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난로 속의 교향곡 8번

장 시벨리우스

by크로마

1940년대 중반의 어느 날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야르벤패의 숲 속 별장 아이놀라에서 여든을 앞둔 한 노인이 빨래 바구니 하나를 식당 난로 앞으로 끌어다 놓았다. 바구니 안에는 그가 평생에 걸쳐 써 온 악보의 더미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것을 한 장씩 불 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곁에서 지켜본 것은 아내 아이노였다. 훗날 그녀는 그날을 두고 아이놀라에서 벌어진 분서(焚書)였다고 회고했다. 남편이 원고를 빨래 바구니에 그러모아 식당의 불 위에서 태웠고 자신은 그 과정을 차마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증언에는 한 가지 뜻밖의 대목이 따라붙는다. 그 일이 끝난 뒤 남편은 오히려 차분해졌고 태도가 한결 밝아졌으며 그 무렵이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영영 잃고 나서야 비로소 평온을 되찾은 사람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불 속으로 들어간 것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음악사가 거의 한 목소리로 짐작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30년 가까이 온 세계가 기다려 온 곡, 그의 교향곡 8번이다. 1926년 교향시 〈타피올라〉를 끝으로 시벨리우스는 이렇다 할 신곡을 더 이상 내놓지 않았으나 그가 새 교향곡을 쓰고 있다는 소문만은 꺼지지 않고 떠돌았다. 보스턴 교향악단의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에게 초연을 약속했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사람들은 해마다 그 초연을 기다렸다. 1933년 여름 필사자 파울 포이트가 1악장의 필사본을 완성했는데 그 분량이 스물세 쪽이었고 시벨리우스는 전곡이 그 여덟 배에 이를 것이라 일러두었다. 사실이라면 그의 일곱 교향곡 가운데 가장 긴 작품이 될 참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출판업자가 진척을 물으면 곡은 아직 머릿속에만 있다고 답했고 어느 해 겨울에는 이번 시즌에 교향곡은 없다는 전보를 보냈다. 한 피아니스트가 그 곡이 정말 존재하기는 하느냐고 묻자 그는 담뱃갑을 꺼내 그 위에 첫 화음을 적어 보였다고 한다. 그것이 세상이 본 8번의 거의 전부였다. 약속과 회피가 30년 동안 번갈아 이어졌고 그사이 그를 기다리던 지휘자들은 늙거나 죽었으며 곡은 끝내 단 한 마디도 울리지 못한 채 식당의 불 속으로 사라졌다.


이 침묵이 기이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것이 할 말을 잃은 사람의 침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벨리우스는 당대에 가장 널리 연주되는 살아 있는 교향곡 작곡가였다. 일곱 곡의 교향곡과 〈타피올라〉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고 북유럽의 숲과 호수와 빛을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음향으로 옮겨 놓았다. 영국과 미국의 악단은 그의 곡을 앞다투어 무대에 올렸고 그의 이름은 한 나라의 자부심이자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어휘가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는 이미 자신만의 완성된 언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예순 무렵에 손을 멈추었고 아흔이 넘도록 살면서 30년 동안 거의 아무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멈추기 직전에 그가 도달한 자리를 보면 그 침묵은 더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교향곡 7번은 1914년에 첫 재료가 나타나 1924년에야 끝났다. 처음에는 여러 악장을 거느린 곡을 생각했으나 1923년 여름의 마지막 작업 국면에서 그는 악장의 경계를 지우기로 결정했다. 하이든 이래 교향곡은 대체로 일정한 템포로 한 악장을 묶고 조성이 다른 주제를 맞세워 대비를 얻었다. 7번은 그 방식을 뒤집는다. 곡 전체가 하나의 중심음에서 벗어나지 않는 대신 템포가 끊임없이 옮겨 가고 밝음과 어두움, 짜임새와 음색이 대비를 떠맡는다. 그는 이 곡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한동안 정하지 못했다. 1924년 3월 스톡홀름 초연 때 붙은 이름은 〈교향적 환상곡 1번〉이었고 교향곡 7번이라는 제목은 이듬해 출판 단계에서야 확정되었다. 2년 뒤의 〈타피올라〉는 그 방향을 더 밀어붙였다. 하나의 짧은 동기가 곡 전체를 낳고 관현악의 음향은 당대에 유례가 드문 자리까지 나아갔다. 후대의 한 평자는 이 곡이 서른 해나 마흔 해쯤 앞서 있었다고 적었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어법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지점까지 이미 걸어간 뒤였다.


브람스를 멈춰 세운 거인은 그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과거였고 베토벤이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시벨리우스를 멈춰 세운 거인은 그의 앞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음악 그 자체의 다음 모습이었다. 〈타피올라〉가 나올 무렵 음악의 지도는 다시 그려지는 중이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리듬으로 청중의 귀를 뒤집어 놓았고 쇤베르크는 조성이라는 천 년의 토대를 허물고 열두 음을 동등하게 다루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고 있었다. 조성은 끝났다는 선언이 유럽 대륙의 공기를 채웠다. 북유럽의 자연을 조성의 언어로 노래하던 이 사람에게 그 선언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영국과 미국이 그를 떠받드는 동안에도 그는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혼자 읽고 있었다.


그 선언이 무거웠던 까닭은 그것이 취향의 문제로 제출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새로운 세대는 무조를 여러 선택지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역사의 다음 단계로 내세웠다. 이 논리 안에서 조성으로 쓴다는 것은 다른 길을 간다는 뜻이 아니라 뒤처진다는 뜻이 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의 젊은 세대가 1860년대에 태어난 작곡가들을 후기낭만주의자라 부르기 시작했을 때 그 말은 시대 구분이 아니라 판결에 가까웠다. 시벨리우스는 1865년생이었다. 그 판결을 받고도 손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한 해 먼저 태어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끝까지 조성을 놓지 않았고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도 화려하고 정교한 음악을 계속 써냈으며 그 대가로 시대를 읽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그 평가는 그가 죽은 뒤로도 삼십 년 넘게 이어졌다. 시벨리우스가 그 길을 어떻게 보았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계속 쓴다는 것은 낡은 사람으로 남는다는 뜻이었고 쓰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그 분류를 유예하는 일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새로운 음악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인상은 후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평생 유럽 각지를 오가며 낯선 음악을 찾아들었고 1911년 베를린에서 당대의 새 음악을 접한 뒤에는 자기 자신을 분명히 보기 위해 젊은 작곡가들에게 늘 관심을 두고 있다고 썼다. 그가 거기서 읽어 낸 것은 지금의 작곡가들이 청중을 붙들기 위해 끊임없이 새롭고 놀라운 것을 내놓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이었다. 쇤베르크에 대해서도 그는 침묵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시벨리우스가 진보적인 쪽으로 움직인 적도 있다. 1911년의 교향곡 4번은 입체파라거나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는 음악이라는 평을 들었고 미래주의적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낡았다고 맞기 전에 그는 새롭다고 먼저 맞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4번 이후 그는 그 방향에서 돌아섰다. 훗날 한 음악학자는 이 국면을 이렇게 정리했다. 한정된 공간에 점점 더 강한 의미를 밀어 넣던 끝에 두 사람은 나란히 절벽에 이르렀고 시벨리우스는 5번에서 자기 어법으로 돌아섰으며 쇤베르크는 뛰어내렸다. 그러므로 그의 침묵은 무지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절벽을 보았고 그 끝에 서 보았으며 뛰어내리지 않기로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뛰어내리지 않기로 한 사람에게 시대는 돌아설 권리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이 지점에 시벨리우스의 고뇌가 묻어난다. 그 곡은 그저 좋은 곡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은 자신의 언어가 여전히 이 시대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는 곡이어야 했다.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을 낡았다고 선고한 시대를 만족시킬 만큼 새로워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요구는 애초에 한 곡 안에서 동시에 충족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요구를 짊어진 손은 첫 음을 적는 순간부터 그 음이 충분히 새로운지 묻는 또 하나의 눈에 감시당한다. 한 화음을 쓰면 그 화음은 식기도 전에 시대의 법정에 끌려 나간다. 이것은 1926년의 것인가 1890년의 것인가.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8번은 머릿속에서 여러 번 완성되었다가 매번 그 법정에서 기각되었다.


그러나 그가 침묵하던 30년 동안 음악을 심판하던 곳은 미학의 법정만이 아니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은 뒤 독일에서 음악은 국가가 관리하는 자원이 되었다. 괴벨스는 제국음악원을 세웠고 독일에서 활동하려는 음악가는 그 조직에 속해야 했다. 초대 총재 자리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앉았다. 베토벤과 바그너와 브루크너는 순수한 독일 음악의 세 거장으로 떠받들어졌고 그들의 음악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자료로 다시 읽혔다. 반대편에는 퇴폐 음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유대인 작곡가였던 멘델스존과 말러의 음악은 무대에서 지워졌고 쇤베르크와 베르크의 무조는 병균으로 불렸으며 재즈는 인종의 언어로 규정되었다. 라이프치히에서는 멘델스존의 동상이 철거되었다. 어떤 음악가는 국가의 얼굴이 되었고 어떤 음악가는 이름을 잃고 망명을 떠났으며 남은 이들은 침묵 속에서 버텼다. 무엇을 쓰느냐가 아니라 누구의 편에 서느냐가 한 사람의 음악을 살리고 죽이던 시절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이 사정을 몰랐을 리 없다. 그는 그 체제가 떠받든 이름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1934년 슈트라우스는 괴벨스 체제 아래 만들어진 작곡가 국제협력 상설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그를 지명했고 이듬해에는 히틀러의 서명이 들어간 괴테 메달이 헬싱키 주재 독일 대사를 통해 전해졌다. 1942년 봄 베를린에서 독일 시벨리우스 협회가 창립되었을 때 협회는 그를 피와 흙의 작곡가로 소개했다. 북유럽의 숲과 대지에서 솟아난 게르만적 음악이라는 뜻이었고 베토벤과 바그너에게 씌운 것과 같은 종류의 해석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가지 않고 딸을 대신 보냈으나 짧은 인사말 하나를 방송으로 띄웠다. 핀란드의 숲에서 음악의 빛나는 나라 독일에 인사를 보낸다는 문장이 거기 들어 있었다.


같은 무렵의 다른 일 하나가 그 사정을 더 또렷하게 보여 준다. 독일의 한 젊은 연구자가 그의 교향시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썼다. 작곡가와 직접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행한 연구였고 시벨리우스는 그 작업을 마음에 들어 했다. 민족이니 자연이니 신화니 하는 표제적 껍데기 대신 형식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 논문은 1943년에 완성되어 《음악과 국가》라는 연작에 편입되었고 서문은 선전부의 음악 담당자가 썼다. 거기에는 바다 건너 우리의 핀란드 친구들이자 동지 전우들에게 바친다는 문구가 들어갔다. 그가 가장 정확하게 읽혔다고 느꼈을 글이 국가 선전물의 한 권이 되어 있었다. 이 기록들을 어떻게 읽을지를 두고 연구자들의 견해는 갈린다. 괴테 메달을 두고 어떤 이는 부끄러운 처신이라 적었고 어떤 이는 그 메달이 몇 해 전 토마스 만에게도 갔다는 사실을 든다. 확실한 것은 그가 1931년 이후 다시는 독일 땅을 밟지 않았다는 사실, 나치의 선전 협력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다는 사실, 인종주의에는 경멸을 드러냈다는 사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독재와 전쟁이 자신을 혐오스럽게 한다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의 여백에 놓인 것은 판단이라기보다 처지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어떤 문장에 인용되는지를 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그 자리가 뒤집혔다. 퇴폐 음악으로 몰려 무대에서 지워졌던 쪽이 이제 도덕적 정당성까지 갖추고 돌아왔다. 폐허 위에서 다시 세워진 독일 음악계는 억압에서 풀려난 모더니즘에 몰두했고 쇤베르크와 말러를 앞세워 음악의 다음 장을 열려했다. 그 지형에서 훈장을 받았던 이름은 미학과 정치 양쪽에서 동시에 밀려났다. 1938년 아도르노는 시벨리우스가 훌륭하다면 바흐에서 쇤베르크까지 이어져 온 음악적 가치의 기준 자체가 무너지는 셈이라고 썼다. 이 글은 발표 당시에는 널리 읽히지 않았으나 1960년대에 아도르노의 권위가 쌓이면서 독일어권의 시벨리우스 이해를 대표하는 문서가 되었다. 1955년에는 12음 기법의 옹호자였던 프랑스 지휘자 르네 라이보비츠가 그의 아흔 번째 생일에 맞춰 《시벨리우스, 세계에서 가장 형편없는 작곡가》라는 소바카라자를 냈다. 훗날 라이보비츠는 그 제목이 농담이었다고 회고했다. 프랑스에서 최고의 작곡가를 묻는 설문에 시벨리우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에 그 과대평가에 반론을 편 것이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삼십 년을 얼어붙게 만든 시대의 평결이 정작 그것을 쓴 사람에게는 논쟁의 한 수였던 것이다.


그가 빨래 바구니를 난로 앞으로 끌어다 놓은 것은 전쟁이 끝나 가던 무렵이었다. 그사이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을 받았고 잃은 땅을 되찾기 위해 독일과 함께 싸웠으며 다시 독일을 상대로 총을 겨눈 끝에 전쟁을 마쳤다. 그 몇 해 동안 시벨리우스의 이름은 여러 차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쓰였다. 1941년 미국 신문에 실린 성명에는 그의 서명이 붙었으나 그 문장의 어법은 당시 핀란드 외교 당국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이 어느 쪽 문서에 얼마나 실려 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바깥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음악을 올려 주던 유럽의 연주회장 가운데 여럿이 무너졌고 악단은 흩어졌으며 음악의 중심은 대서양 건너로 옮겨 가고 있었다. 베를린의 한 연주회장은 전쟁 마지막 해에 부서진 뒤 다시 문을 열기까지 서른아홉 해가 걸렸다. 팔십 줄에 들어선 사람이 삼십 년 만에 내놓을 조성 교향곡이 어떤 무대에서 어떤 귀에 가닿을 것인가. 이 질문에 그 시절이 내놓을 답은 많지 않았다.


막힌 손이 밖에서 열린 사례가 없지는 않다. 초연에 실패한 뒤 삼 년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하던 젊은 러시아 작곡가는 한 의사의 방에서 자신을 다시 쓰게 만든 문장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시벨리우스를 멈춰 세운 것은 한 사람의 안에 생긴 매듭만이 아니었다. 그의 서재에 앉아 누가 어떤 말을 건넸다 한들 무너진 연주회장이 다시 서지는 않았고 조성으로 쓰인 새 교향곡을 역사의 뒤편으로 밀어내던 그 시대의 셈법이 바뀌지도 않았다. 라흐마니노프의 자물쇠는 그의 안에 있었기에 밖에서 열릴 수 있었다. 시벨리우스의 자물쇠는 절반이 바깥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은 바깥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저속한 악평에는 면역이 잘되어 있고 그런 글들은 어리석어서 화가 오래가지 않으며 때로는 신선한 자극이 되거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고 그는 적었다. 1930년대의 일이다. 이 문장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의 결론이 남는다. 남의 판결에 면역이 되어 있다고 공언한 사람이 삼십 년 동안 한 곡을 끝내지 못했다면 그를 멈춰 세운 법정은 신문 지면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깥의 판결문은 그가 이미 자기 안에서 여러 해에 걸쳐 초안을 잡아 둔 문장이었다. 아도르노가 활자로 옮긴 것은 새로운 선고가 아니라 그가 오래전부터 스스로에게 읽어 주던 판결의 사본이었다.


악보를 불 속에 던진 행위는 그 30년의 귀결이었다. 자신이 내면에 세운 기준을 끝내 충족시킬 수 없고 그렇다고 세상의 최종 판결 앞에 그 미완의 증거를 내놓을 수도 없을 때 사람은 증거 자체를 없앤다. 소각이 끝난 뒤 그가 차분해졌다는 아이노의 증언은 그래서 잔인할 만큼 정확하다. 그것은 더 이상 측정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다. 그가 할 말이 없어서 멈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1931년 친구 악셀리 갈렌칼렐라의 장례를 위해 며칠 만에 써 내려간 오르간 곡 〈슬픔의 울림〉에 8번의 재료가 흘러들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언한다. 멈춘 것은 말이 아니라 말을 향한 그 자신의 판결이었다.


브람스와 시벨리우스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선이 또렷해진다. 브람스는 등 뒤의 거인을 밀어내기를 그만두고 그것을 자기 안으로 들여 녹인 뒤에야 비로소 자신의 교향곡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끝내 받아들였고 그래서 계속 쓸 수 있었다. 시벨리우스는 앞에서 다가오는 시대의 어법을 택하지 않았다. 거기까지는 그의 판단이었고 판단은 잘못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어법을 택하지 않은 자신을 심판할 권한만은 그 시대에 넘겨주었다. 어법은 거절하고 법정은 인정한 것이다.


가장 가혹한 역설은 그가 끝내 자기 것으로 삼지 않은 그 어법이 정작 그에게 필요하지도 않았다는 데 있다. 그는 이미 누구의 것과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문법을 가지고 있었다. 후대는 그의 독창성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직 그 자신만이 의심했고 그것도 처음부터 자기 것이 아니었던 잣대로 의심했다. 결국 그의 언어를 침묵시킨 것은 그 언어가 충분히 새로운가를 묻는 강박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던 언어를 그 강박이 입을 막아 버린 것이다. 독창성을 향한 의식이 한 사람을 앞으로 떠밀 때 그것은 동력이 되지만 그 의식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스스로를 겨눌 때 그것은 가장 정교한 자물쇠가 된다.


그의 작품 세계는 그렇게 끝났다. 불이 사그라든 뒤에도 시벨리우스는 12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그 12년 동안 그는 이렇다 할 음악을 한 줄도 더 보태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8번이 머릿속에서 자라고 있다고 이따금 말했고 1948년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아이놀라에서는 침묵이 말을 한다고 했다. 그러다 1954년에 이르러서야 한 오랜 친구의 미망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곡은 끝내 완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처음으로 인정했다. 한 작곡가의 마지막 창작 행위가 새로운 곡을 써 올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쓴 곡을 지우는 일이었다는 것, 그의 작품 목록이 무언가의 완성이 아니라 무언가의 삭제로 닫혔다는 것. 거기에 이 이야기의 가장 쓸쓸한 대목이 있다.


1957년 9월 그가 아흔하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이튿날 그의 딸은 8번 교향곡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그 한 문장과 함께 8번은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침묵이 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뒤 그의 유고 더미에서 그 곡의 것으로 짐작되는 짧은 단편 몇 마디가 발견되어 연주되었으나 세상이 30년을 기다린 교향곡의 전모는 끝내 재가 된 채로 남았다. 그러나 그를 그토록 떨게 했던 시대의 평결은 그보다 오래가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형편없는 작곡가라던 소바카라자는 저자 본인의 손에 농담으로 정정되었고 조성은 끝났다던 선언도 한 시대의 유행으로 저물었다. 1984년 모더니즘의 본거지였던 다름슈타트의 여름 강좌에서 한 미국 작곡가는 급진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실은 보수주의자일 수 있고 보수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실은 급진주의자일 수 있다고 말하며 그 예로 시벨리우스의 5번 교향곡을 들었다. 정작 살아남은 것은 그가 불태운 적 없는 일곱 곡의 교향곡, 그가 새롭게 만들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었던 음악이다. 그가 끝내 지운 것은 새로워지려 한 단 하나의 곡이었고 끝내 남은 것은 그저 그 자신이었다.


브람스의 자물쇠는 23년 만에 풀렸고 시벨리우스의 자물쇠는 30년 동안 풀리지 않은 채 끝내 불이 되었다. 두 사람을 갈라놓은 것은 재능도 시대도 아니었다. 등 뒤의 거인을 끌어안기로 한 마음과 앞에서 다가오는 거인에게 자신을 심판할 권한을 넘겨준 마음, 그 한 끗의 방향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그 법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은 손 안의 화면이 매 순간 더 새롭고 더 독창적인 누군가를 들이민다. 한 줄을 쓰기도 전에 이미 세상 어딘가의 누군가가 더 멀리 가 있다는 감각, 그 감각이 첫 음 앞에서 손을 얼린다. 시벨리우스의 법정은 이제 모두의 바카라상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 법정을 닫을 열쇠가 바깥에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시벨리우스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새로운 어법이 아니라, 이미 자기 것이었던 어법을 새롭지 않다는 이유로 의심하지 않을 권리였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바꾸기 전에 무엇을 만들든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마음, 자물쇠는 거기서부터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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