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 끝난 양식을 끝까지 밀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by크로마

1977년에 발사된 두 대의 탐사선에는 금박을 입힌 레코드가 한 장씩 붙어 있었다. 지구의 소리를 담은 스물일곱 곡이 실렸고, 그중 세 곡이 바흐다.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2번의 첫 악장,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3번의 가보트, 그리고 글렌 굴드가 친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권 1번의 전주곡과 푸가로, 어떤 작곡가보다 많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폰 뷜로는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구약성서라고 불렀다. 신약은 베토벤의 서른두 곡 소나타였다. 그는 바흐가 아버지이고 베토벤이 아들이며 브람스가 성령이라는 말도 남겼다. 뷜로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던 1870년대는 그가 베토벤 소나타 교정판을 내고 전곡 연주회를 열며 베토벤 전문가로 자기 자리를 만들던 시기였다.


1801년에 베토벤은 바흐 전집을 내려던 출판업자에게 편지를 쓰며 그를 화성의 시조라고 불렀고, 같은 해 다른 출판사에 보낸 편지에서는 불멸의 화성의 신이라고 적었다. 독일어에서 바흐는 시내를 뜻하는데, 그는 시내가 아니라 바다로 불려야 한다는 말도 베토벤이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 말은 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호칭은 대개 바흐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것이었다. 다만 위에 열거한 것들은 전부 바흐가 죽고 백 년 이상 지난 뒤에 붙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1750년에 그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사뭇 달랐다.



아들들의 시대


이 글에서 바흐라고만 쓸 때는 아버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가리킨다. 아들들은 이름과 성을 병기한다. 18세기 후반의 유럽에서는 그 구분을 반대로 해야 했기 때문이다.


1738년,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둘째 아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프로이센 왕세자의 궁정에 건반 주자로 들어갔다. 그가 베를린에서 쓴 건반 소나타들은 아버지가 라이프치히에서 쓰던 음악과 공통점이 많지 않다. 성부를 여럿 겹치지 않고 선율 하나를 맨 윗성부에 두되, 그 선율이 예상되는 자리에서 닫히지 않고 방향을 틀거나 갑자기 멎게 만들었다. 1742년에 그중 여섯 곡이 프리드리히 2세에게 헌정되어 인쇄되었고, 인기를 끌었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아버지의 방식인 대위법을 다룰 줄 몰라서 다른 음악을 쓴 것이 아니다. 그는 뒷날 작곡과 건반 연주 모두 아버지 외에 다른 스승을 둔 적이 없다고 적었다. 아버지에게 배웠으나 아버지의 작풍대로 쓰지 않기로 했다.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는 더 멀리 갔다. 아버지가 죽은 뒤 이탈리아로 건너가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를 지낸 다음 런던으로 옮겨 이탈리아 오페라를 쓰는 작곡가가 되었다. 여러 세대에 걸쳐 루터파 교회음악을 맡아온 집안에서 그는 교파와 언어와 장르를 한꺼번에 바꿨다.


같은 무렵 라이프치히에서 아버지는 아들들이 좇던 방향과 정반대로 가고 있었다. 당대에 유행하던 작풍을 쓰는 대신, 라단조 주제 하나를 놓고 대위법으로 그것을 뒤집고 늘이고 겹치는 방법을 차례로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 작업의 결과물은 그가 죽은 뒤에 인쇄되었으나 팔리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의 유럽에서 바흐라는 이름은 두 아들을 가리켰다. 런던의 바흐는 요한 크리스티안이었고, 함부르크의 바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얻은 명성은 오르간 연주자와 오르간 감정가로서의 것이었지 작곡가로서의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명성이 닿는 범위와 작곡가로서 작품이 유통되던 범위는 서로 달랐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나이 차이는 큰아들과 스물다섯, 막내와는 쉰 살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궁정과 교회가 음악가를 쓰는 방식은 그사이에 크게 바뀌지 않았으므로, 이들이 놓인 시장은 같았다고 볼 수 있다. 갈라진 것은 그 시장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들이 내린 판단이다.



시장이 무엇을 원했나


1730년대 후반의 유럽에서 팔리는 음악은 갈랑 양식이었다. 갈랑은 세련되고 우아하다는 뜻의 프랑스어에서 온 말로, 원래 궁정과 살롱의 취향을 가리켰다. 음악에서는 짜임을 덜어내고 듣기 좋은 선율을 앞세우는 방식을 뜻했다. 선율 하나가 앞에 나오고 나머지가 뒤에서 받친다. 화성은 단순하고 마디는 짝수로 떨어지며, 악구가 끝나는 자리가 분명해서 처음 듣는 사람도 어디쯤 왔는지 안다. 드레스덴의 하세, 베를린의 그라운, 함부르크의 텔레만이 그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주력했던 대위법은 그 반대편에 있었다. 성부 넷이 각각 자기 선율을 들고 동시에 움직이면 어느 것을 따라가야 할지 정해 주는 장치가 없다. 시작과 끝이 성부마다 어긋나기 때문에 악구의 경계도 흐려진다. 갈랑 양식이 듣는 사람의 부담을 덜어 주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면, 대위법은 그 부담을 그대로 남겨 둔다.


대위법은 바로크 시대 내내 작곡가가 갖춰야 할 기본 기술이었다. 다만 청중을 끌어모은 쪽은 오페라의 아리아였고, 대위법이 주로 쓰인 자리는 교회와 건반 음악이었다. 그러던 것이 바로크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작곡학도들이 배우는 하나의 과목으로 좁아졌다. 당시 작곡가가 되려는 사람은 학교가 아니라 궁정 악장이나 교회 오르가니스트 밑에서 도제로 훈련을 받았고, 대위법은 그 훈련의 초반부에 놓였다. 갈랑 양식이 유럽 전역에서 팔리는 상황이었으므로 대위법을 익히는 목적도 달라졌다. 그것으로 곡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유산을 한 번 거쳐 작곡가로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바흐의 아들들이 각각 어디에 섰는지를 보면 이 구분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했는지가 드러난다. 큰아들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는 네 아들 가운데 오르간 연주로 이름을 남긴 유일한 사람이었고, 당대에 그 세대 최고의 오르간 주자로 불렸다. 동시대 기록은 그의 연주가 대부분 즉흥이었다고 전한다. 주제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푸가를 만들어 냈을 정도로 정통했으나,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전하는 작품은 백 곡 남짓으로 천 곡이 넘는 아버지의 십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오르간 곡은 여덟 개의 푸가와 소품 몇 곡이 전부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적어 두기를 싫어했다고 기록했다.


둘째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는 새 양식 쪽에서 이름을 얻었다. 다만 그가 쓴 것은 드레스덴이나 나폴리의 매끄러운 갈랑과도 달랐다. 악구가 예상된 자리에서 닫히지 않고 화성이 갑자기 어긋나며 여백이 길게 남는 그의 방식을 오늘날에는 감정 과다 양식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부른다. 이 말은 당시 독일에서 감정을 앞세우던 문학과 문화의 흐름을 가리키던 데서 왔지만, 그것을 하나의 음악 양식으로 묶어 이름 붙인 것은 후대의 음악학자들이다. 막내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가 갈랑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 것은 아버지가 죽고 한참 뒤의 일이고, 아버지가 결정을 내리던 시장에 그는 아직 없었다.



자기 양식이 낡았다는 것을 몰랐을까


바흐가 자기 음악이 당시에 어떻게 규정되는지 확인한 시점은 1737년 5월, 함부르크에서 나오던 잡지 《비판적 음악가》에 한 음악가를 겨냥한 글이 실렸을 때다. 필자인 요한 아돌프 샤이베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 사람"이라고만 적었지만, 라이프치히의 독자들은 그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았다. 샤이베의 지적은 이랬다. 이 음악가는 손가락 기술이 뛰어나고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지만, 모든 성부에 똑같은 무게를 실어 곡을 얽어 놓기 때문에 듣는 사람이 따라갈 수 없다. 기교가 지나쳐 아름다움이 가려지고,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수사학을 가르치던 요한 아브라함 비른바움이 이듬해 반박문을 냈고, 논쟁은 몇 년을 끌었다. 그런데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이겼느냐가 아니다. 샤이베가 쓴 단어들, 곧 과도하다와 부자연스럽다와 따라갈 수 없다가 앞 절에서 정리한 시장의 기준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듣는 사람이 어디쯤 왔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를 척도로 삼으면 바흐의 음악은 낡고 어려운 것이 된다. 그는 자기 음악에 무슨 낙인이 붙었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그 낙인이 붙은 뒤에도 그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 왜 작풍을 바꾸지 않았을까. 왜 대위법을 고수했을까.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


1685년에 태어난 독일 음악가가 한 사람 더 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바흐가 태어난 아이제나흐에서 130킬로미터쯤 떨어진 할레에서 같은 해에 태어났다. 두 사람은 평생 만나지 않았다. 바흐가 헨델을 만나려 두 차례 시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느 쪽도 성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생애를 나란히 놓으면 갈라지는 지점이 분명하다. 헨델은 스물두 살에 이탈리아로 갔고, 스물다섯에 런던으로 옮긴 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는 고용된 음악가가 아니라 흥행사였다. 오페라 회사를 세워 가수를 계약하고 표를 팔았으며, 회사가 무너지면 다시 세웠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수요가 식자 영어 오라토리오라는 새 상품으로 갈아탔다. 이 바카라의 앞부분에서 《메시아》의 24일을 다루며 확인한 것이 그것이다. 그 속도는 기적이 아니라 30년 동안 무대에 지불한 시간이 돌아온 결과였다. 헨델은 재산을 남기고 죽었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바흐는 독일어권을 벗어난 적이 없다.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바이마르, 쾨텐, 라이프치히로 이어지는 그의 이력은 전부 임명직이다. 그는 표를 판 적이 없고, 자기 작품의 흥행으로 수입이 오르내린 적도 없다. 죽은 뒤에는 라이프치히의 한 묘지에 묻혔는데 정확한 위치가 오래 잊혔다가 19세기말에 발굴로 다시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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