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 따뜻한 꿀차 한 잔의 여유

모스크바에서 배운 달콤한 생존 전략

by봄날의 곰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요즘은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도 잠시, 어느새 대화는 밑도 끝도 없이 건강 이슈로 흘러간다. 누구 하나가 허리디스크로 병원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말로 운을 떼면, 기다렸다는 듯 너나 할 것 없이 누구는 만성 위염, 누구는 고혈압이나 고지혈증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경쟁하듯 풀어놓는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럴 때 보면 대한민국의 중장년층 대다수는 참, 겉만 멀쩡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서로의 투병일지를 듣다 보면 어느새 측은지심이 담긴 안타까운 눈빛이 오간다. 대화 말미에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 같은(?) 위로를 목청 높여 주고받는다. 아이고야...



소화기내과나 정형외과, 하다못해 한의원이라도 꾸준히 다니지 않는 이가 드물 정도다. 집 앞 상가마다 병원이 빼곡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오래 사는 것과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예전에도 야근을 하거나 과음등으로 '힘들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긴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몸이 확연하게 달라졌음을 특히 출산 후 육아를 시작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자고 일어나면 개운한 게 아니라 몸이 더 쑤셨다. 이제는 매일 아침, 종합비타민을 비롯해 오메가 3 같은 영양제를 챙기는 건 유난해서가 아니라 그저 살려는 몸부림이었다.



우리 집 약 선반도 증세를 완화하기 위해 하나둘 사들인 약병들로 어느새 간이약국을 방불케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비타민 몇 알을 삼키다가도 각종 약들로 빼곡히 채워진 선반에 시선이 머물면, 명품 컬렉터는커녕 골골거리는 영양제 컬렉터가 된 것 같아 문득 씁쓸한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도 이럴진대 외국에 살다 보면 병원에 덜 가기 위해서라도 건강 유지에 더 신경을 썼다. 일단 병원 접근성이 한국만큼 좋지 않은 데다 언어 장벽 때문에 속 시원하게 증상을 설명하기도 어렵고, 진료비 역시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한창 손 많이 가는 어린아이들까지 있으니 몸살이 났다고 하루 이틀 편히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나 몰라라 반나절만 드러누워도 집안꼴이 눈뜨고 보기 어려워졌다.


결국 살기 위해서는 몸에 좋다고 알려진 것들을 미리미리 챙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그것은 건강관리라기보다 해외 생활을 근근이 버텨내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겼다.


'러시아에서는 무얼 먹으면 좋을까?'



대부분의 나라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저마다의 보양식이 있다. 러시아 역시 조금만 찾아보면 시베리아산 녹용이나 차가버섯처럼 유명한 건강식품이 꽤 많았다. 특히 차가버섯은 말린 버섯뿐 아니라 가루 형태로 간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가공 제품도 여럿 있었다.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어 우리도 한국으로 귀국할 때 챙겨서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선물했는데, 특히 어르신들 반응이 무척 좋았다.



그런데 정작 우리 가족이 현지에서 가장 애용한 건강식품은 따로 있었다. 나는 복잡한 건 딱 질색이다. 뭐든 쉽고 꾸준히 할 수 있어야 오래가는 법. 그래서 선택의 기준도 아주 단순했다. 특별할 것 하나 없고 호불호도 거의 없는 데다 매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그것. 과연 정체는… 두구두구~~.



러시아산 꿀이었다!






모스크바가 늦가을로 접어들어 아침저녁으로 찬 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한국의 홍삼처럼 효과가 좋으면서도 아이들도 함께 먹을 수 있는 건강식품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차였다.


감기가 돌림병처럼 온 가족을 번갈아 찾아오자 남편은 회사 현지 직원들에게 추천을 받았다며 꿀을 꾸준히 먹어 보자고 했다. 러시아 꿀은 시베리아와 알타이산맥 등 청정지역에서 채밀하여 품질이 좋기로 유명했다. 현지에서는 차에 넣어 마시거나 빵에 곁들여 먹는 등 일상에서 흔히 즐기는 식재료이자 건강보조식품이었다.


흔히 러시아 여행 시 구입하는 기념품이라고 하면 '알룐카 초콜릿'이나 '마트료시카', '털모자'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러시아를 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꿀도 빠지지 않는 인기 품목이었다. 맛은 기본이요.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 부담도 크지 않다는 이유도 한 몫했을 것이다. 당시 환율 기준으로 가장 기본적인 천연 꿀은 1kg에 만 원 정도였으니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편이었다.



종류도 다양하여 은은한 꽃향이 매력적인 린든꿀은 특히 호흡기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다. 크림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크림꿀 역시 빵에 발라먹기도 좋았다.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독특한 식감으로 인기가 많다고 했다. 하지만 멋모르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가 아무도 입에 대지 않으면 결국 전부 엄마인 내 차지가 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잘못하면 의도치 않은 벌칙 게임을 당할 수 있으니 결국 실패할 확률이 가장 낮은 무난한 야생화 꿀을 선택했다.


시내 슈퍼마켓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꿀을 쉽게 살 수 있었지만, 꿀의 매력에 푹 빠진 우리는 꿀만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통시장에서 구입하곤 했다. 왠지 된장도 마트에서 판매하는 제품보다 시골 장터에서 손수 담갔다고 하면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심리랄까.



모스크바에서는 8월이면 콜로멘스코예 공원에서 대규모 꿀 축제가 열렸고, 전통시장으로 유명한 다닐롭스키 시장에도 꿀 전문 매장이 여럿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꿀을 직접 맛본 뒤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어 현지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재래시장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시식 아니겠는가. 상인이 얇은 나무 막대에 꿀을 살짝 묻혀 하나씩 건네주면 신중하게 맛보기를 몇 번. 그러다 나중에는 사려고 먹는 건지, 배를 채우려고 계속 먹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어떤 꿀은 꽃향이 은은하게 퍼졌고, 어떤 꿀은 묵직한 단맛이 오래 남았다. 몇 가지를 번갈아 맛보다 보니 어느새 미각은 둔해졌지만 마음은 이미 지갑을 열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꿀을 고르고 용량을 선택하면 남자 성인 손바닥만 한 일회용 반찬통에 가득 담아 주었다. 얇은 플라스틱통은 가져가다 잘못 부딪히면 금세 금이 갈 것처럼 부실해 보여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운 황금빛 꿀만큼은 오묘한 빛을 뽐내며 왠지 든든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밖으로 흐른 데가 없는지 확인한 뒤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통 안에는 황금빛 꿀이 윤기를 뽐내며 찰랑이고 있었다. 나무 숟가락으로 푹 떠 올리면 가느다란 꿀실이 좀처럼 끊어지지 않고 길게 늘어졌다. 수분 함량이 비교적 낮고 잘 숙성된 꿀일수록 이런 모습이란다.



맛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하면서도 지나치게 달지 않았고, 입안에 오래 남는 은은한 향긋함이 참 좋았다. 큰 아이도 같이 먹을 수 있고 전반적인 면역 증진에도 좋다니, 벌써 일석 몇 조인 지. 무엇보다 늘 빠듯한 생활비를 쪼개 써야 하는 우리에게 더없이 마음에 드는 가성비 아이템이었다.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우리 집 주방 싱크대 한쪽에는 늘 꿀통이 놓여 있었다. 매일 먹던 꿀이 어느새 줄어들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괜히 불안해질 정도였다. 금단증상인가. 날이 갈수록 꿀 사랑은 그야말로 못 말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겨울이 깊어질수록 꿀은 온갖 반찬에도, 따뜻한 차에도 녹아들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러시아 사람들도 추운 날씨에 감기 기운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차에 꿀을 넣어 마신다고 들었다. 우리 가족도 어느새 그들의 겨울을 조금씩 닮아 가고 있었다.






이쯤 되면 모스크바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궁금해하는 분도 계실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미리 걱정했던 만큼은 아니었다. 흔히 떠올리는 시베리아처럼 극한의 한파가 이어지는 지역이 아닌 데다 러시아 서부, 유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시라 그런지 예상보다 온화한 날도 적지 않았다.

마침 우리가 지냈던 해에는 이상 기온까지 겹쳤다. 한국의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하며 안부를 전하다 보면 오히려 한국이 더 추운 날도 있었다. 한국이 영하 10도 밑으로 내려간 날, 모스크바는 영하 5도 안팎에 머문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겨울이 만만한 동네라는 뜻은 아니었다.



워낙 러시아는 영토가 넓은 데다 한 번씩 무섭게 쏟아지는 폭설과 몰아치는 눈보라, 그리고 칼바람까지 겹치는 날이면 추위가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괜히 겨울왕국이라는 타이틀이 붙진 않았겠지. 남편 회사의 현지 직원 가운데 한 명은 원래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이었는데, 겨울마다 불어오는 차갑고 습한 바람을 견디지 못해 비교적 따뜻한 모스크바로 이주했다고 했다. 겨울에 익숙한 러시아 사람들에게도 결코 만만한 계절은 아닌 모양이었다.



11월에 접어들면 모스크바의 하늘은 오후 4시만 되어도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큰아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돌아오는 길이면 해가 순식간에 어둡게 저물었다. 때맞춰 도시의 가로등이 일제히 켜지는 풍경은 몽환적으로 아름다웠지만, 한편으로는 낯설기도 했다. 아직 한창 생활할 시간인데도 온 도시가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라."며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그렇게 짧은 하루를 마무리하고 저녁을 먹은 뒤, 가족 모두 샤워를 마치고 둘러앉는 시간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따뜻한 꿀차를 한 잔씩 마셨다.



유치원에서 점심마다 차를 마시는 문화에 익숙해진 큰아이도 밤이 되면 옆에서 몇 모금 맛보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자기 머그잔을 따로 요구하곤 했다. 쪼그만 애기가 저도 사람이라고, 제 몫은 꼭 챙기려는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아직 돌이 지나지 않아 먹지도 못하고 옆에서 쳐다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는 둘째에게는 속으로 살짝 미안했다.

(**꿀은 드물게 보툴리누스균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어 돌 이전의 영아에게는 먹이지 않는 것이 권장된다.**)


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겨울밤, 따뜻한 꿀차와 함께 그날 하루를 조곤조곤 이야기하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느꼈던 으스스한 한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곤 했다. 간접등이 은은한 주황빛으로 거실을 물들이고, 뜨거운 찻잔을 후후 불어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은 그 어떤 보약보다 내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의 지혜를 터득하며 살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그 달콤한 습관은 아이들이 훌쩍 자라 학교에 다니게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우리는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짧은 가족회의를 겸해 함께 차를 마신다. 물론 민주적인 회의를 표방하지만, 자칫하면 엄마 아빠의 잔소리 시간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라 부부가 서로 입단속을 하느라 바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모두 하던 일과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려 한다.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나누고, 아빠의 아재 개그에 몸서리를 치며 웃기도 한다. 다음 주 각자의 중요한 일정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응원한다.


마지막으로 운동경기 전 팀워크를 다지듯 손을 포개 모은 뒤 "하나, 둘, 셋, 넷, 파이팅!"을 외치고 나면, 각자의 공간으로 흩어진다.

별것 아닌 시간이지만, 그 짧은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다음 한 주를 맞이할 힘이 생긴다.



예전에 우연히 방문했던 한 찻집 사장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아이들과 꼭 차 마시는 시간을 가지세요.
티타임에는 서로의 눈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거든요."


아이들이 자라고, 나 역시 부모로 살아가다 보니 그 말의 의미를 종종 떠올리게 되었다. 한 공간에 함께 있어도 애쓰지 않으면 각자의 시간 속으로 그저 바쁘게 흘러가 버릴 수 있다는 것을. 함께 차를 마신다는 것은 단순히 따뜻한 음료를 나누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하루를 들어주며, 시답잖은 농담에 핀잔을 곁들여 함께 웃는 시간이었다.

'가족이라는 의미'를 한 번씩 되새기는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모스크바에서 우리가 배운 가장 소박하면서도 값진 생존 전략이었다.

낯선 나라에서는 이상하리만큼 가족에게 더 기대게 된다. 익숙한 언어도, 오래된 친구도 없는 곳에서 결국 가장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스크바에서 시작된 소박한 티타임은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우리 집만의 소중한 전통으로 남아 있다.



가족의 전통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일주일에 한 번 20분 남짓 함께 둘러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

우리만의 방식으로 오래도록 이어 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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