오빠 제대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정말 가게?”

“응.”

“학교는?”

오빠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돈은 오빠가 벌 테니까 넌 공부해. 고3이잖아.”

그리고 한마디를 더 했다.


“됐어. 진짜 이 집에는 정을 붙일 수가 없다.”

그 말을 듣고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다며 나와 함께 골목을 서성이던 사람도 오빠였고,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도 꼭 잘돼서 부모님처럼 살지 말자고 했던 사람도 오빠였다.

그런 오빠에게 미국은 돈을 벌러 가는 곳만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 집에서 아주 멀리 떠날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그렇게 오빠가 먼저 떠났다.

얼마 뒤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고모가 사는 곳은 얼바인이었다.

오빠는 고종사촌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다.

영어 이름도 하나 만들었다.

DAVID.


잘 지내고 있다는 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오빠는 미국에서 돈을 벌었고,

나는 대전에서 공부를 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둘 다 이 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오빠가 먼저 떠났다.

나는 아직 떠날 수 없었다.


내게 남은 방법은 공부뿐이었다.

오빠도 미국으로 떠나고 민석 선생님도 군대에 가자 큰 집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같은 동네의 조금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다시 어머니와 나 둘만 남았다.


나는 학교와 과외, 독서실만 오갔다.

지연이를 이기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공부에만 매달리자 성적이 눈에 띄게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문도 더 커졌다.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라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주는 것 아니냐는 말은 아이들 사이를 넘어 선생님들 귀에까지 들어갔다.

수업 시간에 한 선생님이 나를 불러 칠판에서 문제를 풀게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미영이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하는구나. 너희도 부러우면 공부해. 이상한 소문이나 퍼뜨리지 말고.”

그 말이 고마웠다.

공부를 못할 때는 엄마가 선생인데 왜 공부를 못하느냐고 했다.

성적이 오르자 엄마가 선생이니까 시험 문제를 미리 아는 것 아니냐고 했다.

어느 쪽이든 나를 깎아내릴 말은 있었다.


처음에는 억울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아졌다.

아이들이 나를 긁으면 긁을수록 더 욕심이 났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나는 어떻게든 이 학교를 좋은 성적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대전이 아닌 다른 지역의 대학에 가든,

취직을 하든.

어떻게든 이곳을 떠날 것이다.


어느덧 고3의 마지막 시험이 끝났다.

성적표를 받은 날이었다.


지연이는 한동안 성적표만 내려다보다 말없이 울기 시작했다.

늘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지연이가 울자 아이들이 주변으로 모였다.


“뭐야? 3등?”

“3등이라고?”

“말도 안 돼.”

그 순간 몇몇 아이들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나도 내 성적표를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1.


아이들은 재시험을 치러야 하는 것 아니냐, 어머니가 시험 문제를 다 알려준 것 아니냐며 말이 많았다.

하필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에서 처음 보는 1이라는 숫자를 받아 든 것이 짜릿하면서도 이상했다.

나는 지연이를 이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울고 있는 지연이를 보니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전교 1등을 놓쳤으니 집에서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었어도 지연이는 3등이었다.

내가 지연이의 성적을 떨어뜨린 것도 아니었다.

이기고 싶었던 마음과 정말 이겨버린 뒤의 마음은 조금 달랐다.

머지않아 수능도 끝났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지만 내가 그토록 바라던 다른 지역의 기숙사가 있는 대학은 아니었다.

지연이는 나보다 좋은 대학에 진학했다.
학교가 달라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고등학교 마지막 시험이 지연이와 나의 마지막 경쟁이 되었다.

집을 떠나는 것은 아직도 내게 멀고 먼 일처럼 느껴졌다.


수능이 끝나고 나니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민석 오빠에게 편지로 쓰기 시작했다.

1등을 한 일.

수능을 본 일.

오빠가 미국으로 떠난 일.

어머니와 둘이 작은 집으로 이사한 일.

그동안 밀린 숙제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편지에 적었다.

보고 싶다는 말도 썼고,

좋아한다는 마음도 조금씩 적었다.


이제는 선생님과 제자가 아니니까 나를 어린 학생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썼다.

직접 만나서 ‘오빠’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어색했는데 편지에서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빠, 나 미영이.

제대하면 내가 오빠의 여자친구였음 좋겠어.

말로는 못 할 이야기도 편지에는 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사하고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던 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당장 필요한 옷과 그릇만 대충 꺼내놓고 살았다.

주방 수납장을 정리하고 거실에 쌓여 있던 상자도 하나씩 열었다.


한 상자를 열자 바카라이 가득 들어 있었다.

교육과정에 관한 바카라도 있었고 어머니가 읽던 바카라들도 있었다.

어머니의 짐이었다.


그 안에서 가족 앨범도 나왔다.

오랜만에 펼쳐봤다.

아버지가 있었다.

우리 집에서는 이미 없는 사람처럼 되어버린 아버지가 사진 속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앨범을 덮고 다시 상자를 뒤적였다.


그러다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별생각 없이 펼쳐봤다.

익숙한 글씨였다.

어머니의 글씨.

일기장이었다.


읽어도 되는 걸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미 나는 첫 장을 넘기고 있었다.

몇 장을 넘기다가 내 이름이 보여 손이 멈췄다.

미영이.


어머니는 혼자 공부해 성적을 올리는 내가 대견하다고 적어놓았다.

공부를 가르쳐준 것도 아니고,

공부하라고 일일이 챙겨준 것도 아닌데

무언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결국 해내는 내가 놀랍다고 했다.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해내는 아이.

앞으로 무엇을 하든 잘해낼 수 있는 아이라고.

기특하고, 대견하고, 예쁘다고 했다.


나는 그 문장들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내가?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직접 들어본 적은 없었다.


잘했다고도,

대견하다고도,

예쁘다고도.

그래서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말하지 않았을 뿐,

어머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글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몇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에게 당했던 일.

읽던 손이 멈췄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내가 말했을 때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일기장에는 어머니가 설마 하면서도 우려했던 일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알고 있었어?

엄마가 알고 있었다고?


이전 23화22화. 나는 처음 보는 마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