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말러 음악에 한 번 붙잡힌 사람들을 말러리안이라고 부른다. 바그네리안이나 브루크네리안과 같은 조어법이지만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말라리아에 빗댄 농담으로도 통한다. 한 번 걸리면 낫지 않는다는 뜻이다.
교향곡 전곡 실황을 좇아 도시를 옮겨 다니거나, 지휘자별 녹음의 차이를 초 단위로 논하거나, 한 악장을 몇 년째 반복해 듣는 청중이 있다.
이 음악이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이상한 일이다. 한 곡이 90분에 이르고, 무대에는 백 명이 넘게 오르며, 무대 뒤에서 금관이 울리고, 4악장에 가서야 성악이 등장한다. 한 번 듣고 구조가 잡히는 곡이 아니다. 보통 이런 조건은 청중을 줄인다. 그런데 말러를 처음 듣는 사람이 붙잡히는 지점은 대개 구조가 아니다. 다른 것이다.
1889년 11월 20일, 부다페스트. 스물아홉의 말러가 자신의 첫 교향곡을 초연했다. 그해 2월에 아버지가, 9월에 여동생이, 10월에 어머니가 죽었다. 세 번째 장례에서 이 무대까지 한 달이 걸렸다.
말러 자신은 이 작품에 적잖은 자신을 품고 있었다. 이윽고 2부의 첫 곡인 장송행진곡 악장이 시작되었다. 콘트라베이스 한 대가 낮고 느린 선율을 끌어올리기 시작하자 객석이 술렁였다. 누군가 그 멜로디의 정체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돌림노래였다. 우리가 "Are you sleeping, Brother John"으로 아는 그 노래, 독일에서는 브루더 마르틴이라 불리는 그 명랑하고 귀여운 곡이 단조로 뒤집힌 채 흐르고 있었다. 누구나 흥얼거리던 동요가 무겁고 어두운 장례 행렬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객석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교향곡 한복판으로 동요가 걸어 들어온 셈이었으니 웃음과 분노 사이에서 사람들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첫 작품을 내놓은 젊은 작곡가의 낯선 작풍이었다. 브루더 마르틴의 선율은 돌림노래, 곧 캐논의 형식으로 차곡차곡 쌓여 올라가고 그 위로 거리 악단의 흥청대는 가락이 끼어든다. 말러는 악보에 패러디하듯 연주하라고 적어 두었다. 이 대목에서 말러의 뿌리인 동유럽 유대 음악의 그림자를 읽어 내는 이들도 있다.
말러는 노골적으로 가져왔다. 다만 그는 빌려온 음표를 단 하나도 바꾸지 않으면서 그 음표를 둘러싼 네 가지를 바꾸어 놓았다.
첫째로 그는 조성을 뒤집었다. 밝은 장조를 어두운 단조로. 둘째로 음색을 옮겼다. 본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에 실려야 할 선율을, 멜로디를 맡기에는 가장 둔중하고 어색한 콘트라베이스의 독주에 얹은 것이다. 셋째로 돌림노래의 형식은 그대로 살리되 음들이 서로 어긋나며 쌓이도록 비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위에 가장 이질적인 것을 충돌시켰다. 흥청대는 거리 악단의 가락이었다. 그리하여 슬픔과 들뜬 흥이 한 장송곡 안에서 동시에 울리는, 기묘하고 어딘가 불편한 행진곡이 태어났다.
같은 음, 정반대의 뜻.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말러가 둘 중 하나를 이기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장례가 술집 음악을 몰아내지도 않고, 술집 음악이 장례를 웃음거리로 만들지도 않는다. 둘 다 끝까지 남는다. 익숙한 것을 비틀어 희화화하는 솜씨는 말러의 악보 전체에 흩어져 있는데 그 비틀기는 대개 원래의 것을 파괴하지 않는다. 원래의 것이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어야 어긋남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겹침은 말러의 음악에서 한 층위에만 있지 않다.
시대가 겹친다. 바로크의 코랄풍 선율과 고전기의 동기 발전, 낭만의 서정적 선율이 한 작품 안에 함께 있다. 말러는 작곡가이기 전에 지휘자였고, 라이프치히, 부다페스트, 함부르크와 빈의 극장에서 십수 년간 다른 사람들의 악보를 실제로 소리 내는 것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는 여름휴가에 작곡했고, 나머지 계절에는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지휘했다.
격이 겹친다. 숭고한 것 옆에 유치한 것이 놓이고, 장엄한 정점 다음에 술 취한 왈츠가 온다. 당대의 비평가들이 이것을 취향의 결함으로 읽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음악 안과 밖이 겹친다. 6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에는 해머가 등장한다. 무대 위에서 사람이 커다란 나무 상자를 실제로 내리친다. 이 소리에는 음정이 없다. 오케스트라의 어떤 악기와도 화성적으로 관계 맺지 않고, 쌓아 올린 텍스처를 그냥 뚫고 나온다. 관객은 그것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다. 음악을 듣는 시간 안으로 음악이 아닌 사건이 들어오는 것이다. 카우벨도, 무대 뒤에서 들려오는 금관도 같은 일을 한다.
그리고 말러의 편성은 그때까지의 교향곡이 도달한 최대치이고, 8번은 초연 때 천 명 가까운 인원이 동원되어 그런 별칭이 붙었다. 연주회장에서 겪을 수 있는 물리적 최대치를 그의 음악은 실제로 제공한다.
다만 규모의 의미는 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데 있지 않다. 편성이 클수록 뺄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백 명이 무대에 올라 있어야만 그중 아흔 명이 침묵하는 순간이 사건이 된다. 말러가 나중에 하게 될 일이 그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이 최대치를 다 쌓아 놓고, 마지막 삼십 분 동안 그것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그러니까 말러리안이 걸린 것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의 음악에서는 무엇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으므로 한 번 듣고 끝나지 않는다. 훈련 없이도 들어갈 문이 있고, 문 안쪽은 훈련해도 다 파악되지 않는다.
이 방식은 첫 교향곡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고, 마지막까지 바뀌지 않는다. 죽음을 향해 가는 9번의 중간 두 악장은 시골 춤곡과 익살극이다.
그런데 이 음악은 작곡가가 죽은 뒤 반세기 가까이 연주회장에서 사라져 있었다. 1911년의 청중은 이것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몰랐고, 1960년대의 청중은 알았다. 무엇이 달라진 것인가.
이 챕터는 두 가지를 다룬다. 말러가 이런 음악을 쓰게 된 조건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버렸기에 오십 년 뒤의 청중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알아들었는가.
말러는 1860년 보헤미아의 칼리슈트에서 태어났고, 몇 달 뒤 가족은 이글라우로 옮겼다.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는 그곳에서 증류주 제조업과 선술집을 운영했다.
베른하르트와 마리 사이에서 열네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여덟 명이 유년기를 넘기지 못했다.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것은 여섯 명이었다.
이 숫자를 19세기 중부 유럽의 영아 사망률과 비교해 보면, 실제로 당시 그 지역에서는 열 명 중 서너 명이 다섯 살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말러 가족의 사정이 통계적으로 특별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통계와 경험은 다른 층위에 있다. 열네 명 중 여덟 명이라는 숫자가 당시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집에서 여덟 번의 장례를 치르며 겪었을 상실과 충격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가장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이다. 1875년, 에른스트는 오래 병을 앓다가 열세 살에 사망했다. 열다섯 살의 구스타프는 병상 곁을 지켰다. 병이 진행되는 동안 동생에게 이야기를 지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에 말러는 첫 오페라 습작 《에른스트 폰 슈바벤 공작》을 구상했고, 악보는 남아 있지 않다.
1889년은 다른 방식으로 압축된 해였다. 2월에 아버지가 죽었고, 9월에 여동생 레오폴디네가 죽었으며, 10월에 어머니가 죽었다. 같은 해 11월, 스물아홉의 말러는 부다페스트에서 교향곡 1번을 초연했다. 초연은 실패했다. 1895년에는 동생 오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물두 살이었고, 역시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같은 시대에 같은 규모의 죽음을 겪은 사람은 수없이 많았다.
말러는 스물다섯에 《탄식의 노래》를 썼고, 마흔넷에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완성했으며, 마흔아홉에 9번의 마지막 장에 사그라지며라고 적었다. 삼십 년 동안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상실이 무뎌졌다면 돌아올 이유가 없었다.
다만 말러는 죽음이 어떤 형태로 오는지 알고 있었다.
1889년의 여덟 달을 다시 보면, 2월에 아버지, 9월에 여동생, 10월에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11월에 부다페스트에서 그의 교향곡 1번을 초연했다. 초연 날짜는 이미 잡혀 있었고, 그는 그 날짜를 지켰다. 죽음이 세 번 지나가는 동안에도 극장의 일정표는 바뀌지 않았다.
이 사실이 말러의 음악에 남긴 것은 위로가 아니다. 그가 반복해서 마주한 것은 무언가가 사라지는 동안에도 시간이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병상은 몇 달씩 이어지고, 그동안 계절이 바뀌고, 리허설이 잡히고, 다음 시즌 프로그램이 결정된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한 사람의 몫이 사라진다. 세계는 그 자리를 표시하지 않는다.
그가 나중에 악보에 옮긴 것이 이 구조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죽음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는 시간이다.
여기서 앞선 챕터들과 갈라진다. 베토벤은 죽음을 맞서야 할 상대로 두었다. 말러는 죽음을 대면하지도, 감당하지도 않았다. 그는 죽음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되는 시간 쪽을 악보에 썼다.
근거는 말러의 악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9번 4악장에서 편성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동안 박자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소리를 내는 악기의 수이지 음악의 시간이 아니다. 남은 성부는 끝까지 제 일을 한다. 베토벤이라면 여기서 템포를 무너뜨리거나 정적을 삽입해 사건을 표시했을 것이다. 말러는 표시하지 않는다.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되는 것은 사라진 다음이다.
그 악장의 마지막 지시는 ersterbend, 사그라지며다. 이것은 도착점이 아니라 진행형이다. 무엇이 되어 간다고 말하지 않고 줄어드는 중이라고만 적혀 있다. 종결을 상태로 규정하지 않겠다는 선택이다.
6번 교향곡에서 카우벨은 무대 밖에서 울린다. 말러는 그것을 산 위에서 들려오는 마지막 지상의 소리라고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악보상의 사실은 하나다. 음악이 정점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무대 밖의 소리는 계속 울린다. 사건이 벌어지는 자리와 세계가 계속되는 자리가 동시에 소리를 낸다.
말러가 알마와 결혼하고 딸들과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때, 그는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를 1901년부터 1904년 사이에 작곡했다. 버젓이 딸들이 살아 있음에도 말이다. 그 후에 큰딸 마리아 안나가 성홍열과 디프테리아로 죽은 것이 1907년 7월이다.
가사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다. 뤼케르트는 1833년에서 1834년 사이에 성홍열로 두 아이를 잃었고, 사백 편이 넘는 시를 썼다. 말러는 그중 다섯 편을 골랐다.
알마는 회고록에서 이 곡의 작곡에 반대했으며 아이가 살아 있는데 그런 노래를 쓰는 것이 화를 부른다고 여겼다고 적었다. 그리고 1907년 이후에는 그 예감이 맞았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이 서술은 알마의 회고에만 근거하고 있으며, 사건이 일어난 뒤에 쓰였다는 점을 짚어 둔다. 사후적 재구성일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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