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너무 예뻤다!!

러시아 미녀에게 마음을 빼앗기던 날

by봄날의 곰

"우와... 진짜 예쁘다."


오늘도 주바카라맞게 길을 걷다 말고 또 나 혼자 호들갑이다. 눈이 호강한다는 말이 이런 걸까.


예전 인기리에 방영된 한국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초반을 보면, 실연당한 남자 주인공에게 동료가 위로하며 곧 가게 될 파병지인 '우르크'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르크에 가면 미인이 많답니다. 밭 매는 김태희, 포도 따는 씨스타."


그 장면을 보며 나는 '풋!' 하고 웃어넘겼다.

역시 드라마구만. 그런 곳이 현실에 있을 리 없잖아.

그런데 웬걸, 그 상상 속 '우르크'가 내 눈앞에도 펼쳐져 있었다.

바로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말이다.


애석하게도 증빙할 만한 연구 결과는 없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스크바에는 미인이 많다.



단순히 얼굴이 예쁜 정도가 아니었다. 조막만 한 얼굴에 늘씬한 비율까지 갖춘 바비인형을 연상케 하는 여성들이 너무도 태연히 집 앞 대로를 활보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 근처가 시내 중심이라 그런가. 길거리나 식당을 가다 보면 절로 시선이 머무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나의 이러한 의견에 남편도 격하게 공감했다.


남편은 우리가 모스크바에 오기 전, 휴일에 동료들과 붉은 광장에 놀러 갔다가 적잖은 문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평범해 보이는 한 남성이 눈부신 미녀 두 명을 양팔에 끼고 데이트라도 하듯 유유히 걷는 모습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세 사람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적어도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지 않냐며, 남편은 마치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들려주듯 열심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런데 듣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뭐야, 부러웠다는 말인가?


어느 나라나 그렇겠지만, 특히 러시아에서는 젊은 미혼 여성들은 외모를 가꾸는 데 무척 공을 들인다고 한다. 몇 달 동안 월급을 모아 자신에게 어울리는 명품 가방이나 고급 화장품을 사고, 헤어와 메이크업, 패션까지 자신을 꾸미는 데 아낌없이 투자하는 경우도 많다. 물론 그 노력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현지 사람들 말로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봉인됐던 본모습이 하나둘 등장한다고들 한다. 생각해 보니 길을 걷다 보면 간혹 보이는 여신들 사이에 유독 인간미가 넘치는, 나와 유사한 외형의 여성들이 훨씬 많았다.


당연하다. 이토록 맛있고 달콤한 디저트가 베이커리에 즐비한 곳인데, 평생을 어찌 참을 수 있겠나.


결국 '기한한정 다이어트'인 셈인가. 역시 인간미가 있다.

괜히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 결국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해.'


... 아니, 이걸 왜 내가 위로받고 있는 거지.

의문의 1패였다.





하지만 유독 러시아 여성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건 비단 외모뿐이 아니었다. 그녀들에게는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는 신비한 분위기와, 그 시선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있었다. 몸속에 타고난 모델 DNA라도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 번은 온 가족이 크렘린 궁 근처를 산바카라하다가 남편이 나를 툭 치며 말했다.


"와! 저기 봐. 애들도 포즈가 완전 프로급인데?"


고개를 돌려 보니 한 가족이 고풍스러운 붉은색의 성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부모 앞에선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자매의 포즈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 손은 허리에 올리고, 다리는 사선으로 교차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인 모습이 마치 화보 속 모델 같았다. 대체 어느 아동복 모델 출신인지 묻고 싶을 정도였다.


요즘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지만, 한국에서는 관광지에서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든 어른이든 대체로 차렷 자세가 기본이다. 기껏해야 어색한 미소를 짓거나 수줍게 손가락 브이를 그리며 '나 지금 즐거워요.' 정도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은 달랐다. 스스로 자신의 매력을 아는 건지, 어른도 아이도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눈빛부터 달라졌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한 번은 시내에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며 남편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더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몸을 S자로 크게 틀며 능숙하게 포즈를 잡고 렌즈를 향해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오호.


옆에서 지켜보는 내내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따로 포즈 학원이라도 다니는 게 아니라면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세계적인 모델 에이전시들이 왜 그토록 동유럽 출신 모델들을 길거리에서 캐스팅하는지 알 것 같았다.


연예인에 열광하는 팬클럽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들을 옆에서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유 없이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하여 '미의 나라' 러시아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아름다움에 자연스레 시선이 가고 마음이 움직이는 건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뜻밖의 상황에서, 또 한 번 확신으로 다가왔다.




큰아이를 유치원에 데리러 갔다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스크바 지하철은 지상에서 까마득한 지하 승강장까지 쉼 없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정말이지 스릴 넘쳤다.

처음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윽!'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가파른 경사와 속도가 매우 빨랐다. 무심결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잡이를 꽉 움켜쥐게 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불안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아이는 여기만 오면 호기심 가득한 장난기가 샘솟아 눈을 반짝였다. 아마도 거대한 지하철 내부가 아이에게 신나는 놀이터로 보였나 보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이는 매번 승강장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지켜보겠다며 한참이나 발길을 떼지 못했다. 하긴, 스크린도어도 없는 플랫폼으로 환한 불빛을 내뿜으며 열차가 엄청난 기세로 들어오는 광경이 네 살 아이 눈에는 변신 로봇만큼이나 멋져 보였을 것이다.


"엄마!!!!! 저거 봐!!! 우와!!!!!!!"



말하는 단어마다 느낌표가 열 개쯤 붙어 있었다.

매일 보는 장면인데도 아이는 늘 처음 보는 것처럼 순수하게 감탄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기다리는 엄마는 슬슬 지루해지고, 그만 집에 가고 싶어진다.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나둘 떠올려 보았다. 얼른 둘째 이유식도 데워야 하고, 빨래도 확인해야 하고, 저녁밥도 새로 안쳐야 했다. 오늘도 엄마는 할 일이 많았다.


그래도 갑자기 가자고 하면 또 한바탕 나리가 벌어지니 순조로운 귀가를 위해 마지막 인내심을 짜낸다. 5분 후를 예고하며 좀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이와 함께 지나가는 열차를 몇 대 더 구경한 뒤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는 정말 집에 가야 할 시간이었다. 아기띠 속 둘째도 배가 고픈지 몸을 바르작거리며 슬슬 짜증 섞인 울음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가자."


나는 아기띠를 추어올리며 얼른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예상대로 큰아이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여전히 열차바라기 중이었다. 못 들었나 싶어 얼굴 가까이 다가가 이제는 가야 한다며 점잖게 타일러도 보고, 잠시 더 기다려도 보고, 달래고 설득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럼 엄마는 간다!"를 외치며 먼저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슬쩍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고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다급히 뒤따라왔다.


아이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리며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 싶었는데, 심통이 잔뜩 난 아이는 이내 내 손을 뿌리치며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어나! 여기 계단 아니야!”


일어나라고 말했을 뿐인데, 아이는 뭐가 그리 아쉬운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쳐다봐도 안 무섭단다, 아들. 그런데 이 녀석, 일어나기는커녕 그대로 뒤로 드러누워 버릴 태세였다.


하아…… 이 녀석.


길바닥이었다면 조금 더 기다려 줄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 위였다. 뒤로 벌러덩 눕다 머리카락이나 옷이 기계에라도 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나는 아기띠 안의 둘째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균형을 잡으며 몸을 숙였다. 힘으로 일으키려는 나와 버티려는 아이의 숨 막히는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그때였다.

정신없는 와중에 몇 계단 아래쪽에서 언뜻 말을 거는 듯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무심코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눈앞에 흡사 디즈니 애니메이션 속 공주님이 현실로 걸어 나온 듯한 고고한 자태의 여성이 서 있었다.


사람 뒤로 후광이 비친다는 말이 무엇인지, 나는 그 순간 바로 이해했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늘씬한 키에 뽀얀 피부와 어깨 위로 찰랑이는 갈색 웨이브 머리, 옅은 화장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는 이목구비가 비현실적이었다. 보는 사람을 홀리는 듯한 미소를 머금은 채(정작 본인은 알지 못했겠지만), 그녀는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앞으로 좀 더 다가와 아이를 향해 무릎을 살짝 굽혀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러시아어로 조곤조곤 말을 건네며,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마도 위험할까 봐 아이를 일으켜 주려는 것 같았다. 나도 덩달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엄마 말도 안 듣는 녀석이, 과연 낯선 사람 말을 들을까?'


그런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아들 녀석은 잠시 그 여성을 올려다보더니 무엇엔가 홀린 듯 그녀의 손바닥 위에 고사리 같은 자신의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더니 너무도 쉽게 몸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어라……?!



순간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이 묘한 배신감이란.



너도 얼굴이 중하냐?!!!



내가 그렇게 일어나라고 애걸복걸할 때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처음 보는 예쁜 누나가 타이르며 손 한 번 내미니 저리 냉큼 일어난다. 기가 막힌 상황에 제대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만 약 오르는 코미디였다.


못 볼 꼴이다. 세상에... 내가 어미인데.
키워 봤자 부질없다. 참 부질없어!!!





흔히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고들 하는데 결국 둘 다 중요한가 보다.

그날, 나는 네 살배기 아들의 기가 막힌 심미안에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네 살도 보는 눈이라는 게 있구나~



에스컬레이터 끝에 이르러서는 마치 무도회에 입장하는 왕자라도 된 양 그녀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계단을 올랐다. 저 리드미컬한 발걸음만 봐도 지금 녀석의 기분이 얼마나 최고조에 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우… 얄미워라!!!


한편으로는 아이가 무사히 에스컬레이터 끝까지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어쨌거나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말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엄마는 오늘도 너덜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늙는다. 늙어!!


"빠까! 빠까!"(헤어질 때 하는 인사)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들 녀석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역 문 앞에서 그녀와 헤어질 때 눈이 반달이 되도록 환하게 웃으며 손까지 흔들었다. 조금 전까지 바닥에 주저앉아 울던 진상 아기는 어디 가고, 사랑에 빠진 아기 천사가 따로 없다.


둔갑술이야 뭐야.

이 정도면 거의 뭐, 사랑의 힘이다. 흥!


방금 일어난 상황을 곱씹으며 어이가 없어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이 황당한 상황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던 건, 이름도 모르는 외국인 아이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준 그녀의 다정한 용기가 정말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벌써부터 훤히 그려지는 아들과의 미래에 깊은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뭐, 괜찮다.

이 한 문장을 떠올리며, 애써 마음을 추슬러 보았다.


"나는 지금, 남의 집 사위를 키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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