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바라보다 — 의문#4
그날 이후 어머니는 더 이상 내 말을 거짓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빠가 봤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오빠는 정말 봤을까.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다.
어쩌면 내 말을 끝까지 믿지 않는 어머니에게서 나를 지켜주려고, 오빠가 봤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어도, 정말 봤지만 그때는 지켜주지 못했던 것이어도.
적어도 그날 오빠는 내 편에 서주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나는 없는 일을 지어내는 아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내 말을 믿게 되었다고 해서 우리 사이가 갑자기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나를 안아준 것도 아니었고,
그동안 믿어주지 않아 미안하다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냥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버지만 없는 일상으로.
오빠는 부대로 돌아가기 전 내게 몇 가지를 당부했다.
"미영아. 교회 계속 다녀."
예전부터 오빠는 어머니를 전도하자고 했다.
자기가 군대에 있는 동안에도 나 혼자라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라고 했다. 어머니가 교회에 나올 수 있게 기도하고, 우리 가족이 다시 화목해질 수 있게 기도하라고 했다.
그리고 뜻밖의 말을 하나 더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를 위해서 내가 왜 기도해야 하지.
"같이 살게 해 달라는 기도 말고. 다른 데서라도 마음 편하게, 건강하게 사시라고."
오빠가 말했다.
"그래야 너도 훌훌 털 수 있는 거야.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 말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도했다.
어머니가 교회에 다니게 해달라고.
우리 가족이 더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버지도 어디에 있든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그리고 나도 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달라고.
이상하게도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다시 학교에 다니고, 교회에 다니고, 공부를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일 없는 열일곱 살의 생활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데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공부를 하고 싶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공부를 잘해서 이곳을 떠나고 싶어졌다.
문득 오래전 오빠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 뉴스를 보던 날, 오빠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교환학생으로 아주 먼 나라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그게 오빠의 꿈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공부를 잘하면 나도 멀리 갈 수 있지 않을까.
대학에 가면 이 집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의 내게 공부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해 낸 또 하나의 탈출구였다.
그렇다고 마음먹었다고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내게 공부를 잘하라고 닦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성적이 좋지 않다고 혼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바카라상에 앉아 있으면 한 마디씩 했다.
"웬일이래?"
"어쭈, 공부도 하네?"
별뜻 없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펴놓았던 바카라을 덮고 싶어졌다.
잘해보려고 이제 막 생긴 마음이 쑥 들어가 버렸다.
어머니는 몰랐을 것이다.
내가 원했던 관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밥은 먹었는지.
학교생활은 어떤지.
공부하다 어려운 것은 없는지.
그런 것을 한 번쯤 물어봐 주는 관심.
어쩌면 나는 공부보다 그런 게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한번 말해보기로 했다.
"엄마, 나도 오빠처럼 과외시켜 줘."
어머니가 나를 쳐다봤다.
"뭐가 되려고 그래?"
"꼭 뭐가 돼야 돼?"
"지금부터 공부해서 교대는 갈 수 있겠니?"
"오빠도 교대 간 건 아니잖아."
말문이 막혔다.
내가 교대에 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이어서였는지, 어머니의 입에서는 뜬금없이 교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말은 내가 이제 막 피워보려던 마음부터 꺾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혼자 해보기로 했다.
학교에서도 일부러 수업 시간에 졸지 않으려고 했다.
중학생 때 운동을 그만두고 싶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그랬다. 뒤늦게 미술학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짧은 시간 동안 죽어라 그림을 그렸고 결국 디자인고등학교에 합격했다. 자격증도 한 번에 땄다.
이번에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공부는 그림과 달랐다.
기초가 없었다.
바카라을 읽어도 뭐가 중요한지 몰랐다.
어디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마침 시험이 끝나고 자리를 바꾸면서 전교 1등을 하는 지연이와 짝이 되었다.
지연이는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고 했다. 미술을 배우기도 했지만 성적에 비해 우리 학교에 하향 지원했고, 입학한 뒤에는 전교 1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짝이 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도 나는 지연이가 공부하는 모습을 유심히 봤다.
지연이가 교과서에 줄을 그으면 나도 따라 그었다.
무언가를 적으면 슬쩍 물었다.
"그거 뭐 적은 거야? 나도 좀 보여주면 안 돼?"
처음에는 귀찮아했다.
그래서 매점에 갈 때마다 지연이가 좋아하는 보름달 빵을 하나씩 사다 줬다.
"야, 누가 보면 내가 너 셔틀 시키는 줄 알겠다. 왜 이래?"
그러면서도 몇 번 빵을 받아먹더니 어느 날부터는 노트를 빌려줬다.
나는 그 노트를 집으로 가져왔다.
똑같이 옮겨 적었다.
지연이가 교과서 어디에 줄을 그었는지 찾아 나도 줄을 긋고, 옆에 적어놓은 메모까지 그대로 옮겼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다음 날 다시 물었다.
귀찮아할 때면 지연이가 관심 있어하던 하이테크 펜을 하나씩 건넸다. "가질래?"
지금 생각하면 공부를 배우는 방법조차 참 나다웠다.
빵과 펜으로 전교 1등의 공부법을 조금씩 얻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연이가 갑자기 물었다.
"야, 배미영. 너네 엄마 학교 선생님이라며?"
"응."
"근데 너 공부는 안 가르쳐주시냐?"
순간 머리끝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지연이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야, 우리 엄마는 생선 팔아."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린내 나는 엄마처럼 살지 말라고 하도 그러셔서 난 공부한단 말이야."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말했다.
"나 엄마랑 안 친해."
"누군 엄마랑 친하냐."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공부 말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지연이는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했다.
"나는 없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말해놓고 나서야 이상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연이에게는 지연이의 상처가 있었고,
나에게는 나의 상처가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내 마음에 오래 남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지연이의 어머니는 생선을 팔면서도 지연이의 공부를 챙기고 있었다.
나는 그게 부러웠다.
서로 상처를 조금씩 꺼내놓고 나니 우리는 전보다 가까워졌다.
얼마 뒤 지연이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지연이 어머니는 나를 보자 반갑게 맞아주셨다.
"지연이가 친구 데리고 온 건 처음인데. 뭘 좋아할지 모르겠네. 밥 먹고 가."
식탁 한가운데에는 역시 생선이 놓여 있었다.
지연이에게는 지겨운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에는 이상하리만큼 근사해 보였다.
꽁치와 갈치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생선 위에는 엑스자로 칼집까지 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지연이가 ‘비린내 나는 엄마’라고 말했던 그 생선이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마치 금가루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밥상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였을까.
생선 몇 마리가 마치 고급 한정식집 음식처럼 근사해 보였다.
"입에는 잘 맞니?"
나는 맛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 지연이네 집에서 나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교과서였다.
학교에서 보던 교과서가 집에도 한 벌씩 더 있었다.
전과도 있었고, 선생님들이 참고하는 교사용 바카라도 있었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지연이의 교과서는 깨끗했고, 나는 지연이가 노트에만 필기를 열심히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집에 있는 바카라들은 달랐다.
너덜너덜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에게는 공부할 바카라이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집에도 있었다.
나는 그걸 처음 알았다.
밥을 먹고 나자 지연이가 말했다.
"엄마, 미영이 데려다주고 올게."
집을 나선 뒤 지연이가 갑자기 물었다.
"야. 어때, 우리 엄마?"
"뭐가?"
"어때 보여?"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무 좋으시던데. 밥도 맛있었어."
지연이가 피식 웃었다.
"네 앞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나 중학교 때도 성적 좋았는데 하향 지원해서 디자인고 왔다고 엄마한테 맞아. 아마 전교 1등 안 하면 나 쫓겨날걸."
놀라서 지연이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새 학기 되면 교사용 전과 같은 거 중고바카라방에서 구해오고, 학교 뒤 소각장 같은 데 버려진 것도 찾아와."
그러더니 나를 쳐다봤다.
"넌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니까 이런 거 쉽게 구하겠다. 좋겠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지연이가 부러웠고, 지연이는 내가 부러웠다.
지연이는 공부 때문에 숨이 막혔고,
나는 공부에 관심조차 가져주지 않는 것이 서러웠다.
그래도 그날만큼은 지연이가 부러웠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교사용 전과 같은 거 없어?"
"뭐?"
"고등학교 선생님 아는 사람도 없어? 나도 좀 구해다 줘."
결과는 또 싸움이었다.
지연이네 집에서 무엇을 보고 왔는지,
왜 갑자기 그런 것을 구해달라는 건지,
나는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했다.
어머니도 내가 왜 저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또 서로 화만 냈다.
그런데 그날 저녁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나와. 밥 먹으러 가자."
어머니는 나를 갈빗집으로 데려갔다.
고기를 먹다가 어머니의 시선이 자꾸 한쪽으로 향했다.
나도 따라 바라봤다.
젊은 남자 한 명이 서빙을 하고 있었다.
손님이 부르면 뛰어나가 고기를 구워주고, 상을 치우고, 주문을 받았다.
그런데 손님이 뜸해지면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카라을 폈다.
시끄러운 갈빗집 한쪽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다 식당 주인에게 물었다.
"아드님이세요? 공부를 참 열심히 하네요."
아들이 아니라고 했다.
지방에서 올라와 충남대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포항공대 진학을 목표로 다시 공부 중이라고 했다.
숙식을 제공해 준다고 해서 이곳에서 일하면서 틈틈이 공부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던 어머니가 갑자기 그 학생을 불러달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잠시 뒤 어머니가 그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
그리고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우리 집에서 먹고 자면서 우리 딸 과외 좀 해줄 수 있어요?"
나는 어머니를 바라봤다.
"돈은 내가 줄게."
그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부 때문에 싸웠다.
나는 어머니가 내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는 이제 와 공부하겠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갈빗집 한쪽에서 공부하는 낯선 대학생을 한참 바라보던 어머니는,
그 사람을 우리 집으로 데려오려 하고 있었다.
나를 가르쳐달라고.
그때는 몰랐다. 어쩌면 그것도 어머니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방식이었는지.
다음주부터는 늦었지만봄, 꽃을피우다 연재일을 월, 목요일로 두번 연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