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스크바 우렁각시를 기억하며
아이를 돌보는 일과 관련해 끊임없이 회자되는 말이 있다.
“밭일을 할래, 애를 볼래? 물으면 차라리 밭일이 낫다.”
흠, 육아의 고단함을 꿰뚫는 명언이다.
결과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순간순간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일. 아이를 키운다는 건 좀처럼 녹록지 않다. 오늘 내가 건넨 말 한마디와 사소한 행동 하나가 아이의 마음에 어떤 씨앗으로 심길지, 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싹을 틔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마음을 다해 돌보고 가르치며 하루하루를 쌓아가야 했다.
'자식농사'라는 말이 왜 있겠는가.
오늘 씨를 뿌려 내일 당장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 못하듯, 아이를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게 청소는 육아만큼이나 티가 나지 않으면서도 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요리나 세탁, 아이를 먹이고 씻기는 일은 한 번 미루면 다음번에 감당해야 할 부담이 곱절로 늘어났다. 하지만 청소는 조금 결이 달랐다. 애써 치워 놓아도 돌아서면 금세 어질러지니,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돌림노래 같았다. 그렇다고 마냥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당장 하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청소는 어느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우선순위의 뒤편으로 밀려나곤 했다.
물론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하면, 가사 노동쯤은 틈틈이 하면 되지 않느냐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장담하건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육아나 집안일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거나, 아니면 이미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초고수로 짐작된다.
만약 후자라면...
부디, 나를 제자로 받아달라 청하고 싶다.
당시 우리가 살던 모스크바의 숙소는 방 두 개와 거실, 화장실 두 개, 작은 부엌이 있는 구조였다. 어린아이 둘을 돌보며 이 공간을 매일 청결하게 유지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한 번 손을 놓으면 집은 금세 엉망이 되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싶다가도, 어느새 지저분해진 공간을 바라보는 내 마음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아.... 해도 스트레스 안 해도 스트레스!!!
모스크바로 넘어오면서 그간 애써 버텨온 몸은 여기저기서 고장 신호를 보냈다. 어깨와 목, 허리 통증은 이미 만성이었고, 힘들어도 푹 쉴 수 없으니 이어지는 몸살은 예정된 덤이었다. 초반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상비약으로 근근이 버텨보았지만, 이마저도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이러한 고민을 털어놓자 주변의 한국인 지인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몇 시간이라도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러시아는 한국보다 가사도우미의 시급이 낮은 편이라 부담이 덜할 것이라는 귀띔도 덧붙였다. 순간 솔깃했지만 신원도 잘 모르는 외국인 도우미를 고용한다는 게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큰아이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유행성 감기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상황은 결정타를 맞았다.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결국 육체의 고단함이 막연한 불안을 압도해 버렸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것보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을 수습하는 일이 급했다. 그렇게 나는 마음속 경계심을 잠시 내려놓고, 부랴부랴 알음알음으로 현지인 도우미를 소개받았다.
다행히 애써 사람을 구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일을 제대로 맡길 수 있을지 걱정도 따랐다. 언어 소통 문제도 있거니와, 괜히 잘 모르는 사람을 들였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은 염려 때문이었다. 하여간 사서 하는 걱정은 내가 일등이었다.
이럴 때 보면 '앓느니 죽지'라는 말이 정말 딱 맞았다.
하지만 아예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업체를 통해 큰 맘먹고 가사도우미를 불렀다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속이 상했다는 주변 이들의 경험담을 심심치 않게 들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교통사고 같은 거였다. 사전 예방 노력도 필요하지만, 조심한다고 어찌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저 제발~! 좋은 사람이 와주기를 마음속으로 거듭 빌고 또 빌었다.
그 기도의 끝에서, 우리는 가사도우미 '카티야'를 만나게 되었다.
두근두근, 그녀를 만나는 첫날이 되었다.
소개팅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분주해서 아이들을 챙기면서도 시계를 몇 번씩 확인했다.
약속된 출근 시간은 오전 9시. 예정 시간 5분 전인 8시 55분쯤 카티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벨을 눌렀는데도 응답이 없다며 공동현관 앞이니 문을 열어달라는 내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집 안에서 편하게 열어주어야 했지만, 당시 우리 집 인터폰은 먹통이었다. 입주할 때부터 고쳐준다고 했으나 끝내 약속을 지키지 않던 집주인에 대한 원망을 입 안으로 삼키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같이 나가겠다고 트월킹을 추듯 보채는 내복 바람의 큰 아이도 어쩔 수 없이 번쩍 안아 들고 서둘러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공동현관문을 열자 차가운 바깥공기 탓인지 코끝이 빨갛게 물든 이국적인 외모의 여성이 서 있었다. 회색 비니를 쓰고 수가 놓인 스카프를 멋스럽게 두른 채, 다갈색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인상적인 카티야가 긴장한 듯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일단 휴대폰 번역기를 켜고 미리 준비한 문장을 보여주었다.
'반가워요. 인터폰이 고장 났어요. 앞으로도 출근하면 전화를 걸어주세요. 바로 내려올게요.'
카티야는 알겠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를 집 안으로 안내하는 동안에도, 카티야는 내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눈으로 계속 나의 움직임을 쫓았다.
집에 들어온 카티야는 집안을 간단히 둘러본 후 화장실로 가 편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집에 있는 세제와 청소 도구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뒤 꼼꼼히 확인하기 시작했다. 용도별로 추가 구매가 필요한 물품은 나중에 문자로 적어 보내주기로 했다. 그 모습이 제법 능숙해 보여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녀는 아담한 집 안을 좀 더 구석구석 살펴본 뒤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무슨 뜻인지 몰라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첫날이라 4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했다.
사실 전날 문자로 조율한 조건은 주 1회, 최대 세 시간 근무였다. 그 순간 러시아에서 한국 사람들은 현지 시세를 잘 몰라 종종 '호갱' 취급을 받는다는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괜한 의심일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서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경계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미묘하게 내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눈치챘는지 카티야는 서둘러 휴대폰에 메시지를 작성했다.
"오늘은 첫날이라 손이 많이 가는 창문과 창틀부터 다 닦아야 해서 그래요. 다음 주부터는 세 시간 시급만 준비해 주세요."
그녀는 번역된 메시지를 내밀며 차분하게 나를 설득했다.
'처음부터 자꾸 변수가 생기면 곤란한데. 어쩌지...'
이미 온 사람을 바로 돌려보낼 수도 없어 난감했다. 잠시 고민하다 마침 큰아이 등원 시간이 다가오기도 했고, 더 실랑이를 벌일 시간도 없어 일단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집을 나섰다.
마음속으로 '난 한국산 호구 따위는 되지 않겠어!'라고 단단히 다짐했다.
큰아이를 등원시키고 근처 마트에서 그녀가 알려준 청소용 세제를 사서 돌아와 보니, 어느덧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어머! 변변한 청소 도구조차 없던 집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쾌적한 공기가 온 집안에 감돌았다.
카티야는 의자까지 동원했는지, 늘 뿌옇던 높은 곳의 바깥 창문은 물론 손이 잘 닿지 않던 주방 후드와 부엌 선반 위까지 먼지를 말끔히 털어내고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다.
아…… 저 창문 유리가 원래 이런 색깔이었구나.
평소 집안일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자평하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녀는 내가 돌아온 뒤에도 바닥을 닦고 침대 시트를 정돈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약속된 4시간을 빈틈없이 채워 자신의 말을 지키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까지 '혹시 돈을 더 받아내려는 속셈이 아닐까' 의심했던 내 자신이 못내 부끄러워졌다.
그날 이후 매주 수요일 오전 8시 55분이 되면 그녀는 어김없이 우리 집 공동현관 앞에 서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시간 개념이 느슨해 지각을 밥 먹듯 하는 가사도우미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하지만 카티야는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다. 한결같이 약속한 시간을 지키는 그 우직한 성실함이 새삼 놀라웠다. 심지어 그녀를 소개해 준 한국인 지인조차 카티야는 가사도우미 중에서도 유니콘 같은 존재라고 했다.
카티야는 키르기스스탄 출신이었지만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대화를 나눌수록 매우 영민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구글 번역기에 의지해 조금씩 서로의 삶을 엿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여덟 해 전 일자리를 찾아 온 가족이 모스크바로 이주했다고 했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가사도우미 일을 배워 시작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오랜 타향살이가 쉽지 않았을 텐데도 그녀는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단단한 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고향이 그립긴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대화 말미에 카티야는 얼마 전 일하던 러시아 가정에서 갑자기 사정이 생겨 하루아침에 해고되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녀는 일자리가 안정적이지 않아 힘든 부분도 있지만 가족이 함께하고 있으니 지금은 괜찮다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언젠가 카티야가 자신의 아이들이라며 수줍게 보여주었던 사진이 떠올랐다. 작은 휴대폰 액정 화면 속,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매가 어깨동무를 하고 겨울 털모자를 푹 눌러쓴 채 커다란 트리 앞에 서 있었다. 장난기 가득한 커다란 눈과 선한 눈매가 엄마를 꼭 빼닮았다.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과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이것이 결국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겠구나 싶었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 엄마의 마음은 어찌 그리 닮았을까. 그 성실함의 바탕에는, 결국 가족을 향한 헌신과 애틋한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마다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늘 허덕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한 번씩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곤 했다.
“곧 이 시간도 다 지나가요.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자라더라고요.”
마치 친정 언니처럼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숨 가빠하는 나를 한 번씩 다정하게 토닥여 주었다.
늘 의젓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기에, 나는 당연히 그녀가 나보다 연상일 것이라 막연히 짐작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그녀보다 세 살이나 많았다. 내 나이를 듣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아시아 여성은 동안이라 놀랍다는 카티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깊이는 살아온 세월의 길이로만 재단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카티야는 참 속이 깊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가는 태도가 강인했다.
한 번은 내 사정으로 두 시간 정도 추가 근무를 부탁한 적이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겹칠 것 같아 내 것을 사면서 그녀 몫의 모차렐라 샌드위치도 함께 챙겼다.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둘만 있는 공간에서 혼자 점심을 먹는 것이 내 기준에는 왠지 얌체같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따뜻하게 끓인 홍차와 함께 샌드위치를 접시에 담아 건네자, 카티야는 뜻밖의 호의에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이내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 후로도 카티야는 종종 그때 먹었던 모차렐라 샌드위치가 러시아에 온 이후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었다며 거듭 고마움을 전해 왔다. 작은 호의조차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할 줄 아는 그녀의 담백한 태도 덕분에, 우리는 서로를 조금씩 더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어느덧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결정되어 이별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카티야 입장에서는 또 하나의 일자리를 잃게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내 우려와 달리 그녀는 서운한 기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품에 꼭 안아주며 보고 싶을 거라고, 너희 가족을 만나서 정말 기뻤다는 말과 함께 앞날에 늘 행운이 따르기를 축복해 주었다.
이별 앞에서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이 입었던 옷과 내복, 생활용품들을 보여주며 필요한 게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혹여 쓰던 물건을 준다는 것을 불쾌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했지만, 그녀는 너무나 기뻐하며 주변 조카들에게 주면 딱 좋겠다고 환하게 웃었다.
우리가 공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카티야는 마지막 집 정리를 돕고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우리 집을 찾았다. 평소처럼 마중 나온 나와 아이들을 한 번씩 꼭 안아주며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메고 온 가방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천에 소중하게 싸인 작은 꾸러미를 자세히 보니, 가벼운 접시 위에 옛날 우리네 도시락을 싸듯 보자기로 단단히 묶은 것이었다. 집에서 아침 일찍 직접 구웠다는 따뜻한 야채 빵이었다. 갓 구워져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여전히 따끈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공항에서 기다릴 때 배고플 것 같아 가져왔다며 가면서 먹으라는 그녀의 말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하아..... 진짜 안 울려고 했는데……
보자기에 싸인 빵에 담긴 소박하고도 깊은 정성을 마주하자, 뜨거운 감정이 갑자기 목구멍을 꽉 막아 왔다. 애써 붙들고 있던 눈물은 고장 난 제어 장치처럼 속절없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한참 동안 돌아서지 못한 채 그저 부엌 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살면서 아무리 이별을 반복해도 좋은 인연 앞에서는 늘 속수무바카라이다. 뭐라도 주고 싶어 이른 아침부터 빵을 구우며 분주했을 그녀의 다정한 마음씀씀이가 아직 식지 않은 빵의 온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도, 그녀도 시선을 여기저기로 피하며 촉촉해진 눈가를 애써 손가락으로 훔치다, 이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카티야는 마루를 닦고 쓰레기를 비우며 남은 일을 마무리했다. 처음 왔을 때처럼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외투를 여민 그녀는 현관문 앞에서 떠날 채비를 마쳤다.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가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다시 돌아와 나와 아이들을 차례로 꼭 안아 주었다.
늘 그녀에게서 나던, 향신료를 떠올리게 하는 독특한 체향이 그날따라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문득문득 카티야와 나누었던 짧지만 다정한 인연이 떠오른다.
그녀가 없었다면 나의 러시아 생활은 훨씬 더 고되고 버거웠을 것이다. 큰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왔을 때 마주하던 정돈된 방과 집 안에 감돌던 상쾌한 공기는, 앞으로의 일주일을 버텨 낼 힘이 되어 주곤 했다. 아이가 아파 함께 동네 병원에 다녀오던 날, 걱정스러운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내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던 손길이 참 따뜻했다.
지금 어디에 있든 그녀와 그녀의 선한 가족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내가 그러하듯 그녀 역시 수요일 아침 8시 55분의 우리를 떠올려 주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