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육아 동지는 진리다 #2
Lee와 나는 드디어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첫 접선 장소는 아르바트 거리의 스타벅스 앞.
평소라면 로컬 카페를 택했겠지만, 이곳은 아르바트 거리 한가운데에 있어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가격도 현지 카페보다 비싼 편이었고, 러시아인들 사이에는 여전히 미국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 그럼에도 이곳은 외국인과 젊은이들로 늘 북적였고, 평일에도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시의 이 위치의 스타벅스는 그런 의미에서 꽤 예외적인 공간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하려 하면 시간 조절이 참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여차하면 늦을까 싶어 서두르다 보니 조금 일찍 도착했다.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아기띠 속 둘째를 추어 안으며 카페 앞을 서성였다. 정오의 모스크바 가을 햇살이 제법 눈이 부셨다. 시원하게 나뭇잎을 흔들던 바람은 이따금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흩트릴 만큼 제법 거세게 불어왔다. 손바닥을 눈썹 위로 들어 햇살을 가린 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애써 눌러 두었던 생각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지금…… 모르는 사람을 만나러 나온 거지?'
아이 물건을 선뜻 빌려준 호의는 정말 고마웠지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덜컥 만나려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두근두근.
이게 기대감인지, 두려움인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아…… 그냥 돌아갈까?'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유모차를 힘껏 밀며 바쁜 걸음으로 달려오다시피 하는 젊은 동양인 여성이 보였다. 나를 먼저 발견한 듯 속도를 높이며 거리를 좁혀왔다. 뒤로 질끈 묶은 그녀의 포니테일이 바람을 타고 크게 좌우로 흔들렸다.
'아, 저 사람이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기…… 혹시 아기 부스터……."
거리가 가까워지고 눈이 마주치자 내가 먼저 말끝을 흐리며 애매하게 웃었다.
"아…… 네, 맞아요. 안녕하세요?"
참으로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서로 번갈아 고개를 숙였다. 짧게 통성명을 나눈 뒤 우리는 함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일 때문에 만나는 것도 아니고, 소개팅처럼 특별한 목적이 있는 자리도 아니었기에 오는 내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오늘 나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얼마나 마음을 열어도 될지 선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모를 땐 그냥 감으로 간다!
평일 낮인데도 카페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둘러보니 마침 안쪽에 있는 소파 자리 하나가 비어 있었다. 아이가 잠들면 잠시 눕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어떤지 물어보자 Lee도 좋다고 대답했다. 함께 커피를 주문하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는 푹신했지만 나는 긴장한 탓에 엉덩이만 앞쪽에 살짝 걸친 채 앉아 있었다. 반면 그녀는 중간중간 유모차 안의 아기를 어르며 그럭저럭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날숨을 한번 "휴~" 하고 내쉬었다. 또다시 어색하게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눈이 마주치고는 애써 싱긋 웃어 보였다.
예의를 갖춘 어투로 최근 모스크바의 날씨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로 조심스레 대화를 시작했다. 다행히 어색한 공기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웃으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편에게서 들었던 모스크바 교민 슬롯 이야기와 그녀가 들려주는 근황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둘 맞아떨어졌다. 건너 건너 이어진 인연을 짚어 보니 교민 슬롯는 생각보다 훨씬 좁았다.
Lee는 주재원인 남편을 따라 벌써 몇 년째 모스크바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아이도 모스크바 현지 병원에서 출산했다고 하니, 이곳에서의 타향살이도 꽤 오래된 셈이었다. 두 돌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직접 돌보느라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보낸다는 말에 잠시 마음이 멈칫했다. 내 마음이 그녀에게 투사되었는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지 짐작이 갔다.
나 역시 한국에서 1년간 휴직하고 첫아이를 돌보던 시절, 가장 크게 느꼈던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었다. 육아 선배들은 새로운 생명을 돌보는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가 가장 충만하고 그리운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살아내는 동안만큼은 세상에서 한 발 비켜선 듯한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기도 한다.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오기 전까지 말할 상대라고는 옹알이밖에 하지 못하는 아이뿐이라, 혼자서 자문자답하며 스무고개를 넘어 백 고개까지 넘는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러던 중 그녀는 또래 아기가 있는 우리 가족이 가까운 곳으로 이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반가웠다고 했다.
그간의 사정을 들으며, 내가 품고 있던 뾰족한 경계심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사실 우리가 살던 곳은 한국으로 치면 광화문이나 인사동처럼 모스크바 도심 한가운데였다. 반면 대부분의 한인 가족들은 한국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남쪽 지역에 모여 살고 있었다. 이 동네에서 또래 아이를 키우는 한국인 엄마를 만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동네로 이사해 또래 부모와 가까워지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크고 작은 어려움이있었다. 하물며 이역만리타국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운이 좋았다.'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로 빠져들었다. 낯선 나라에서 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외로움, 아이가 아플 때 느끼는 긴장감, 언어가 수월하게 통하지 않는 곳에서 일상의 사소한 일부터 예기치 못한 일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막막함까지. 그녀는 자신이나 상황을 좋게 포장하지도 않았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었다.
'육아'와 '해외살이'라는 공통점만으로도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재밌게도 대화 중 뜻밖의 공통점도 발견했다. 한국에서 살던 지역을 언급하다 놀랍게도 그녀와 내 오빠가 고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 학교는 지금도 대로를 사이에 두고 친정집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나도 인근에 있는 여고를 졸업했으니 거의 같은 동네 주민이라 해도 무방했다.
세상이 이렇게나 좁다니!
역시 사람은 정직하게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잘 사는 것까진 몰라도 남에 눈에 눈물 나게는 절대 안 된다. 이 좁은 세상,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니까.
"저…… 그럼 ○○쇼핑센터 아세요?"
이어 그녀가 조심스레 꺼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곳은 재건축으로 사라진 지 이미 몇 년. 이제는 지도에서조차 흔적을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정말 그 동네에서 오래전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과거의 장소였다.
서울에서도 외곽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동네. 그녀는 나보다 서너 살 어렸기에 같은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매일 오가던 등굣길과 하굣길의 풍경, 자주 들르던 분식집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의 기억이 군데군데 겹쳐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장님이 유난히 친절했고, 단 하나의 흠이라면 오픈 시간이 늘 들쭉날쭉했던 한 분식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은 구수한 국물 떡볶이에 바삭한 튀김만두를 곁들여 먹던 곳. 나의 '최애 분식집' 위치를 정확히 짚어내는 그녀의 말에, 군침을 삼키는 동시에 밀려드는 반가움을 느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정신 차려! 어떤 감언이설에도 쉽게 넘어가면 안 돼…….' 하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결국 먹을 이야기 하나에 대동단결하고 말았다. 벌써 마음속은 넘어갔다. 갔어. 나란 사람의 얄팍한 의지력이란....
원래 학연도 지연도 챙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가장 낭만 가득했던 시절의 기억을 함께 나누는 데는 도무지 장사가 없었다. 변두리 그 작은 동네에서 함께 스쳐 지나간 풍경과 추억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모스크바에서 우리를 이어 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낯선 사람들도 때로는 기억으로 연결될 수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발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쇼핑센터 지하의 무제한 리필이 가능했던 돈가스집 이야기가 나오자, 우리는 둘 다 흥분한 나머지 기억을 쏟아내느라 의도치 않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금도 거기 돈가스집 맛을 따라가는 데를 못 찾았어요. 너무 아쉬워요."
"그렇죠? 에스컬레이터 내려오면 바로 옆에 있던 집이요. 사장님 인심이 얼마나 후하셨는지. 머리는 짧으시고 목소리는 걸걸하셨잖아요. 학생들만 오면 '먹고, 부족하면 또 먹어!' 하시던. 그 목소리가 그립네요. 여장부셨는데, 애들이 그렇게 먹어대도 리필 눈치 한 번 안 주시고……."
"맞아요! 맞아요! 그 돈가스 소스도 그렇고 크림수프도 진짜 맛있었잖아요."
순간 우리는 처음 만난 사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오래된 동네 친구처럼 추억 속 단골 식당 이름을 하나씩 꺼내며 한참을 웃었다. 기억이 가물거리면 서로 아는 기억을 힌트 삼아 "거기 맞지요?" 하며 맞춰 보기도 하고, 단어가 혀끝에 걸려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면 발을 동동 구르며 난데없는 '추억은 방울방울' 퀴즈타임을 이어갔다. 그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흥분하며 웃을 만한 이야기들이었다.
한참을 웃고 나서야 내가 말했다.
"나중에 한국에 가면 제가 꼭 비슷한 돈가스 사드릴게요."
농담처럼 던진 말에 그녀도 "좋아요." 하며 환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현재 그녀의 모스크바 삶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해외 생활에 대한 자그마한 호기심 하나로,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덜컥 모스크바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낯선 타국에서 홀로 아이를 기르며 견뎌온 시간들이 결코 가벼웠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낯선 풍경 속에서 소소한 다정함을 찾아내며 자신만의 속도로 적응해 간 그녀가 유난히 씩씩해 보였다.
우리는 모스크바가 준 기쁨과 그늘, 그리고 문득문득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던 순간들까지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서로 다른 궤적을 그리던 두 개의 원이 하나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유쾌한 교집합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도 왠지 지금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괜히 제 발이 저린 사람처럼, 그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마음을 조심스레 꺼냈다.
"사실 만나기 전에는 많이 망설였어요. 왜 그렇게 몇 번이나 돌려가며 거절하는데도 계속 도와주시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무슨 의도로 그러시는지 제 입장에서는 잘 모르겠고요"
어쩌면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었다.
"맞아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왜 그렇게까지 도와드리고 싶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마침 여유분이 있었고, 아이 일이라 지나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녀는 다 안다는 듯 시원하게 웃으며 내 고백을 담담히 받아주었다. 그 웃음 덕분이었을까. 그제야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던 미안함과 경계심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더 이상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첫 만남을 계기로 우리는 2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만났다. 서로 돌봐야 할 아이도 있었고 각자의 생활도 있으니, 그 정도가 딱 좋은 거리였다. 대신 Lee는 종종 메시지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모스크바 생활의 정보와 팁을 아낌없이 보내주었다. 어디에서 장을 보면 좋은지, 아이와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현지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신생아도 먹을 수 있는 시럽약이 무엇인지도 상세히 알려주었다. 낯선 나라에서 조금이라도 덜 헤매는 방법들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이후 내게 소중한 인연이 되었던 또 다른 한국인 육아 동지와 가사도우미 '카티야'를 소개해 준 것도 그녀였다.
우리는 만나면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사소한 남편 흉을 보며 웃기도 했고, 옹알이하는 아이와 도돌이표 같은 대화만 반복하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힘껏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 같은 엄마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려움과 외로움을 나누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편이 되어갔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모스크바에서의 생활은 훨씬 더 외롭고 막막했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짧은 휴가를 계획했을 때도 그녀는 터키 여행을 적극 추천해 주었고, 괜한데 돈 쓰지 말라며 수영복을 비롯해 휴양지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선뜻 빌려주었다.
그리고 그 고마운 인연은 그녀의 가족이 잠시 한국으로 귀국한 시점에서 다시 이어졌다. 비록 차로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에 살게 되었지만, 우리는 시간을 맞춰 만나 한 번씩 아이들의 옷과 신발을 물려주고, 모스크바에서 함께했던 추억을 꺼내며 한참을 웃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첫 만남에서 했던 약속도 지켰다. 재건축으로 사라진 바로 그 돈가스집은 아니었지만, 동네 근처의 돈가스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모스크바뿐만 아니라 서로가 기억하는 학창 시절의 그리움을 나누었다.
그녀는 지금 또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가족과 함께 다시 낯선 땅으로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가끔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참 장한 엄마!
사람들은 흔히 주재원 가족의 삶을 화려하고 낭만적인 풍경으로만 그려내곤 한다. 물론 저마다의 사정이나 여건은 다르겠지만, 친숙한 가족과 친구들을 뒤로한 채 타국에서 부모의 이름을 달고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용기와 단단한 마음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마음 깊이 응원하게 된다.
어디를 가든 먼저 손을 내밀어 낯선 이를 이웃으로 만드는 사람.
누군가의 어려움을 먼저 알아채고 기꺼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주는 사람.
아마 지금도, 처음 모스크바에서 나를 맞아주었던 그날처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 않을까.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문득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곁에 있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그녀의 삶이 앞으로도 그렇게 오래도록 다정하게 반짝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