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일곱에 그만둔 사람

조아키노 로시니

by크로마

서른일곱에 그만둔 사람


1829년 8월 3일 저녁, 파리 르 펠티에 극장에서 조아키노 로시니의 《기욤 텔》이 초연되었다. 4막짜리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였고, 잘라내지 않고 연주하면 음악만 네 시간에 가까웠다. 반응은 좋았다. 신문 《르 글로브》는 음악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썼고, 도니체티는 1막과 3막은 로시니가 썼지만 2막은 신이 썼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 초연 무대에 오른 악보는 그가 완성한 악보가 아니었다. 작품이 너무 커서 연습 과정에서 이미 여러 대목이 빠지고 바뀌고 더해졌다. 오늘날 학자들이 이 작품의 판본을 이야기할 때 연습에 들어간 악보와 초연 당일 연주된 악보와 나중에 출판된 악보를 따로 구분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로시니 본인도 관여했다. 당시에 작곡가가 리허설장에서 곡을 고치는 것은 일상이었고, 그도 다섯 시간짜리 상연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세 번째 공연부터 여기저기에서 마음대로 잘라내며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르놀트 역을 초연한 테너 아돌프 누리는 4막의 아리아를 스스로 빼고 부르기 시작했고, 1년이 지나자 이 작품은 3막짜리로 축약되었다. 나중에는 2막만 떼어내 발레 공연 앞에 붙여 올리기도 했다. 로시니가 직접 공인 축약본을 만든 것은 초연으로부터 2년이 지난 뒤였는데, 그때는 이미 유럽 각지에서 제각기 잘린 판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자기가 쓴 마지막 오페라의 전곡 연주를 평생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잘려 나간 대목이 모두 복원된 비평판이 나온 것은 그가 죽고 백이십사 년이 지난 1992년의 일이다.


당시로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악보를 작곡가가 적은 그대로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은 그때 막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그 이전까지 악보는 완결된 작품이라기보다 그날의 공연을 위한 재료에 가까웠다. 극장은 무대 사정에 맞춰 장면을 덜어냈고, 가수는 자기 목소리에 맞게 음역을 옮기거나 마음에 드는 다른 작곡가의 아리아를 끼워 넣었으며, 장식음은 각자 알아서 붙였다. 베토벤 세대를 지나면서 악보를 손대지 않고 연주하는 관행이 유럽에 퍼지지만, 오페라 극장은 그 변화가 가장 늦게 도달한 장소였다.


로시니는 이 관행과 일찍부터 싸웠다. 1815년에 나폴리에서 초연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타》는 그가 가수에게 맡기던 장식음을 직접 악보에 적어 넣은 첫 작품으로 꼽힌다. 장식을 없앤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한 장식을 요구한 것이었으니 목적은 분명했다. 가수가 곡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기욤 텔》이 잘려 나가던 1829년의 그는 이미 십오 년째 자기 악보의 통제권을 놓고 다투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로시니의 이름은 오페라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세비야의 이발사》와 《신데렐라》를 쓴 사람, 이탈리아 희극 오페라의 대명사. 그런데 그는 이 초연 이후 오페라를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때 서른일곱이었고, 그 뒤로 서른아홉 해를 더 살았다. 오페라 작곡가로 기억되는 사람이 생애의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오페라를 쓰지 않은 것이다.



그가 그만둔 것의 크기


1810년 첫 오페라를 무대에 올린 뒤 1829년까지, 스무 해가 채 안 되는 기간에 그는 서른아홉 편의 오페라를 썼다.


스물한 살이던 1813년에 베네치아에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을 연달아 성공시키면서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졌다. 물론 모든 작품이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이듬해 밀라노에서 올린 두 편은 반응이 시원치 않았고, 《세비야의 이발사》의 초연조차 야유 속에 끝났다. 그러나 이 작품은 두 번째 공연부터 성공으로 돌아섰고, 이후 유럽 전역의 상연 목록에 올랐다. 스탕달은 1824년에 쓴 로시니 전기의 첫머리에서, 나폴레옹은 죽었지만 새로운 정복자가 이미 세상에 나타났다고 적었다. 서른둘의 작곡가에게 붙은 평가였다.


로시니보다 한 세대 앞선 하이든은 삼십 년 가까이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피고용인으로 살았다. 제복을 입었고, 주인이 원하는 편성으로 원하는 시기에 곡을 내면서 생계를 보장받았다. 모차르트는 그 체제에서 빠져나오려다 불안정한 생활로 들어갔다.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죽은 이듬해에 태어났고, 그가 일을 시작했을 때 이탈리아에는 흥행사가 있었다. 흥행사는 극장을 빌려 시즌을 꾸리고 흥행으로 돈을 버는 사업가였다. 로시니는 1815년에 나폴리의 흥행사 도메니코 바르바이아와 계약을 맺고 산카를로 극장과 델폰도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았다. 두 극장에 해마다 한 편씩 새 오페라를 쓰는 조건이었고, 보수는 월 200 두카트였다. 여기에 더해 그는 바르바이아가 극장에서 함께 운영하던 도박장 수익의 일부를 받았는데, 연간 1000 두카트가량이었다.


이 구조에서 작곡가의 수입은 초연 사례금이 거의 전부였다. 저작권 개념이 없었으므로 곡을 넘기고 나면 그 곡은 남의 것이 되었고, 다른 극장에서 몇 번을 올리든 돈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니 다음 곡을 써야 다음 달을 살 수 있었다. 궁정의 피고용인이 아니라는 것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매달 새로 증명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이 조건에서 로시니는 재활용을 체계화했다. 《세비야의 이발사》의 서곡은 그가 새로 쓴 것이 아니라 이미 두 편의 다른 오페라에 붙였던 곡을 세 번째로 가져다 쓴 것이다. 아리아의 골격도 규격화되어 있었다. 느린 부분에서 인물의 상태를 보여주고 빠른 부분에서 결심을 선언하는 구조를 반복했고, 짧은 악구를 되풀이하면서 악기를 하나씩 더하고 음역을 올려 소리를 부풀리는 방식은 그의 이름이 붙은 관용구가 될 만큼 자주 등장했다. 관객은 그것을 기대하고 극장에 왔다.


즉 그는 음악 공장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던 것과 같다. 그 공장은 잘 돌아갔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부유한 작곡가를 만들어냈다.


그 명성의 크기를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1822년 봄, 바르바이아는 나폴리에 이어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을 맡으면서 로시니를 데려갔다. 4월 13일부터 그의 오페라 여섯 편이 연달아 무대에 올랐다. 빈의 반응은 과열에 가까웠고, 베토벤의 조수 안톤 신틀러는 이 소동을 우상 숭배라고 적었다.


정작 로시니가 빈에서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을 들었고, 그 작곡가를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했다. 주선을 거쳐 방문이 성사되었다. 훗날 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고, 문이 열리자 천장이 갈라져 비가 새는 다락방이 나왔다. 쉰한 살의 베토벤은 거의 완전히 귀가 먼 상태였고, 자기는 악보를 읽어서 음악을 듣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비야의 이발사》를 칭찬한 뒤, 이탈리아 오페라가 존재하는 한 그 작품은 계속 상연될 것이라며 오페라 부파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장르에서 성공하려는 것은 자기 운명을 억지로 비트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서른 살의 로시니는 그때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작곡가였다. 그 앞에 앉은 사람은 오페라를 한 편 남긴 뒤 무대로 돌아가지 않은 작곡가였고, 그가 건넨 조언은 시장이 정해 준 자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로시니는 7년 뒤 오페라 부파가 아닌 작품으로 그 시장을 떠났다.



다른 규격으로의 전환


1824년에 로시니는 파리로 옮겨 이탈리아 극장의 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기 작품을 프랑스어로 다시 쓰는 작업에 들어갔다. 《코린토스의 포위》, 《모세와 파라오》, 《오리 백작》이 그렇게 나왔다. 이 5년은 습작 기간이라기보다 파리 오페라의 규격 학습 기간이었다.


파리 오페라극장이 요구하는 것은 이탈리아의 그것과 달랐다. 역사적 소재, 큰 합창, 발레, 무대장치, 그리고 프랑스어. 이 요구 목록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궁정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프랑스 오페라는 루이 14세의 궁정에서 륄리가 틀을 잡았고, 왕 자신이 무용수로 무대에 서던 시절의 관습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래서 발레가 빠질 수 없었다. 서곡도 느리고 무게 있는 부분으로 시작하는 형태가 자리 잡았는데, 이것이 왕이 자리에 들어서는 동안 연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흥행사의 사업이었다면 프랑스의 오페라는 국가 기관의 행사에서 출발한 것이었고, 1820년대의 파리 오페라극장은 여전히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언어도 달랐다. 이탈리아어는 모음이 길게 늘어나므로 장식을 붙이기 좋지만 프랑스어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글루크 이래로 가사를 말하듯 또렷하게 전달하는 전통이 강했다. 게다가 1828년 2월, 로시니가 《기욤 텔》을 준비하던 시기에 오베르의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가 같은 극장에서 성공했다. 민중 봉기를 다루고 합창이 극을 밀고 가는 이 작품이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출발점이 되었다. 로시니는 새로운 장르가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작품을 썼다.


《기욤 텔》의 서곡은 그 결과를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에서 〈윌리엄 텔 서곡〉이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 곡이다.


당시 오페라 서곡은 그날 밤 팔 물건의 견본이었다. 서곡에서 관객을 충족시키면 뒤에 어떤 이야기가 나와도 관객이 기다려 준다. 따라서 서곡은 밝은 총주로 시작해 관객의 주의를 붙잡고, 부풀어 오르는 크레셴도로 닫으면 되었다. 로시니 자신이 그 형식을 가장 많이 썼다. 그런데 《기욤 텔》은 첼로 다섯 대로 느리게 시작한다.


독주 첼로 하나와 그것을 받치는 네 대뿐이고, 나머지 현도 관도 들어오지 않는다. 소리는 낮고 어둡고, 극장 뒷자리까지 밀어붙이기에는 작다. 이어서 팀파니가 멀리서 구르고 폭풍이 지나가고 잉글리시 호른이 목동의 노래를 부른 다음에야, 관객이 기다리던 그 행진이 나온다. 12분짜리 곡에서 그는 상품을 맨 끝에 배치했다.


성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가수의 기교를 자랑하게 만드는 장식은 눈에 띄게 줄고, 프랑스어의 음절 하나에 음 하나를 붙여 말하듯 노래하는 방식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가 가장 잘 만들던 물건을 자신이 직접 덜어낸 것이다.


이것을 프랑스 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로 읽으면 절반만 보는 셈이 된다. 두 나라의 오페라는 오래전부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왔고, 로시니가 파리로 불려 간 이유부터가 이탈리아식 성악을 프랑스 무대에 들여오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프랑스 쪽의 방식을 이탈리아 오페라에 끌어들이는 작업은 그가 파리에 오기 전부터 이미 그의 악보 안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가수의 자율을 줄이고 작곡가가 정한 대로 부르게 하는 것, 오케스트라의 몫을 키우는 것, 합창을 장식이 아니라 극의 진행에 쓰는 것. 이것들은 모두 프랑스 오페라가 오래 지켜 온 방식이고, 로시니는 이탈리아에서 이미 십 년 넘게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1815년부터 장식음을 직접 적어 넣었고, 나폴리 시절에는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비중을 계속 키웠다.


다만 이탈리아의 극장에는 그것을 감당할 조건이 없었다. 시즌마다 새 작품을 내야 했으므로 한 작품에 붙일 수 있는 시간이 짧았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의 규모도 크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관객이 가수를 보러 왔다. 파리 오페라극장에는 그 조건이 있었다. 정부 예산으로 유지되는 상설 오케스트라가 일흔 명 안팎이었고, 상설 합창단이 있었으며, 무대장치와 조명을 전담하는 인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의 교향악단이 백 명 안팎인 것과 비교하면 작아 보이지만, 극장이 연중 급여를 주며 붙들어 두는 상설 악단으로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규모였다. 이만한 인원을 상시 고용할 수 있는 극장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이후 유행하는 그랜드 오페라를 제대로 올릴 수 있는 무대도 유럽에 몇 곳뿐이었다. 즉 그는 프랑스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려던 것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설비를 처음 만난 것이다. 《기욤 텔》이 그 이전의 작품들과 다르게 들리는 이유는 취향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쓸 수 있는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계약서에 들어 있던 조항

이 시기에 일어난 일 중 가장 구체적인 것은 계약서에 나타난다.


《기욤 텔》 초연을 앞두고 로시니는 프랑스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막바지에 그는 종신 연금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지 않겠다고 버텼다고 전해진다. 결국 초연 석 달 전인 1829년 5월 4일에 계약이 성립했고, 샤를 10세가 직접 서명했다.


계약에는 두 가지가 함께 들어갔다. 하나는 앞으로 10년 동안 새 오페라 다섯 편을 파리 오페라극장에만 제공한다는 독점 조항이었다. 다른 하나는 해마다 6천 프랑을 죽을 때까지 받는 종신 연금이었다.


연금과 작품 보수는 별개였다. 새 오페라를 쓰면 그에 따르는 수입이 따로 생겼다. 파리 오페라극장은 1713년에 정해진 왕실 규정에 따라 작곡가에게 공연 횟수당 사례금을 지급했고, 여기에 악보 출판권을 팔아 얻는 돈이 더해졌다. 로시니는 《기욤 텔》의 출판권만으로 출판업자에게서 2만 4천 프랑을 받았다. 연금 6천 프랑의 네 배다. 작품을 쓰면 쓸수록 수입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연금은 그 수입과 무관하게 지급되는 고정 수입이었다. 다섯 편을 다 쓰지 못해도, 한 편도 쓰지 않아도 연금은 받을 수 있었다. 정부가 이 조건을 받아들인 이유는 계약의 다른 쪽 항목에 있다.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곡가를 10년 동안 자기 극장에 묶어 두는 값이었다.


우리는 그가 《기욤 텔》 이후 오페라를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시점의 행보를 보면 그가 은퇴를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초연 뒤 로시니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뜨거운 소재였던 괴테의 파우스트를 다음 오페라의 소재로 검토하고 있었다. 네르발의 프랑스어 번역이 1828년에 나왔고, 들라크루아가 같은 해에 삽화를 발표했으며, 베를리오즈는 1829년에 파우스트를 소재로 한 첫 작품을 냈다. 로시니는 그 흐름 안에 있었다.


다만 그는 이 계약으로 생계 때문에 곡을 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 조항이 이후 서른아홉 해의 모든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의무는 사라지고 권리만 남았다


1830년 7월 혁명이 샤를 10세를 몰아냈다. 새 정부는 재정을 줄이면서 왕실 명의의 지출을 정리했고, 로시니의 연금과 계약을 함께 없앴다. 그는 파리로 돌아와 소송을 시작했고 5년간의 공방 끝에 이겼다. 판결을 가른 것은 계약서에 남아 있던 샤를 10세의 친필 서명이었다. 쫓겨난 왕의 서명이 그 왕을 몰아낸 정부를 상대로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 5년 동안 그가 오페라를 쓰지 않은 데에는 법적인 이유가 섞여 있다. 계약서의 독점 조항 때문에 다른 극장을 위해 새 오페라를 쓰는 것은 계약 위반이었고, 프랑스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로 그 계약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며 정부를 상대로 연금을 청구하는 중이었다. 계약의 한쪽 조항을 지키지 않으면서 다른 쪽 조항의 이행만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송이 이어지는 동안 이탈리아를 포함해 어디에서도 새 오페라를 올리지 않았다.



이탈리아로 돌아간 20년


1836년에 그는 파리를 떠나 볼로냐에 자리를 잡았다. 볼로냐는 그가 열두 살에 가족과 함께 옮겨 온 도시이고, 열네 살에 리세오 무지칼레에 들어가 대위법을 배운 곳이며, 첫 아내 이자벨라 콜브란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카스테나소의 저택이 있는 곳이었다. 1839년에는 그 리세오 무지칼레의 명예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그에게 볼로냐는 은퇴지가 아니라 출발지였다.


그러나 이 20년은 평온하지 않았다. 1837년에 아내 콜브란과 법적으로 갈라섰고, 1839년에 아버지가 죽었으며, 1845년에 콜브란이 죽은 뒤 이듬해 올랭프 펠리시에와 재혼했다. 올랭프는 파리에서 화가 오라스 베르네의 모델이자 사교계의 이름난 여성이었고, 1830년대 초부터 그의 곁을 지켜 온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1848년에는 유럽 전역의 혁명 소요가 볼로냐에 닥쳤고,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렌체로 옮겼다.


같은 기간에 몸도 무너졌다. 만성 복부 질환과 호흡기 질환이 있었고, 잠을 자지 못했으며, 심한 우울 증세를 겪었다. 1854년의 한 편지에서 그는 다섯 달째 신경 질환이 잠을 빼앗아 삶이 거의 쓸모없어졌다고 썼다. 옷을 혼자 입지 못했고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웠으며, 죽는 편이 낫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남겼다. 피렌체에서 보낸 시간의 상당 부분을 그는 침대에서 보냈다.


이 20년에 그가 완성한 큰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슬픈 마음을 담은 종교 음악 《스타바트 마테르》 한 편이다. 1831년에 스페인에서 청탁을 받아 시작했으나 건강이 나빠져 중단했고, 완성한 것은 십 년이 지난 1841년이었다.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초연은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은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로시니의 후반생을 이야기할 때 흔히 등장하는 그림은 명예롭게 은퇴한 미식가가 파리 근교에서 요리를 개발하며 여생을 즐긴 모습이다. 그 그림은 마지막 13년에만 해당한다. 그 앞의 20년은 정치적 격변과 병이 겹치면서 그의 경력이 실제로 멈춰 있던 시기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시벨리우스처럼 쓰려고 했으나 쓰지 못한 사람, 조건이 손을 묶어버린 사람에 가깝다.



또다시 바뀐 오페라의 규격


그가 소송과 병에 붙들려 있는 동안 극장 쪽에서는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1831년에 마이어베어의 《악마 로베르》가 파리에서 성공했고, 1836년에 《위그노 교도》가 뒤를 이었다. 규모가 커지고 무대가 화려해졌으며, 관객이 오페라에서 기대하는 것이 목소리의 기교에서 장면의 압도로 옮겨 갔다. 이탈리아에서는 벨리니와 도니체티가 자리를 잡았고, 1842년에는 베르디가 《나부코》로 등장했다.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성악 창법에서 일어났다. 1837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테너 질베르루이 뒤프레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기욤 텔》의 아르놀트를 부르면서 높은 도를 가슴 소리로 냈다. 그때까지 그 음역은 가성과 두성을 섞어 가볍게 내는 것이 관례였고, 초연자인 누리가 바로 그 방식의 대표였다. 뒤프레의 소리는 굵고 크고 밀도가 높았다. 관객은 열광했다. 이후 작곡가들은 그 소리를 전제로 곡을 쓰기 시작했고, 누리 같은 가벼운 테너의 시대는 사실상 그해에 끝났다.


로시니가 서른아홉 편의 오페라에서 사용해 온 성악의 전제 자체가 바뀐 것이다. 그의 악보는 목소리가 빠르게 움직이고 가볍게 위로 올라간다는 조건 위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조건이 무대에서 사라졌다. 로시니는 우리가 벨칸토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로시니의 결단


1855년 4월, 아내 올랭프는 그를 파리로 데려갔다. 이탈리아 의사들이 손을 놓은 상태에서 당시 가장 앞선 의료를 찾아간 것이었다. 그의 증상은 소화기와 비뇨기의 만성 질환, 불면, 심한 우울이 뒤섞여 있었고, 지금의 기준으로도 어느 하나의 병명으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치료를 받은 뒤 로시니는 서서히 회복했고, 그 이후 다시 곡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의 로시니는 예순다섯이었고, 건강을 상당 부분 되찾았으며, 연금 소송에서 이겨 생계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그는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살아 있는 음악가였다. 그의 오페라는 여전히 각국 극장의 주요 상연 목록에 올라 있었고, 파리 근교 파시의 자택에서 1858년 12월부터 열기 시작한 토요일 저녁 살롱 음악회에는 리스트, 베르디, 마이어베어, 요아힘, 안톤 루빈시테인이 드나들었다. 초대장을 받는 것 자체가 파리 예술계에서 지위의 표시였다. 그가 오페라를 쓰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어느 극장이든 조건을 맞췄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남은 13년 동안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다.



그가 대신 쓴 것

1857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는 150곡이 넘는 소품 곡을 썼지만 오페라는 쓰지 않았다. 이때 쓴 소품을 묶어 그는 《노년의 죄》라고 불렀다. 출판사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이 곡들의 규모를 보면 그가 무엇을 버렸는지가 드러난다. 대부분 피아노 한 대나 목소리 하나를 위한 곡이고, 길이는 몇 분을 넘지 않는다. 서곡이 없고, 아리아의 느린 부분과 빠른 부분을 잇는 골격이 없고, 관객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마무리가 없다. 제목들은 농담에 가깝다. 네 가지 전채와 네 가지 후식이라는 제목 아래 무와 멸치와 버터를 하나씩 곡으로 붙였고, 기차를 타고 소풍을 가다 탈선하는 과정을 피아노로 묘사한 곡도 있다.


이것은 극장이 요구하는 것을 하나도 갖추지 않은 음악이다. 그는 이 곡들을 자기 집 토요일 저녁 음악회에서 연주하기 위해 썼고, 생전에 출판을 허락하지 않았다. 수입도 명성도 목적이 아니었다. 그 방에 모인 사람들이 듣는 것이 전부였다.



《작은 장엄 미사》


1863년, 그는 마지막 큰 작품을 썼다. 편성은 가수 열두 명, 그중 넷이 독창, 피아노 두 대, 그리고 하르모늄이다. 하르모늄은 발로 밟아 바람을 넣어 금속 리드를 울리는 소형 오르간으로, 당시 파리의 가정과 살롱에 널리 보급되던 악기였다. 파이프 오르간의 축소판에 해당하지만 교회가 아니라 거실에 놓는 물건이었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원하는 규모의 연주자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살롱 하나에 들어가는 크기를 골랐다. 초연은 1864년 3월, 후원자 부부의 파리 저택에서 이루어졌다. 나중에 그는 오케스트라 판본도 만들었지만 생전에 연주되지 못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여성이 성당 안에서 노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는 그 예외를 얻어내지 못했다. 미사곡을 썼으나 교회에서 연주할 수 없었던 셈이다.


극장의 오케스트라가 하던 일을 두 대의 건반과 발풍금이 나누어 맡았다. 서른아홉 편의 오페라를 쓴 사람이 도달한 최종 편성이 그것이었다.


자필 악보의 끝에 그는 신에게 보내는 짧은 글을 적어 두었다. 이 가련한 작은 미사가 끝났다고, 자신이 쓴 것이 성스러운 음악인지 저주받은 음악인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오페라 부파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 당신도 잘 알지 않느냐고 썼다. 기교가 조금, 마음이 조금 있을 뿐이라고 덧붙이고는 천국의 자리를 청했다.



그가 버린 것과 지킨 것


로시니는 여생 서른아홉 해 동안 계속 썼다. 버린 것은 청중이 고용주인 상태였다. 시즌, 마감, 초연일, 계약서에 적힌 편수, 가수가 요구하는 음역, 다음 작품을 팔지 못하면 다음 달이 없다는 조건. 그는 그것들을 놓았고, 대신 악보와 토요일 저녁을 지켰다.


그는 종신 연금을 계약서에 넣었고, 그것이 취소되자 5년을 싸워 되찾았으며, 그 위에 20년 치 흥행 수입이 쌓여 있었다. 당대의 작곡가 대부분에게 이 조건은 없었다. 궁정에 고용되면 곡의 내용을 주인이 정했고, 시장에서 팔면 다음 곡을 계속 팔아야 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는 데 필요한 돈을 미리 확보해 둔 사람은 드물었다. 로시니의 자유는 성격이나 결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돈이 평온까지 보장하지는 않았다. 그가 얻은 서른아홉 해 중 스무 해는 병과 정치적 격변이 가져갔다. 그만두는 결정은 병과 혁명과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그다음에도 계속 그를 압박했다. 그렇지만 로시니는 통제권을 얻었다. 무엇을 쓸지, 누구 앞에서 연주할지, 언제 끝낼지를 자기가 정할 수 있게 되었다. 통제권을 얻는 대가는 유럽에서 가장 큰 무대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누군가 마감이 영감의 원천이라 했던가. 마감이 있을 때는 무엇이든 나온다. 하지만 마감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다르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곡의 첫 음 앞에서 몇 달을 보내는 일이 예사가 된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 음악을 굳이 쓰려면 마감이 대신 만들어 주던 이유를 스스로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로시니가 예순다섯에 다시 펜을 들었을 때 그 앞에 놓여 있던 것도 그 문제였을 것이다. 그가 찾아낸 답은 토요일 저녁에 그 방에 앉아 있을 사람들이었다. 표를 사서 들어온 관객이 아니라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었고, 그들 앞에서 그는 상품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음악을 나누는 사람이었다.


시벨리우스에게는 자물쇠가 끝내 열리지 않았고 8번은 재가 되었다. 로시니는 열 수 있었는데 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침묵으로 끝났지만 그 침묵의 소유자는 달랐다.


시장이 끝난 자리에서 남는 선택지는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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