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형으로 열린 자물쇠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by크로마

실패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실력이 미치지 못해서 오는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실력은 갖추었으나 여러 조건이 어긋나 겪는 실패다. 후자가 더 잔인한 까닭은 자기 존재를 의심하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성공을 노력에 뒤따라오는 것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예술에서는 특히 그렇다. 음악은 단순한 기예가 아니라 사람의 인식과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어서 그 가치를 객관적 척도로 가늠할 수 없고, 그래서 당대의 평가와 후대의 평가가 어긋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그날 홀에 있던 사람들의 판단이 곧 작품의 판단이 되고, 작품의 판단이 곧 쓴 사람의 판단이 된다.


창작자로서 자기를 의심하는 상태는 안개와 같아서 문질러 닦을 표면이 없다. 이러한 자기 의심에서 벗어나 다시 창작할 용기를 갖는 일은 단순한 결심이나 의지로 되지 않는다. 뒤에 볼 시벨리우스는 끝내 그 방에서 나오지 못했다.


성공이 성공을 낳는 일은 비교적 쉽다. 그러나 마음속에 생긴 이 병목을 뚫는 데는 다른 층위의 계기가 필요하다. 라흐마니노프는 그 병목을 뚫은 사람이다. 다만 그는 자기 문제에 스스로 매몰되어 있었고, 그를 꺼낸 것은 타인의 목소리였다.


1897년 3월 28일 저녁, 상트페테르부르크 귀족회관. 스물세 살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무대 뒤 계단에 앉아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홀에서는 그의 교향곡 1번이 초연되는 중이었다. 지휘봉을 쥔 사람은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였다. 리허설은 부족했고 글라주노프는 악보의 몇 대목을 임의로 손봤다. 지휘자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증언도 여럿 남아 있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홀을 빠져나왔다.


이 곡이 왜 하필 페테르부르크 무대에 올랐는지를 알려면 당시 러시아 음악계가 두 도시로 갈라져 있었다는 사실부터 짚어야 한다. 1894년 니콜라이 2세가 즉위한 뒤 러시아 예술은 훗날 은의 시대라 불릴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그 풍요는 두 수도에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모스크바는 차이콥스키의 유산 위에서 서구 낭만주의의 어법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 가던 도시였고 라흐마니노프가 자란 곳도 그곳이었다. 반면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발라키레프와 큐이를 비롯한 러시아 5인조와 그 후예들이 음악 권력을 쥐고 있었다. 그들은 민요와 교회 선법에서 길어 올린 순수한 러시아성을 음악의 정통으로 삼았고, 음악원 교육이 몸에 밴 서구식 어법을 러시아 음악의 타락으로 의심했다. 1890년대에 이르러 그 진영의 실권은 출판업자 미트로판 벨랴예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에게 넘어가 있었으나 모스크바를 향한 경계심까지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스물세 살 모스크바 작곡가의 교향곡이 페테르부르크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심사대에 오르는 일이었다. 그 무대를 마련한 사람이 벨랴예프였고, 이 곡을 프로그램에 넣도록 권한 사람은 타네예프와 글라주노프였다.


비평은 연주보다 잔인했다. 러시아 5인조의 일원으로 페테르부르크 악단에서 비평가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큐이는 지옥에 음악원이 있고 그곳의 재능 있는 학생에게 이집트의 재앙을 소재로 표제 교향곡을 쓰라는 과제를 준다면 이런 곡이 나왔을 것이며 그 학생은 과제를 훌륭히 완수해 지옥의 주민들을 만족시켰으리라고 썼다. 스물세 살 신인에게 이 한 줄의 무게는 단순한 혹평이 아니라 러시아 음악계의 공식 평결에 가까웠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리허설을 듣고 이 음악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라흐마니노프에게 직접 말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스승 세르게이 타네예프도 초연 전에 총보를 받아 보고는 선율이 힘없고 색채가 없다고 평했다.


타네예프의 한마디가 다른 어떤 비평보다 깊이 박힌 데는 이유가 있다. 라흐마니노프에게 타네예프는 한 번 스쳐 간 스승이 아니라 평생 자기 악보를 들고 찾아가게 될 기준점이었다. 차이콥스키의 제자이자 모스크바 음악원 원장을 지낸 그는 러시아의 바흐라 불릴 만큼 대위법에 몰두했고, 감정에서 곧바로 흘러나오는 음악 대신 구조에서 감정이 배어 나오는 음악을 옳다고 여겼다. 바흐와 서구 다성음악의 전통에서 출발해 엄격한 양식의 대위법을 이론으로 정리하는 데 이십 년을 쓴 사람이기도 하다. 라흐마니노프가 훗날 그를 두고 당대의 가장 박학한 음악가이자 음악 모스크바의 정점이라고 부른 것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 선율에 힘이 없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취향의 표명이 아니라 판정이었다.


그날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3년 동안 단 한 편의 대작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시벨리우스의 침묵과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있다. 시벨리우스가 악보에서도 무대에서도 사람들에게서도 스스로를 지워 갔던 것과 달리 라흐마니노프는 음악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모스크바 사설 오페라단의 부지휘자로 일했고,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계속 섰다. 작곡이라는 창조의 회로 하나만 끊어진 채 연주와 지휘라는 다른 회로로 음악과의 접촉을 근근이 이어 간 것이다. 자물쇠는 걸렸지만 그는 자물쇠가 달린 방을 떠나지는 않았다.


1900년 초, 지쳐 가는 그를 보다 못한 친척들이 한 사람에게 그를 보냈다. 니콜라이 달, 모스크바에서 개업한 신경과 의사였다. 1880년대 후반 파리 살페트리에르에서 샤르코 밑에 있으면서 최면요법을 배웠고 비올라를 켜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친척 한 사람이 이미 그에게 치료를 받은 뒤였다. 1900년 1월부터 넉 달 가까이 라흐마니노프는 매일 달의 진료실을 찾았다.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이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시절이라 달의 처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했다. 최면 상태에 가까운 반수면 속에서 라흐마니노프를 안락의자에 눕히고 같은 문장을 날마다 되풀이해 들려주었다. 당신은 협주곡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손은 수월하게 움직일 것이다, 그 곡은 훌륭할 것이다. 논리적 설득도, 트라우마의 해석도 아니었다. 그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귀에 미래형 문장을 매일 심어 넣은 것에 가까웠다.


그해 여름 라흐마니노프는 다시 오선지를 펼쳤다. 가을까지 협주곡의 2악장과 3악장을 완성했고 12월에는 그 두 악장만 먼저 모스크바 무대에 올렸다. 1악장은 이듬해 봄에 마쳤다. 1901년 11월, 자신이 직접 피아노를 맡아 전곡을 초연한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청중을 압도했다. 4년 전 그를 무너뜨렸던 평단도 이번에는 태도를 바꾸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악보 첫 장에 한 줄을 적어 넣었다. 니콜라이 달 씨에게. 자신을 다시 쓰게 만든 사람의 이름을 헌사로 새긴 것이다.


성공이 그를 무대로 되돌려 놓은 뒤에도 악보를 들고 찾아가는 곳은 달라지지 않았다. 새 작품을 쓸 때마다 라흐마니노프는 타네예프를 찾아갔다. 1915년 타네예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스물세 살에 자기 선율을 부정당한 그 사람에게 이십 년 가까이 악보를 들고 갔다. 마지막이 된 것은 무반주 합창을 위한 철야기도였다고 전해진다. 라흐마니노프는 대위법에 잘못된 곳이 있으면 고쳐 달라며 총보를 건넸고 타네예프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채 그것을 돌려주었다. 손댈 곳이 없다는 뜻이었다. 라흐마니노프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은 것은 타네예프의 음악이 아니라 타네예프의 기준이었고, 그 기준 위에 자기 서정을 올려놓기까지 이십 년이 걸린 셈이다.


브람스의 자물쇠는 그 자신이 21년을 견딘 끝에 스스로 열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자물쇠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논리로 반박하지 않았고 시간으로 견디지도 않았다. 대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방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확신을 대신 말해 주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논리로 반박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방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확신을 대신 말해 주도록 내버려 두었다. 창조를 가로막은 것이 자기 확신의 붕괴였다면 그것을 다시 세운 것도 결국 자기 자신이 아니라 곁에 있던 타인의 반복된 문장이었던 셈이다.


라흐마니노프가 달의 진료실에서 들은 것은 결국 미래형으로 말해진 자기 자신이었다. 당신은 쓸 것이다, 그 곡은 훌륭할 것이다. 자기 의심은 언제나 과거형과 현재형으로 말한다. 나는 실패했다, 나는 부족하다. 그 문법을 바꿔 준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라흐마니노프가 받은 치료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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