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34년 1월 22일 레닌그라드 말리 오페라 극장. 스물일곱 살 작곡가의 두 번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막을 올렸다. 이틀 뒤에는 모스크바 네미로비치단첸코 음악극장에서 다른 연출로 초연됐다. 한 작품이 두 도시에서 각기 다른 무대로 동시에 출발한 셈이었다.
원작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중편이다. 지방 상인의 며느리 카테리나가 시아버지와 남편을 죽이고, 연인과 함께 시베리아 유형길에 오르고, 끝내 강물에 뛰어드는 이야기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살인자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카테리나를 짓눌린 자로 그렸고, 그녀를 짓누른 상인 계급과 경찰을 희극적으로 그렸다. 음악은 노골적이었다. 정사 장면에서 트롬본이 미끄러졌고, 경찰서 장면은 행진곡의 패러디였다.
불온하게 읽힐 소지는 처음부터 있었다. 남편과 시아버지를 죽인 여자가 무대 위에서 동정을 받았고, 성을 다룬 음악은 노골적이었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통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무대가 1860년대 제정 러시아였다는 점이다. 카테리나를 짓누른 것은 상인 계급의 가부장 질서였고, 그녀를 유형지로 보낸 것은 제정의 경찰이었다. 이 오페라가 조롱하는 권력은 소비에트가 무너뜨렸다고 선언한 옛 질서였고, 여성을 낡은 가족 제도에서 풀어놓는다는 명분은 당시 노선과 어긋나지 않았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카테리나를 변호하려 했다고 밝혔다. 살인자에게 동정을 주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계급 고발로 읽혔다.
시점도 작용했다. 1932년 당은 기존 예술 단체들을 해산하고 작곡가동맹을 새로 만들었으며, 1934년 작가대회에서 슬롯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노선으로 선포했다. 다만 그 노선이 음악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기준이 문장으로 적히기 전에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성공했다. 두 시즌 동안 두 도시를 합쳐 백수십 회가 상연됐다. 1935년에는 클리블랜드와 뉴욕에서 무대에 올랐고, 이어 런던과 취리히와 프라하와 스톡홀름과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뒤따랐다. 소련 언론은 이 작품을 슬롯주의 국가가 낳은 예술의 증거로 선전했다. 서방이 소비에트 오페라를 상연한다는 사실 자체가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자료로 쓰였다.
이 지점에서 쇼스타코비치는 국가와 이해가 일치하는 작곡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직 정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어긋날 일이 없었다. 그는 이 일치가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카테리나가 부르는 선율이 26년 뒤 그 자신의 추도식에 불려 나오리라는 것도 아직 몰랐다.
1936년 1월 26일, 볼쇼이 극장 분관에서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상연됐다. 정부석에 스탈린과 몰로토프, 미코얀, 즈다노프가 앉았다. 쇼스타코비치도 객석에 있었다. 그는 초대를 받았다.
정부석은 무대 위쪽, 금관과 타악기 바로 앞에 배치돼 있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은 마지막 막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떴다. 작곡가에게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이틀 뒤인 1월 28일, 《프라우다》에 무기명 사설이 실렸다. 제목은 「음악 대신 혼란」이었다. 무기명이라는 점이 핵심이었다. 서명이 있었다면 한 비평가의 견해였을 것이다. 서명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의 목소리였다.
사설은 오페라의 음악이 의도적으로 뒤죽박죽이며,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에 물들었고, 소비에트 청중이 아니라 서방의 속물 취향에 맞춰졌다고 썼다. 마지막 문장은 비평이 아니라 통고였다. 이 유희는 매우 나쁘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열흘 뒤인 2월 6일, 《프라우다》는 두 번째 사설을 실었다. 이번 대상은 그의 발레 《맑은 시내》였고 제목은 「발레의 허위」였다. 사설 두 편으로 그는 오페라와 발레를 동시에 잃었다.
극장들은 즉시 반응했다. 두 작품은 상연 목록에서 사라졌다. 그를 옹호하던 평론가들은 침묵하거나 태도를 바꿨다. 《맑은 시내》의 대본을 쓴 아드리안 피오트롭스키는 이듬해 체포돼 처형됐다.
악보는 한 음도 바뀌지 않았다. 2년 전 제정을 고발한 작품으로 읽힌 오페라가 같은 상태 그대로 자연주의와 형식주의의 사례가 됐다. 바뀐 것은 작품이 아니라 판정 기준이었고, 그 기준은 사전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의 대숙청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형벌 제도가 아니었다는 점부터 봐야 한다.
1937년 7월 하달된 NKVD 명령 제00447호는 각 지역에 처리 인원수를 배정했다. 1급은 총살, 2급은 수용소 8년에서 10년이었다. 지방 기관들은 배정된 숫자를 초과 달성하겠다고 중앙에 상신했고, 중앙은 이를 승인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찾아 처벌한 것이 아니라, 채워야 할 숫자를 정해 놓고 사람을 찾았다.
같은 해 8월의 명령 제00486호는 가족을 규정했다. 처형되거나 수감된 자의 아내는 체포돼 5년에서 8년의 수용소형에 처해졌다. 카자흐스탄의 알지르 수용소가 대표적 수용처였다. 열다섯 살 이상의 자녀는 수감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어린 자녀는 부모에게서 분리돼 국가 고아원으로 넘겨졌다. 성을 바꾸는 경우도 많았다. 형법에는 조국 배반자의 가족 구성원이라는 별도 범주가 있었다. 남편이 무엇을 했는지 아내가 몰랐다는 사실은 감형 사유가 되지 않았다. 모른 채로도 형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과가 끊겨 있었다는 점이다. 협조하면 안전하고 저항하면 위험한 구조였다면, 순응은 합리적 전략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할당제 아래에서는 순응한 사람도 숫자에 들어갔다. 열성 당원이 체포됐고, 체포한 자가 이듬해에 체포됐다. 안전한 행동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계산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쇼스타코비치 주변에서 이 일은 구체적으로 벌어졌다. 미하일 투하쳅스키가 1937년 6월 처형됐다. 붉은 군대 최연소 원수이자 군 현대화를 주도한 국방 부인민위원이었고, 직접 바이올린을 만들 만큼 음악에 밝아 젊은 작곡가의 뒤를 봐주던 후원자이기도 했다. 그는 비공개 재판에서 독일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이튿날 총살됐으며, 그가 처형된 뒤 숙청은 군 지휘부 전체로 번졌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조언자였던 음악학자 니콜라이 질랴예프는 그해 말 체포돼 이듬해 초 총살됐다. 여동생 마리야의 남편이자 물리학자였던 프세볼로트 프레데릭스는 체포돼 수용소에서 죽었고, 마리야는 중앙아시아로 유형됐다. 장모도 체포됐다. 연출가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는 1939년 6월에 체포돼 이듬해 2월 처형됐고, 그의 아내 지나이다 라이흐는 그 사이에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작곡가 자신도 소환을 받았다. 투하쳅스키와의 관계를 두고 심문이 있었고, 다음 주에 다시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시 갔을 때 그를 심문했던 수사관은 이미 체포된 뒤였다고 한다. 그가 밤마다 짐가방을 꾸려 현관에 두고 계단참에서 기다렸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가족이 체포 장면을 보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1936년 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을 완성했다. 그해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초연 리허설이 진행됐다. 그리고 초연 직전에 철회됐다. 압력이 있었는지 스스로 물러섰는지는 지금도 명확하지 않다. 이 작품은 1961년까지, 그러니까 25년 동안 연주되지 않았다.
그가 다음으로 택한 형식이 교향곡이었다는 점에는 계산이 들어 있다. 오페라에는 가사가 있고, 가사에는 문장이 있고, 문장은 검열될 수 있다. 발레에는 서사가 있고, 서사는 해석될 수 있다. 교향곡에는 둘 다 없다. 남는 것은 음향의 배열뿐이고, 음향은 무엇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금지 목록은 끝내 명문화되지 않았다. 대신 무엇이 형식주의인지 그때그때 판정하는 권한이 당에 있었다. 판정의 근거로 반복해 거론된 것은 조성을 벗어난 화성, 선율을 알아들을 수 없게 만드는 복잡성, 서구 현대음악의 기법이었다.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와 힌데미트의 이름이 부정적 사례로 인용됐고, 종교적 소재는 배제됐으며, 망명한 작곡가의 작품은 시기에 따라 연주 목록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라흐마니노프는 1931년 소비에트 문화정바카라을 비판하는 서한에 이름을 올린 뒤 《프라우다》의 공격을 받았고, 그의 음악은 한동안 소련에서 연주되지 못했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붙은 혐의 가운데 하나는 자연주의였다. 무대 위의 성을 음악으로 묘사했다는 뜻이었다.
재즈의 처지는 흔히 알려진 것보다 복잡했다. 같은 시기 나치 독일이 재즈를 인종적 근거로 몰아낸 것과 달리, 1930년대 소련은 재즈를 길들이는 쪽을 택했다. 레오니트 우툐소프의 악단이 인기를 끌었고 영화 음악이 그 어법을 대중에게 퍼뜨렸으며, 1938년에는 국립 재즈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졌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1934년과 1938년에 재즈 모음곡을 썼는데, 경음악의 수준을 끌어올리라는 위원회의 요청에 응한 결과였다. 재즈가 본격적으로 배척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였다. 서구적인 것 전반을 겨냥한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연주와 편성이 함께 제한됐다.
허용된 것의 목록은 짧고 분명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선율, 확립된 조성, 민요에서 가져온 소재, 그리고 대중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교향곡은 이 목록의 맨 위에 있었다. 소비에트 문화정바카라은 유럽 고전의 유산을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상속자를 자처했으며, 베토벤을 혁명의 작곡가로 규정해 정전의 한가운데 놓았다. 형식이 뚜렷하고 계보가 확실한 장르였기 때문에 교향곡은 의심의 바깥에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들어간 자리가 여기였다. 국가가 가장 안전하다고 지정한 장르 안에서, 국가가 판정할 문장을 하나도 제공하지 않는 방식으로 쓰는 일이었다.
1937년 11월 21일, 교향곡 5번이 레닌그라드에서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초연됐다. 관객의 반응은 격렬했다. 3악장에서 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언이 여럿 남아 있고, 연주가 끝난 뒤 박수가 30분 넘게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4악장에 적힌 지시어는 알레그로 논 트로포다. 빠르되 지나치지 말라는 뜻인데, 악장은 처음 걸음에서 조금씩 속도를 올린다. 악장이 여는 소리는 팀파니의 지속음이고, 그 위에서 트럼펫과 트롬본과 튜바가 라단조의 선율을 낸다. 반음을 낮춘 자리 없이 곧게 뻗는 단조 선율이라 어둡기보다 결연하게 들린다. 사분음표 단위로 또박또박 쪼개지며 나아가는 영웅의 걸음이다.
이 악장에서 가장 많이 쓰인 재료는 선율이 아니라 같은 음의 반복이다. 반복은 처음에는 배경에 있다. 아래에서 같은 음형이 계속 돌아가며 긴장을 쌓아 올리고, 그 위로 영웅적 선율과 그 변형이 지나간다. 그러다 반복이 앞으로 나온다. 배경에 깔려 긴장을 만들던 것이 채찍처럼 때리는 소리가 된다. 같은 재료인데 자리를 옮기는 것만으로 역할이 뒤집힌다.
그 사이를 반음계와 온음계가 번갈아 채운다. 현과 목관이 잘게 쪼개진 반음계로 소음에 가까운 배경을 만들면 무질서가 쌓이고, 그것이 승리처럼 한 번 울렸다가 사그라들며 무겁게 흐른다. 호른이 무언가를 염원하는 선율을 낼 때 현은 긴장을 유지한다. 이따금 온음계가 얼굴을 내미는 대목이 있는데,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그 자리를 맡는다. 희망이 잠깐 보이는 지점이다.
그러다 현이 유리처럼 맑은 지속음을 길게 끌고 음악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다만 같은 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웅적 선율의 음 길이가 두 배로 늘어나 있다. 같은 걸음이 절반의 속도로 걷는다. 밑을 받치는 것도 달라졌다. 화성이 움직이며 도착을 만드는 대신, 팀파니가 A 하나를 붙들고 그 위에 바순과 호른과 튜바가 얹힌다. 소리는 두꺼워지는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승리의 주제가 돌아왔으나 제 걸음으로 걷지 못하는 상태다.
여기서부터 같은 음의 반복이 끝까지 이어진다. 현이 하나의 음을 백 번 넘게 되풀이하고, 팀파니가 그 위를 두드리고, 금관이 올라가며, 악장은 D장조의 총주로 닫힌다.
이 결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가 쇼스타코비치 해석사의 중심 문제가 됐다. 고통을 지나 환희에 닿은 소리로 들린다. 끝내 무너지지 않던 것을 넘어선 소리로도 들린다. 초연장의 반응이 그것을 증명한다.
반대로 들을 근거도 악보 안에 있다. 마지막을 채우는 그 반복은 승리를 위해 새로 동원된 장치가 아니라, 악장 내내 아래에 깔려 있던 재료가 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그 재료는 앞에서 이미 두 가지 일을 했다. 긴장을 만들었고 때리기도 했다. 같은 것이 마지막에 왔을 때 어느 쪽인지 악보는 정해 주지 않는다. 승리의 주제가 절반의 속도로 걷고 베이스가 한 음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도 남는다. 위층은 개선 행진처럼 들리는데 아래층은 움직이지 않는다. 두 해석이 동시에 성립하는 이유가 이 어긋남에 있다.
작곡가는 이 양가성을 해소하지 않았다. 초연 무렵 한 신문 기사가 이 작품을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창조적 응답이라고 규정했다. 이 표현은 쇼스타코비치가 직접 만든 것으로 오래 알려져 왔으나 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그 표현을 부인하지 않았다. 부인하지 않는 것과 인정하는 것 사이의 간격이, 그가 확보한 공간의 전부였다.
1945년 11월 3일, 레닌그라드. 므라빈스키가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9번을 초연했다. 연주 시간은 25분이었고, 악장은 다섯이었으며, 합창도 독창도 없었다. 1악장은 하이든처럼 시작해서 피콜로가 뛰어다니다 끝났다.
객석의 기대는 다른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해의 9번 교향곡이었다. 소련 문화계는 승리를 기념할 대작을 기다렸고, 합창과 독창자와 스탈린의 이름이 들어간 작품을 예상했다. 쇼스타코비치 자신도 1945년 봄에 그런 방향의 스케치를 시작했다가 폐기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가 여름에 완성해 내놓은 것은 30분이 채 안 되는 희극이었다.
이 선택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1948년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주도한 결의에서 그는 다시 형식주의자로 지목됐고, 음악원 교수직에서 밀려났으며, 작품 다수가 연주 목록에서 사라졌다. 국가가 기다린 대작을 내놓지 않은 대가를 그는 3년 뒤에 치렀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그가 9라는 숫자를 다룬 방식이다.
9번 교향곡의 저주라는 관념은 아르놀트 쇤베르크가 1912년 말러를 다룬 글에서 정식화했다. 베토벤이 9번을 쓰고 죽었고, 슈베르트가 9번에서 멈췄고, 브루크너가 9번을 미완으로 남겼고, 드보르자크가 9번을 마지막으로 삼았고, 말러는 이 숫자를 피하려고 《대지의 노래》에 번호를 붙이지 않았다가 결국 9번을 쓰고 10번을 미완으로 남긴 채 죽었다. 쇤베르크는 9번이 한계선이며 그 너머로 가려는 자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취지로 썼다.
다만 이 저주에는 관할 구역이 있었다. 명단에 오른 이름들은 모두 빈과 라이프치히와 프라하를 잇는 하나의 계보에 속한다. 이 저주가 작동하려면 먼저 그 계보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베토벤을 출발점으로 인정한 작곡가에게만 아홉이라는 숫자가 한계선이 됐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가 다닌 음악원의 원장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글라주노프는 교향곡 여덟 곡을 완성하고 9번을 한 악장만 남긴 채 더 쓰지 않았는데, 페테르부르크에서 이 일을 저주라고 부른 사람은 없었다. 당대에는 다른 이유들이 거론됐다. 같은 시기 모스크바에서는 니콜라이 먀스콥스키가 교향곡을 스물일곱 곡 썼다. 스물일곱 곡을 쓴 사람이 있는 나라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아무 힘도 갖지 못한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도 이 관할권 바깥에 있었다. 그는 교향곡을 일곱 곡 쓰고 아홉을 의식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쇼스타코비치가 물려받은 어법의 상당 부분이 그에게서 나왔다. 1910년대 중반의 《스키타이 조곡》과 피아노 《토카타》는 러시아가 유럽의 세련됨을 흉내 낼 이유가 없다는 당대의 주장을 음향으로 옮긴 결과였고, 피아노를 노래하는 악기가 아니라 때리는 악기로 다루는 방식도 거기서 확립됐다. 다만 두 사람의 야만은 성질이 다르다. 프로코피예프의 파괴는 즐겁다. 부수는 일 자체가 목적이고 뒤에 다른 의도가 없다. 쇼스타코비치의 파괴는 폭력의 묘사다. 교향곡 4번의 광포한 푸가토든 교향곡 8번 3악장의 기계적 반복이든, 신나는 대목이 하나도 없고 누가 누구를 밟고 있는 소리로 들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을 높이 사지 않았고, 1936년 소련으로 영구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는 1948년 결의에서 쇼스타코비치와 나란히 같은 명단에 올랐다. 프로코피예프는 1953년 3월 5일에 죽었다. 스탈린이 죽은 바로 그날이었고, 모스크바의 꽃이 전부 크렘린으로 갔기 때문에 그의 장례에는 꽃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쇼스타코비치는 말러를 평생 파고들었다. 그를 말러 쪽으로 이끈 사람은 가장 가까운 벗이었던 음악학자 이반 솔레르틴스키였고, 솔레르틴스키가 1932년에 펴낸 말러 연구서가 그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악보와 바카라을 함께 읽으며 통속 선율의 삽입과 행진곡의 이중성을 가져왔다. 가져오지 않은 것이 미신이었다. 그는 스승들의 기법은 상속했으나 그들의 공포는 상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9번을 25분짜리로 쓰고, 그 뒤로 여섯 곡을 더 썼다. 교향곡 열다섯 곡, 현악 4중주 열다섯 곡, 협주곡 여섯 곡, 영화 음악 서른 편 남짓이 그의 작품 목록에 남았다.
다작은 기질의 문제로 설명되곤 하지만, 이 경우에는 구조의 문제이기도 했다. 서랍에 넣어둘 작품과 무대에 올릴 작품을 동시에 확보하려면 두 배로 써야 한다. 교향곡 4번이 25년,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이 7년, 유대 민요 연가곡이 8년을 서랍에서 보내는 동안에도 초연 목록은 비어 있으면 안 됐다. 발표를 멈춘 작곡가는 의심을 받았고, 의심받은 사람은 체포 명단에 올랐다. 그는 멈추지 않기 위해 많이 썼고, 많이 썼기 때문에 감출 여유를 얻었다.
1936년 이후 쇼스타코비치가 내린 결정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버린 것은 오페라였다. 그는 이후 오페라를 완성해 초연하지 않았다. 《도박꾼》은 미완으로 남았다. 서른 살에 자기 장르 하나를 통째로 포기한 셈이다.
지연한 것은 발표였다. 그는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내놓기를 멈췄다. 이 둘은 다르다.
변형한 것은 발언의 층위였다. 공식 석상에서는 당이 요구하는 문장을 읽었고, 영화 음악과 기념 칸타타를 썼다. 동시에 현악 4중주를 계속 썼다. 4중주는 대형 홀이 아니라 작은 방의 형식이고, 검열관이 굳이 파고들 이유가 적은 장르이기도 했다.
남긴 것은 서명이었다. 그는 자기 이름의 독일어 표기 D. Schostakowitsch에서 네 글자를 뽑아 음으로 옮겼다. 독일식 음이름에서 S는 에스, 곧 내림 미를 가리키고 H는 시에 해당한다. 그래서 D-S-C-H는 레와 내림 미와 도와 시 네 음이 된다. 이 동기가 여러 작품에 들어갔다. 교향곡 10번 3악장에서 이 동기는 집요하게 반복된다. 가사도 표제도 없이, 악보 안에 자기 이름 하나를 새겨 넣는 방식이었다.
교향곡 10번은 스탈린이 죽은 1953년에 초연됐다. 2악장의 짧고 난폭한 스케르초를 두고 스탈린의 초상이라는 해석이 오래 붙어 다녔다. 이 해석이 널리 퍼진 통로는 1979년 서방에서 출간된 회고록 《증언》이었다. 솔로몬 볼코프가 작곡가의 구술을 옮겼다고 밝힌 바카라이고, 그 신빙성은 출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논쟁 대상이다. 작곡가 자신의 확인은 어디에도 없다.
악장 자체도 답을 주지 않는다. 길이는 4분에 못 미친다. 음악은 무언가를 계속 때리는데 어디로 가려는지가 잡히지 않고, 선율이 방향을 정하기 전에 다음 타격이 온다. 현이 거칠게 지나간 뒤 목관이 하나의 선율을 한 목소리로 부른다. 오보에의 날카로운 소리와 클라리넷의 둥근 소리가 같은 음 위에 겹치고, 뒤이어 플루트와 피콜로가 붙고 실로폰이 뼈처럼 드러나며, 바이올린도 같은 길을 따라간다. 화음을 나눠 맡을 때와는 다른 소리가 난다. 여러 악기가 하나를 부르는데도 각자의 색이 남아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상태로 들린다. 트럼펫이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트럼펫의 강함은 곧고, 곧은 소리는 무엇을 말하는지 감추지 못한다. 목관이 한 목소리로 낼 때의 강함은 크기가 같은데도 그것이 위협인지 조롱인지 정해지지 않는다.
짧다는 사실도 여기에 걸려 있다. 주제를 변형하고 발전시키면 그 대상을 어떻게 보는지가 드러난다. 어디로 데려가는지가 곧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 악장은 발전하지 않는다. 장면 하나를 그대로 놓고 4분 만에 끝난다. 판단이 악보에 적히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확인이 없다는 사실이 이 챕터의 요점이 된다. 그는 말로도 확인해 주지 않았고 악보에도 판단을 적지 않았다. 두 해석은 그렇게 나란히 남았다.
1960년 7월, 쇼스타코비치는 드레스덴 근교 고리슈의 요양지에 머물렀다. 소련과 동독이 합작한 영화 《닷새 밤 닷새 낮》의 음악을 맡은 채였다. 영화의 소재는 1945년 2월 폭격으로 무너진 드레스덴과 그 잔해에서 회수된 회화들이었다.
그는 영화 음악을 쓰지 않았다. 대신 7월 12일부터 14일까지 사흘 동안 현악 4중주 8번을 썼다.
그해 봄 그는 러시아 공화국 작곡가동맹 의장직을 맡기 위해 공산당 입당 절차를 밟았다. 1936년의 사설 이후 24년, 스탈린이 죽은 지 7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를 압박한 것은 더 이상 총살의 위협이 아니라 직위와 절차였고, 그는 서명했다.
7월 19일, 그는 친구 이사크 글리크만에게 편지를 썼다. 아무에게도 쓸모없고 이념적 가치도 없는 4중주를 하나 썼다고 적었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추모곡을 써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썼다고 했고, 제목을 붙인다면 이 4중주를 쓴 작곡가를 추모하며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곡을 쓰는 동안 흘린 눈물의 양을 맥주 여섯 잔을 마신 뒤의 소변에 빗대기도 했다.
악보 표지에 인쇄된 헌사는 다른 것이었다.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며. 공식 헌정과 사적 헌정이 한 악보 위에 겹쳐 있었다. 이 겹침이 그가 24년 동안 유지해 온 작법의 요약이다.
곡은 다섯 악장이 끊김 없이 이어진다. 첫 음이 D-S-C-H다. 첼로가 먼저 그 네 음을 내고, 비올라가 받고, 제2바이올린이 받고, 제1바이올린이 마지막으로 받는다.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며 묻고 답하는 푸가의 방식이다. 자기 이름 하나를 네 목소리가 서로 다른 높이에서 부르는 것으로 곡이 열린다. 푸가는 바흐가 세운 형식이기도 하다.
네 성부가 모인 뒤 다단조의 종지가 오고, 그 뒤로 긴 지속음이 이어진다. 어둠 속을 더듬는 것 같은 구간이다. 무엇을 찾는 움직임인지 방향 없이 머무는 소리인지 한쪽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안주할 곳이 없어서 계속 옮겨 다니는 소리에 가깝다. 그 사이에도 네 음은 모양을 바꾸며 계속 나온다. 듣는 사람이 그 동기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해도, 음이 한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는 감각은 전해진다.
이 동기는 전곡을 관통한다. 그 위에 그는 자기 작품들을 하나씩 불러들였다. 교향곡 1번, 교향곡 5번, 피아노 3중주 2번, 첼로 협주곡 1번, 교향곡 10번, 그리고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서 카테리나가 부르는 선율이 차례로 지나간다. 1936년에 그에게서 빼앗긴 작품이 1960년의 장례식에 참석한 셈이다. 제정기 혁명가 「무거운 속박에 시달려」의 선율도 들어 있다.
4악장에는 그의 것이 아닌 인용이 하나 더 있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서 지크프리트가 죽은 뒤 흐르는 장송행진곡의 리듬형이다.
정치가 삶을 흔든 작곡가가 그만은 아니었다. 바그너는 1843년부터 드레스덴 궁정 악장이었고, 1849년 5월 봉기에 가담한 뒤 수배를 피해 국경을 넘었으며, 그 뒤 12년을 망명자로 보냈다.
다만 두 사람의 장례는 주인이 달랐다. 바그너는 1883년 베네치아에서 죽었고, 시신은 기차로 바이로이트까지 옮겨졌으며, 장례 행렬은 도시가 준비했고, 그를 후원했던 바이에른 왕도 조의를 보냈다. 바그너를 추모한 것은 그가 살았던 나라와 도시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반대였다. 1960년 여름, 앞으로 열다섯 해를 더 살 사람이 사흘 만에 자기 추도곡을 썼다. 글리크만에게 보낸 편지에 그 이유가 적혀 있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추모곡을 써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직접 썼다는 것이다. 그해 봄 그는 당원증에 서명했고, 훈장과 상은 이미 여러 개 받은 뒤였다. 국가가 그를 기념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국가가 기념할 사람은 공식 이력에 적힌 작곡가였지, 1936년에 오페라를 잃고 그 뒤 24년을 판정을 피하며 산 사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그 24년을 곡 안에 넣었다. 교향곡 1번과 5번, 피아노 3중주 2번, 첼로 협주곡 1번, 교향곡 10번의 선율이 차례로 지나가고, 1936년에 빼앗긴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도 그 안에 있다. 자기가 쓴 것으로 자기를 채운 셈이다. 그리고 악보 표지에는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한다는 헌사 한 줄이 인쇄됐다. 검열을 통과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곡 안에는 자기 이력을 다 넣고, 밖에는 국가가 읽을 문장을 붙였다. 그가 24년 동안 해온 일이 마지막에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됐다.
규칙이 있는 체제에서는 순응이 전략이 된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면 지킬 수 있고, 지킨 사람은 안전을 얻는다. 쇼스타코비치가 산 체제에는 그 규칙이 없었다. 형식주의가 무엇인지 끝내 정의되지 않았고, 판정은 작품이 나온 뒤에 내려졌으며, 어제 국가가 발주한 장르가 오늘 죄목이 됐다. 1938년에 국립 재즈 오케스트라를 세운 나라가 10년 뒤에는 같은 음악을 서구의 잔재로 몰았다. 대숙청의 할당제 아래에서 순응한 사람도 숫자에 들어갔던 것과 같은 구조였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은 순응이 아니었다. 순응할 대상이 고정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택할 수가 없었다. 그가 택한 것은 판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교향곡 5번의 마지막 페이지는 승리로도 들리고 강요된 환호로도 들린다. 둘 중 하나가 진심이고 나머지가 위장인 것이 아니라, 두 해석이 각각 끝까지 성립한다. 이것은 애매하게 쓰는 일과 다르다. 애매한 악보는 아무것도 아닌 채로 남지만, 그의 악보는 완결된 얼굴을 둘 가졌다. 어느 쪽으로도 읽히도록 쓰는 일이 한쪽으로만 읽히도록 쓰는 일보다 어렵다.
대가는 그가 죽은 뒤에 드러났다. 서방은 오래 그를 체제의 협력자로 읽었다. 소련이 무너진 뒤에는 방향이 뒤집혀서 그의 모든 작품이 숨겨진 저항으로 해석되는 시기가 왔다. 어느 쪽도 그가 쓴 것을 그대로 읽지 않았고, 정정할 사람은 이미 없었다. 판정을 피하려고 만든 이중성이 해석까지 함께 막았다. 암호는 열쇠를 아는 사람에게만 열리는데, 그는 열쇠를 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4중주 8번의 도입에서 네 음이 작곡가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그 음들이 한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옮겨 다닌다는 것은 듣는다. 그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지만, 그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는 악보에 남았다.
그는 현악 4중주를 스물넷까지 쓸 계획이었다고 전해진다. 스물넷은 모든 조성을 한 번씩 채우는 숫자다. 바흐가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에서 그 숫자를 채웠고, 이후 쇼팽과 스크랴빈과 드뷔시가 같은 숫자로 전주곡집을 남겼다. 쇼스타코비치도 1950년 라이프치히에서 열린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대회의 심사를 맡고 돌아온 뒤, 이듬해까지 전주곡과 푸가 스물네 곡을 썼다. 4중주에서는 열다섯 곡까지 쓰다가 끝내 스물넷을 채우지 못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유작은 1975년의 비올라 소나타였다. 3악장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인용한다. 그가 왜 그 곡을 택했는지는 악보에 적혀 있지 않다. 이 소나타를 헌정받고 초연한 비올리스트 표도르 드루지닌은 작곡가가 이 악장을 베토벤에게 바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삼십 년 가까이 악보 안에 자기 이름을 심어 온 사람이, 마지막 악보에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