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리노 레스피기
1924년 12월 14일 저녁, 로마의 아우구스테오. 베르나르디노 몰리나리가 지휘대에 섰고 삼천 명이 넘는 관객이 앉아 있었다.
이 홀은 이상한 건물이었다. 기원전 28년,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자기와 후손을 묻으려고 지은 거대한 원형 무덤이 바닥에 있었다. 12세기에 콜론나 가문이 그 위를 요새로 개조했다. 가문이 몰락한 뒤 로마의 귀족들이 정원과 포도밭으로 썼다. 16세기에는 원형이라는 모양 때문에 투우와 마상시합의 경기장이 되었다. 18세기에는 극장이 들어섰다. 1908년에 그 자리가 콘서트홀이 되었고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관현악단이 여기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한 건물에 여섯 겹의 시간이 쌓여 있었다. 그날 밤 관객은 황제의 무덤 안에 앉아 새 곡의 초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 번째 악장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클라리넷이 긴 음 하나를 붙잡고 있었고 현악기는 약음기를 낀 채 잘게 떠는 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소리가 들어왔다. 무대 위 어느 악기의 소리도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이 울고 있었다.
축음기였다. 악보에는 재생할 음반의 번호까지 적혀 있었다. 디스크 R.6105, 「나이팅게일의 노래」. 1910년 독일에서 밀랍 원반에 녹음된, 살아 있는 새를 담은 최초의 상업 음반이었다. 작곡가가 악보에 기계를 틀라고 지시한 것은 음악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음악에서 새소리를 흉내 내는 일은 오래된 관습이다. 16세기에 클레망 자느캥은 「새들의 노래」에서 성부에 새 울음을 음절로 적어 넣었다. 지빠귀는 티티피티로, 나이팅게일은 프리앙으로 불렀다. 하이든의 현악사중주 한 곡은 첫 악장 바이올린 선율 때문에 종달새라는 별명을 얻었고, 다캥은 하프시코드로 뻐꾸기 울음을 옮겼다.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 둘째 악장 끝에서 아예 악보에 새 이름을 적었다. 플루트 위에는 나이팅게일, 오보에 위에는 메추라기, 두 대의 클라리넷 위에는 뻐꾸기라고 썼다.
레스피기는 흉내를 쓰지 않았다. 실제 새가 운 소리를 그대로 들려주려 했고, 1924년에 그 방법은 14년 전에 녹음된 음반을 트는 것이었다. 그도 악보에 적기는 했다. 다만 그가 적은 것은 새의 이름이 아니라 음반의 번호였다.
이 장면에 오토리노 레스피기라는 사람이 거의 다 들어 있다. 그는 지나간 시간을 지금의 자리에 세우는 일에 평생을 썼다. 그리고 그가 하필 그 일을 한 도시가 로마였다.
레스피기는 볼로냐 사람이다. 1879년에 태어나 그곳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배웠고 초기 음악 학자 루이지 토르키에게 옛 악보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 1899년에 졸업한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극장이 이탈리아 오페라 시즌에 쓸 현악 주자를 구한다는 것을 알고 지원해 비올라 수석으로 채용됐다. 러시아 궁정이 이탈리아 음악가를 고용해온 오랜 관행의 끝자락이었다. 그가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오케스트레이션을 배운 것이 이 시기다. 배움의 형태와 기간은 아내 엘사의 회고에 주로 의존하고 있어 분명하지 않지만, 악기를 어떻게 겹쳐야 색이 생기고 어느 음역에서 무엇을 빼야 다른 것이 들리는지에 대한 감각이 이때 잡힌 것은 이후의 악보가 증명한다.
1913년에 로마로 옮겨왔다. 그리고 그 도시를 세 번 썼다. 《로마의 분수》가 1916년, 《로마의 소나무》가 1924년, 《로마의 축제》가 1928년이다.
세 곡의 공통점은 로마를 소재로 삼은 것뿐 아니라 로마를 여러 시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장소로 다룬다는 데 있다.
《로마의 소나무》 네 악장을 순서대로 보면 그 설계가 드러난다. 첫 악장은 보르게세 별장의 정원이다. 17세기 추기경 가문이 만든 정원에서 지금의 아이들이 뛰어논다. 둘째 악장은 카타콤베이고 땅 밑에서 초기 기독교의 성가가 올라온다. 셋째 악장은 자니콜로 언덕의 밤이며 여기에는 시대가 없다. 달과 새와 나무만 있다. 마지막 악장은 아피아 가도의 새벽이고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 군대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온다.
네 악장은 오후에서 시작해 밤을 지나 새벽으로 끝난다. 그러면서 각 악장이 놓인 시대는 17세기와 초기 기독교 시대와 현재와 공화정기로 서로 다르다. 네 악장에 공통으로 남는 것은 제목에 붙은 소나무다.
둘째 악장에서 그가 쓴 방법을 보면 설계가 더 분명해진다. 여기 나오는 성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레고리오 성가로, 키리에 「클레멘스 렉토르」와 미사 9번 「쿰 유빌로」의 상투스를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중 상투스를 무대 뒤에 따로 배치한 트럼펫 한 대에 맡겼다.
이 배치는 400년 전 베네치아에서 왔다. 산 마르코 대성당에는 성가대석이 양쪽으로 마주 보게 두 개 있었고, 1527년에 그곳 악장이 된 아드리안 빌라르트가 그 구조를 이용해 합창단을 나눠 세우기 시작했다. 나뉜 합창단이라는 뜻으로 코리 스페차티라고 부른다. 안드레아와 조반니 가브리엘리가 여기에 기악을 더해 규모를 키웠다.
이 방식으로 노래하면 청중에게 소리가 한 덩어리로 오지 않는다. 왼쪽에서 한 마디가 오고 오른쪽에서 대답이 오는데, 두 소리 사이에 거리만큼의 시간이 놓인다. 성당의 잔향이 길어서 앞선 소리가 아직 공중에 남아 있는 동안 다음 소리가 시작된다. 청중은 음악을 눈앞에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앉은 자리를 둘러싸고 도는 것으로 듣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양쪽이 함께 울리면 그때까지 나뉘어 있던 공간이 한꺼번에 채워진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음높이와 화성 말고도 방향이라는 재료를 하나 더 갖고 있었던 셈이다.
둘째 악장의 상투스는 무대 뒤 트럼펫이 맡는다. 같은 선율을 무대 위에서 불게 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했다면 오케스트라의 음향 안에 성가가 섞였을 것이다. 무대 뒤로 빼면 소리가 다른 방향에서 오고 벽을 한 번 거쳐 도달한다. 청중은 그 선율을 무대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구별해서 듣는다. 성가는 지금 연주 중인 음악의 일부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들려오는 것이 된다. 그 아래에서 오르간 페달이 16피트와 32피트로 낮은 음을 받치고, 트롬본과 호른이 좁은 음역 안에서 같은 음형을 반복한다.
셋째 악장의 축음기도 같은 배치다. 레스피기는 무대 밖에 놓인 기계로 새소리를 들려주었다. 음색이 악기와 전혀 달라서 청중은 그것을 오케스트라의 일부로 듣지 못한다. 대신 연주가 벌어지는 장소가 홀이 아닌 다른 곳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자니콜로 언덕의 밤이 객석 쪽으로 옮겨오는 것이다. 이 시도는 초연 당시 상당한 논란을 불렀다. 레스피기가 베네치아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무대 밖에 사람 대신 기계를 놓았다는 것뿐이다.
레스피기가 다른 시대의 소리를 다루는 방식은 일관됐다. 그것을 오케스트라 안에 녹여 넣지 않고 오케스트라 바깥에서 들어오게 만들었다. 시간의 차이를 공간의 차이로 바꾼 것이다. 그 수단은 16세기 베네치아에서 가져왔고, 매체만 1924년의 것으로 바꿨다.
그는 16세기와 17세기의 류트 악보를 뒤져 이름이 남지 않은 작곡가들의 무곡을 찾아냈고 그것을 현대 오케스트라로 옮겼다. 《고풍스러운 무곡과 아리아》 세 모음곡이 그 결과물이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몬테베르디의 작품으로도 같은 작업을 했다. 레스피기는 사라진 음악을 지금의 연주회장에 들여놓을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일을 했다.
같은 시기 로마에서는 다른 종류의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1922년에 권력을 잡았다. 그가 국가의 정체성으로 꺼내 든 것이 고대 로마였다. 로마니타, 로마다움이라 불린 이 정바카라은 신생 정권에 정통성을 공급하는 장치였다. 파시스트당의 상징이며 당기인 파스케스부터가 고대 로마 관리들이 들고 다니던 도끼 다발이었다. 정권은 스스로를 제국의 후계자라고 불렀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파시즘은 1919년에 만들어진 신생 운동이었고 왕조도 교리도 역사도 없었다. 1차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전승국이면서도 원하던 영토를 얻지 못했고, 공장 점거와 파업이 이어졌으며, 자유주의 정부는 그 혼란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런 시기에 권력을 쥔 집단이 자기를 정당화하는 흔한 방법이 오래된 계보에 자신을 잇는 것이다. 무솔리니가 고른 계보가 로마 제국이었다. 황제의 로마와 교황의 로마 다음에 오는 세 번째 로마라는 표현이 이때 널리 쓰였다. 그러려면 제국이 눈에 보여야 했다.
1932년 10월, 무솔리니는 자기 집무실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에서 콜로세움까지 이어지는 대로를 열었다. 제국의 길이라는 뜻의 비아 델 임페로였다. 개통식 날 그는 말을 타고 그 길을 행진했고 1922년 로마 진군에 참여했던 만칠천 명이 검은 셔츠를 입고 뒤를 따랐다. 로마 진군 10주년 기념 행사였다.
공사는 로마에서 가장 밀집한 주거 지역을 관통했다. 고대의 유구와 중세의 골목과 르네상스의 건물이 함께 철거됐다. 교회 다섯 채가 없어졌고 746가구가 집을 잃었다. 발굴은 급하게 진행되어 출토품의 상당수가 어느 유적에서 나왔는지 기록되지 않은 채 상자에 담겼다. 철거 지역의 저소득 주민들은 도시 외곽에 급조된 주거지로 옮겨졌다. 무솔리니는 1928년에 로마의 주택 문제는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을 막고 이미 사는 사람을 가차 없이 내보내야 풀린다고 썼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없앨지는 이미 1925년에 정해져 있었다. 그해 말 무솔리니는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새로 임명된 로마 총독에게 지시를 내렸다. 거대한 참나무의 줄기를 주위에 붙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풀어놓으라고 했다. 아우구스테오와 마르첼로 극장과 카피톨리노와 판테온 주위에 길을 내라고 했다. 쇠퇴의 세기 동안 그 주위에 자라난 것은 모두 사라져야 하며, 천 년 된 기념물들은 필요한 고독 속에서 거대해져야 한다고 했다.
1934년 10월 22일, 무솔리니는 아우구스투스 영묘 옆 건물 지붕에 올라가 카메라 앞에서 곡괭이를 휘둘렀다. 영묘 주변에 쌓여 있던 백 채가 넘는 후대 건물이 그렇게 철거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겹은 이렇게 정리됐다. 맨 아래 한 층만 남기고 나머지는 쇠퇴의 세기에 자라난 것으로 분류되어 제거됐다.
레스피기가 하던 일을 보면 정권과 반대였다. 한쪽은 사라진 층을 다시 들여왔고 다른 쪽은 쌓인 층을 걷어냈다. 그런데 둘 다 로마의 과거를 근거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에서는 구분되지 않았다.
비아 델 임페로가 열리고 두 달 뒤, 이탈리아의 주요 일간지 세 곳에 한 문서가 실렸다. 「19세기 낭만 예술의 전통을 위한 이탈리아 음악가 선언」이라는 제목이었다. 열 명이 서명했고 그중에 레스피기가 있었다.
선언의 내용은 이랬다. 미래주의의 무모한 실험이 오래된 예술적 이상을 파괴하고 있다. 음악에서 인간적 내용이 사라지고 있다. 미리 정해진 기술 체계로 곡을 생산하는 기계적 시연이 예술의 자리를 차지했다. 마지막 문장이 겨냥한 대상은 명확했다. 쇤베르크의 12음 기법, 그리고 이탈리아 안에서 그 흐름을 대변하던 알프레도 카셀라와 잔 프란체스코 말리피에로였다.
문장만 놓고 보면 미학적 논쟁이다. 어느 시대에나 있었고 지금도 있는 종류의 다툼이다. 문제는 이 문장들이 1932년 로마에서 어디에 착지했는가에 있다.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쇠퇴의 세기에 자라난 것을 걷어내자는 말이 같은 도시에서 같은 해에 발화되고 있었다. 한쪽은 음악에 대한 이야기였고 다른 쪽은 도시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정권은 두 이야기를 하나로 취급했다. 실제로 이 선언은 이탈리아 음악계를 정권의 조직 안으로 끌어들이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년 뒤인 1934년 왕령으로 파시스트 음악가 조합이 설립됐고, 서명자 여럿이 그 조직의 간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같은 해 레스피기는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다. 예순 명으로 구성된 이 기관의 회원은 정권에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매달 지급되는 수당과 무료 철도 이용권을 받았다. 서약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한 해 전에 드러나 있었다. 1931년 정권은 전국의 대학교수에게 국왕과 파시스트 정권에 대한 충성 서약을 요구했는데, 천이백 명이 넘는 대상자 중 서약하지 않은 사람이 열한 명에서 열두 명이었고 그들은 교수직을 잃었다.
《로마의 소나무》 마지막 악장은 이보다 훨씬 앞선 1924년에 쓰였다. 로마의 과거를 음악으로 옮기는 작업은 그전부터 이미 그의 일이었다. 《로마의 분수》는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기 6년 전인 1916년 작품이고, 옛 악보를 뒤지는 습관은 볼로냐 학생 시절부터의 것이다. 정권이 요구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 그가 이미 하고 있던 일 위로 정권의 사상이 나중에 합세한 것이다.
레스피기가 직접 붙인 설명에 따르면 마지막 악장은 안개 낀 아피아 가도의 새벽이고, 집정관의 군대가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개선하는 장면이다. 행진을 크게 만드는 표준적인 방법은 금관을 늘리는 것이다. 레스피기는 다른 데서 시작했다.
오르간의 음색은 파이프 길이로 결정되는데, 8피트는 건반을 누른 음이 그대로 나고 16피트는 한 옥타브 아래, 32피트는 두 옥타브 아래가 난다. 세 가지를 함께 열어둔 채 페달로 시b 하나를 밟으면 같은 음이 세 옥타브에 걸쳐 동시에 울린다. 그중 32피트 쪽 시b은 초당 열다섯 번 남짓 진동하는 음이라 사람의 귀가 음높이로 잡아내는 하한 아래에 있다. 그 음은 선율로 들리지 않고 바닥의 떨림으로 전달된다.
그 위에 고대 로마의 군용 나팔인 부치네를 얹었다. 다만 이 악기는 현존하지 않아서 연주에서는 플뤼겔호른이나 색스혼으로 대체한다.
레스피기의 실험은 같은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방향이 달랐다. 축음기를 악보에 넣은 것도, 가청 하한 아래의 음역을 바닥에 깐 것도, 사라진 악기를 편성표에 적어 넣은 것도 당시 누구도 하지 않던 일이다. 다만 쇤베르크와 스트라빈스키가 새로운 소리를 얻기 위해 조성을 버리고 박절을 깨뜨렸다면, 레스피기는 이미 사라진 소리를 다시 들리게 하려고 새로운 수단을 찾았다. 수단은 앞을 향했고 목적은 과거를 향했다.
「19세기 낭만 예술의 전통을 위한 이탈리아 음악가 선언」에 서명하기 열여덟 달 전 저녁, 볼로냐 시립극장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할 예정이었다. 세상을 떠난 친구 주세페 마르투치를 기리는 연주회였고 그는 지휘료도 받지 않기로 했다. 극장에 정권의 고위 인사들이 오기로 되어 있었고, 그래서 파시스트당 당가 조비네차와 왕실 찬가를 먼저 연주하라는 요구가 들어왔다. 토스카니니는 거부했다. 낮 동안 교섭이 이어졌고 그는 딸과 함께 차를 타고 예정보다 늦게 극장에 도착했다.
극장 옆문에서 검은 셔츠단이 그를 둘러쌌다. 예순네 살의 지휘자는 왼쪽 뺨을 손바닥으로 맞았고 얼굴에 주먹을 여러 대 맞았다.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연주회는 취소됐고 그는 브룬 호텔로 피신했다. 파시스트 간부가 무리를 끌고 호텔까지 찾아와 신변의 안전을 원하면 당장 도시를 떠나라고 통보했다.
이때 레스피기가 간부들 사이에 들어가 중재했다. 그 결과로 얻어낸 것은 하나였다. 그날 밤 자기가 토스카니니와 함께 기차역까지 가겠다는 것이었다. 협상의 조건이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닷새 뒤 볼로냐 지역의 전문직과 예술가 단체는 총회를 열어 토스카니니의 태도가 비애국적이었다고 규탄하는 결의를 냈다. 로마에 살던 레스피기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토스카니니는 그 뒤 이탈리아를 떠났고 무솔리니의 나라에서 다시는 지휘하지 않았다. 여권을 압수당했고 전화와 우편을 감청당했다.
레스피기는 맞은 사람을 기차에 태워 보냈고, 때린 체제 안에 남았다. 그리고 일 년 반 뒤, 새로운 음악이 예술을 파괴하고 있으며 19세기의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언에 자기 이름을 적었다. 파시스트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시 이탈리아 파시즘은 독일과 달리 예술가에게 당적을 요구하지 않았고 아카데미 회원직도 당원 자격과 무관했지만, 그가 당원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가 거절했다는 뜻이 되지 못했다. 무솔리니에게 곡을 헌정한 적도 없다.
전후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 시대에 성공했던 작곡가들이 차례로 신용을 잃고 있었다. 레스피기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엘사 레스피기는 남편의 평가를 되돌리기 위해 전기를 썼다. 남편은 정치가 아니라 예술에 헌신한 사람이었다는 것이 그 바카라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1935년 말, 《루크레치아》라는 오페라를 쓰던 중에 레스피기는 열과 피로에 시달렸다. 이듬해 1월 검사에서 세균성 심내막염 진단이 나왔다. 당시로서는 치료법이 없는 병이었다. 수혈을 세 차례 받았고 독일에서 들여온 실험적인 약을 썼다. 엘사는 병의 심각성을 바깥에 알리지 않았다. 1936년 4월 18일 레스피기는 로마에서 쉰여섯의 나이로 죽었다.
그로부터 3주 뒤인 5월 9일 저녁, 무솔리니는 베네치아 광장의 발코니에 나와 제국의 재건을 선포했다. 에티오피아 침공이 끝난 직후였다.
나흘 뒤인 5월 13일, 아우구스테오에서 마지막 연주회가 열렸다. 정권이 아우구스투스의 영묘를 발굴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위에 얹힌 홀은 사라져야 했다. 이후 이 년에 걸쳐 건물은 철거됐고 주변 구역은 평지가 되었으며 그 자리에 아우구스투스 황제 광장이 들어섰다.
1937년 9월, 정권은 아우구스투스 탄생 2000년 기념 사업을 시작했다. 로마니타 전시회가 열렸고, 개막식에서 전시를 총괄한 고고학자는 무솔리니를 부활한 제국 이탈리아의 새로운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렀다.
전쟁이 끝나고 이탈리아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 파시즘의 시대에 성공했던 예술가들의 이름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조르다노가 무너졌고 마스카니가 무너졌다. 레스피기의 이름도 그 목록에 들어갔다. 다만 그의 음악은 연주가 끊기지 않았다. 로마 3부작이 대형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한 번에 보여주는 곡이었기 때문이다. 토스카니니와 쿠세비츠키와 프리츠 라이너가 일찍부터 이 곡들을 레퍼토리에 올렸고 특히 미국에서 자주 연주됐다. 스테레오 녹음이 보급되던 시기에는 재생 장치의 성능을 확인하는 음반으로도 쓰였다. 그래서 로마 3부작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자주 연주되는 관현악 작품에 속한다. 대신 다른 것이 붙었다. 화려하지만 얄팍하다는 평가, 소리만 요란하고 남는 것이 없다는 문장이다. 20세기 이탈리아 작곡가 중 국제 레퍼토리에서 자리를 지킨 사람은 사실상 그 하나뿐인데도, 평가에서는 늘 아래쪽에 놓였다.
평가가 로마 3부작에 몰려 있는 동안 가려진 것이 그의 복원 작업이다. 《고풍스러운 무곡과 아리아》에 실린 곡들은 16세기와 17세기의 류트 악보에서 나왔고 그중 다수는 작곡가의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다. 레스피기가 옮겨 적지 않았다면 그 선율들은 서가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화려하다는 말로 요약된 작곡가가 정작 조용한 곡들을 남겼고, 그 곡들은 정권과 아무 관계가 없다. 특히 세 번째 모음곡은 현악기만으로 연주된다. 옛 춤곡과 노래를 옮긴 것이라 선율 자체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익숙하게 다가오는데, 현악 편성을 거치면서 원래 류트와 기타로 울리던 것과는 다른 결이 생긴다. 소박한 재료가 세련된 마감을 얻은 셈이다. 레스피기를 처음 듣는 사람에게 권할 곡은 로마 3부작보다 이쪽이다.
편곡을 해본 사람은 옛 선율을 오케스트라로 옮길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을 더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그대로 둘지 정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안다. 원곡에는 지시가 없다. 어느 악기가 맡을지, 어디서 숨을 쉴지, 밑을 채울지 비울지 전부 새로 결정해야 한다.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순간 그것은 나의 선택이 된다. 그런데 완성된 곡을 듣는 사람은 대개 그것을 옛것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결정한 것이 남의 것으로 들리고, 남의 것을 골랐다는 사실이 나의 취향으로 읽힌다. 어느 쪽이 나인지 구분해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레스피기가 한 일은 층을 늘리는 일이었다. 사라진 선율을 찾아 지금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울리게 했고, 이천 년의 도시를 네 악장에 나누어 담았고, 14년 전에 녹음된 새의 소리를 살아 있는 연주 위에 올렸다. 같은 시기에 그 도시는 반대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위에 쌓인 것을 걷어내고 맨 아래만 남기는 작업이었다.
순서를 따지면 레스피기 쪽이 앞선다. 옛 악보를 뒤지는 습관은 볼로냐 학생 시절부터의 것이고, 《로마의 분수》와 《고풍스러운 무곡과 아리아》 첫 권은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기 전에 완성됐다. 로마의 과거를 파내겠다는 정권의 사업은 그보다 뒤에 시작됐다. 다만 3부작의 나머지 두 편과 무곡 모음곡의 마지막 권은 정권의 시대에 놓였다. 전쟁이 끝난 뒤 레스피기의 이름이 파시즘에 협력한 예술가 목록에 오를 때, 어느 작품이 정권보다 먼저 나왔고 어느 작품이 나중에 나왔는지는 따져지지 않았다. 로마를 다룬 음악도, 옛 악보를 되살린 작업도 한 덩어리로 묶여 같은 시대의 산물로 취급됐다.
레스피기는 층을 늘렸고 정권은 층을 걷어냈다. 방향은 반대였지만 둘 다 과거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이름이 같으면 밖에서는 같은 것이 된다.
아우구스테오는 사라졌다. 여섯 겹 중 다섯 겹이 걷혔고 광장이 들어섰다. 《로마의 소나무》가 처음 울린 자리는 이제 표시되어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