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나는 공부 말고 다른 욕심이 생겼다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바라보다 — 의문#5

bybloom


어머니는 끝내 전화번호를 남겼다.

"생각해 보고 연락 줘요. 조만간 내가 다시 올 테니까."

갈빗집을 나오면서도 나는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엄마, 누군 줄 알고 그래."

"넌 가만히 있어. 과외시켜 달라며."

집에 돌아와서도 어머니는 휴대전화만 들여다봤다.

그리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혼잣말처럼 되풀이했다.

"돈을 너무 적게 불렀나. 연락이 와야 할 텐데……."


어머니가 그렇게까지 연락을 기다리는 걸 보니 의아했다.

갈빗집에서 일하던 그 사람이 대체 뭐라고.

그러다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싶기도 했다.

식탁에 마주 앉아 물었다.


"엄마, 진짜 그 사람한테 나 과외시키려고?"

그제야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나는 살가운 딸도 아니었고, 오빠는 군대에 가 있었다. 아버지까지 집을 나간 뒤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나, 여자 둘만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집에 남자가 한 사람쯤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 학생이 오빠 방에서 지내면서 나를 가르쳐주길 바라고 있었다.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당시 과외비보다 조금 저렴한 비용으로 나를 가르쳐주는 조건이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어머니는 그 무렵 다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으면 비어 있는 방에 월세라도 받거나, 아예 집을 줄여 이사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도 생활은 계속되어야 했으니까.


며칠 뒤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는데 주방 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고개를 내밀었다가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갈빗집에서 봤던 그 학생이었다.


"미영아, 인사해."

어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나자 어머니는 오늘부터 과외를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오빠 방은 어느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창고처럼 쓰던 방도 달라져 있었다. 쌓여 있던 물건들은 사라지고 테이블과 바카라장만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그날부터 우리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매일 한 시간씩 나를 가르쳐주고, 그 외의 시간에는 자기 공부를 하기로 했다고 했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선생님, 그럼 앞으로 저희 집에서 사시는 거예요?"

"응. 그렇게 됐네."

나는 그때까지도 어머니가 갈빗집에서 우연히 그 학생을 발견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얼마 뒤 어머니가 말했다.

"미영아. 가르쳐주시던 선생님한테 감사하다고 인사드리러 가자."

"나 가르쳐주시던 선생님?"

"네 오빠 과외해 주시던 선생님."


그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오빠의 과외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하지? 그리고 나까지?

그분을 만나고서야 알게 됐다.


내가 과외를 시켜달라고 했던 날, 어머니는 먼저 오빠를 고등학생 때부터 가르쳤던 과외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다.

딸이 갑자기 공부를 해보겠다고 하는데 한번 가르쳐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선생님은 이제는 힘들어서 과외를 쉬려고 한다며 거절했다.

대신 자신의 제자 한 명을 소개해주었다.

지방에서 올라와 충남대학교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더 높은 목표를 두고 다시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일하고 있는 곳까지 알려주었다.

갈빗집이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날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갈빗집에 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기를 먹으면서 자꾸만 그 학생을 바라보던 것도,

식당 주인에게 "아드님이세요?" 하고 물었던 것도,

갑자기 그 학생을 불러달라고 했던 것도.

어머니는 이미 알고 찾아간 것이었다.


내가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웬일이래?"

"어쭈, 공부도 하네?"

그렇게 대답하던 어머니여서 나는 또 내 말을 흘려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모르는 사이 전화를 걸었고, 사람을 알아봤고, 결국 그 사람이 있는 곳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어머니가 조금 달리 보였다.

나를 위해 애쓰고 있었구나.

그럼 나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게 처음으로 과외 선생님이 생겼다.

선생님은 주로 수학을 가르쳤다.

문제는 내 기초가 생각보다 훨씬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하자."

처음이라는 게 정말 처음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초등학교 수학부터 다시 시작했다.

수업은 하루 한 시간이었지만 숙제는 많았다.

초등학교 과정부터 따라잡으면서 학교 시험까지 준비하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숙제를 하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바로 알렸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숙제를 하지 않은 날에는 어머니가 선생님 앞에서 나를 크게 혼내기도 했다.

몇 번 겪고 나니 알았다.

선생님과 어머니는 내가 어설프게 속일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수학만 하지 않았다.

영어도, 국어도, 슬롯도, 역사도 함께 봐주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선생님은 좀처럼 가르쳐주지 않았다.


"교과서 열 번 읽어."

그게 숙제였다.

며칠 뒤에는 물었다.


"뭐가 기억나?"

시험이 가까워지면 아예 교과서를 덮게 했다.

"갑오개혁에 대해 설명해 봐."

나는 아는 만큼 말했다.

말하다 막히면 다시 교과서를 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다.

아니, 과외 선생님이면 가르쳐줘야지. 왜 자꾸 나한테 설명하라는 거야.

그런데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이 많아졌다.


그때는 몰랐다.

선생님은 내게 답을 가르쳐주는 대신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도 조금씩 달라졌다.


학교에서는 지연이처럼 교과서를 깨끗하게 두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적어주는 것만 열심히 받아 적었다.

대신 집에 돌아오면 달랐다.

숙제를 하고, 교과서를 읽고, 또 읽었다.

물론 처음부터 모범생이 된 건 아니었다.


"열 번 읽었어?"

"네."

사실 두 번 읽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귀신같이 알아챘다.


"안 읽었지?"

"읽었는데요."

"그럼 설명해 봐."

그 한마디면 끝이었다.

몇 번 당하고 나니 거짓말하는 것도 포기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학교가 끝나면 과외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에서는 이상하게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선생님 앞에서 공부하면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바로 물어볼 수도 있었고, 숙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덜 혼날 것 같았다.

나는 옆에서 소리 내어 교과서를 읽기도 하고, 공부하다 불쑥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선생님은 한 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내 과외 시간이 끝나면 자기 바카라을 폈다.

내가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도 과외방의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선생님도 공부하고 있었다.


포항공대에 가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그 모습을 매일 옆에서 보는 것도 어쩌면 내게는 공부였다.

그리고 조금씩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에서 30등, 40등 언저리에 있던 내 이름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14등.

처음 받아보는 등수였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말했다.


"미영이가 지연이랑 친하게 지내더니 성적이 많이 올랐네."

지연이까지 덩달아 칭찬을 받았다.

지연이는 어느 순간부터 노트를 빌려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야, 너 요즘 왜 이렇게 공부 열심히 해?"

조금 시샘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지연이는 여전히 전교 1등이었다.


나는 이제 지연이의 노트를 빌리지 않아도 됐다.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이 집을 떠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이유도 생겼다.

어머니에게 내가 해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열일곱의 내가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효도가 공부라고 생각했다.


성적표를 받아 들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 정도면 어머니도 놀라겠지.

어쩌면 잘했다고 한마디 해줄지도 몰랐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성적표를 내밀었다.


"엄마, 이것 봐."

어머니는 성적표를 한참 들여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다음 시험에는 10등 안에 들 수 있겠네."

그게 전부였다.

칭찬 한마디 해주지. 쳇.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나도 하면 되는구나.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나는 선생님에게 졸랐다.

"선생님, 시험도 끝났는데 놀이동산 데려가 주면 안 돼요?"

선생님이 웃었다.


"그래. 고생했는데 하루쯤은 놀아도 되겠지."

그렇게 선생님과 꿈돌이동산에 갔다.

놀이기구를 타고 돌아다니며 신나게 놀았다.


공부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놀았던 하루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자마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머니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우리 둘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생님!"

나와 선생님이 동시에 멈춰 섰다.


"선생님은 선생님 임무를 다해야지, 애랑 지금 데이트하고 놀 때예요?"

"엄마, 내가 가자고—"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수학 선생님인데 수학 성적이 제일 안 좋은 거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바로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속으로 억울했다.

시험도 끝났는데 하루 정도는 좀 봐주지.

그때 내 수학 점수는 67점이었다.


기초가 워낙 부족해서 고등학생이면서도 아직 중학교 수학 과정을 따라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선생님을 혼내는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내가 공부를 못하면 선생님이 혼나는구나.

어머니는 나뿐 아니라 내 공부를 맡은 선생님에게도 엄격했다.

괜히 선생님에게 미안해졌다.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말했다.

"선생님, 제가 가자고 졸랐다고 하시지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아니야. 나도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걸. 나도 덕분에 잘 놀았지 뭐."

시험이 끝났지만 공부는 다시 시작됐다.

수학은 여전히 기초부터였고, 다른 과목도 선생님이 알려준 방법대로 공부했다.


그렇게 다음 시험이 왔다.

이번에는 8등이었다.

전교에서도 100등 안에 들었다.

14등짜리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다음 시험에는 10등 안에 들 수 있겠네."

정말 10등 안에 들었다.

67점이었던 수학도 80점대로 올랐다.

처음에는 이 집을 떠나고 싶어서 시작한 공부였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더 열심히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해지고 있었다.

처음으로 성취감이라는 것도 느껴봤다.


11월이 되자 이번에는 선생님이 시험을 보러 갔다.

포항공대에 가기 위해 다시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제야 내가 잠든 뒤에도 좀처럼 꺼지지 않던 과외방의 불빛이 다르게 보였다.

선생님은 나를 가르치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향해 계속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의 시험이 끝나자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포항공대에 합격하면 선생님은 포항으로 가는 건가.

그러면 이제 나를 안 가르쳐주나.

공부하는 방법은 조금 알게 되었지만 아직은 선생님이 더 필요했다.

적어도 내가 고3이 될 때까지는 계속 가르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내가 아쉬운 건 정말 공부 때문일까.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과외방에 선생님이 있었다.

모르는 것을 물으면 알려주었고, 내가 소리 내어 교과서를 읽어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숙제를 안 하면 어머니에게 일러바치기도 했지만, 꿈돌이동산에 가자고 조르면 하루쯤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아버지와 오빠 말고 한집에서 이렇게 오래, 가까이 지내본 남자는 처음이었다.

선생님이 포항으로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싫었다.

계속 우리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에도 욕심이 생겼는데,

어느새 다른 욕심도 생기고 있었다.

선생님이 계속 나를 가르쳐줬으면 좋겠다는 욕심.

아니,

그냥 계속 우리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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