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사적인 북한식당 방문기

삐라 줍던 아이, 모스크바의 북한 식당에 가다

by봄날의 곰

'삐라'를 아는가?


솔직히 말하면 나도 최근에는 거의 들어본 기억이 없다. 이 단어가 종종 회자되던 시절을 떠올리려면, 우선 수십 년 전으로 시곗바늘을 되돌려야 한다.


아직 코흘리개 티를 채 벗지 못했던 나와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바카라가방을 아무 데나 던져놓고 집 앞 놀이터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누구네 엄마가 밥 먹으라며 목청 높여 찾을 때까지 동네 뒷산이며 골목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녔다. 이름 모를 열매를 따고 곤충을 잡느라 석양으로 하늘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까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덤불 사이를 헤치고 다니던 우리는 동네 어귀의 풀숲 한구석에서 작은 종이쪽지 몇 장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누가 버린 쓰레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친구 하나가 종이를 집어 들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이거 삐라 아니야?"

"삐라?"

"그거 있잖아. 북한 간첩들이 남한에 막 뿌리는 거."


으익. 서울 변두리인 우리 동네에도 어느새 간첩이 다녀갔단 말인가?

얼마 전 반공 교육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올랐다. 선생님은 북한에서 남한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선전 문구가 적힌 종이를 뿌리기도 하니, 발견하는 즉시 가까운 파출소에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발견한 쪽지에도 남한 체제를 비판하거나 북한 수령을 찬양하는 짧은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할 나이는 아니었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하찮은 종이쪽지가 어딘가 으스스하고 수상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금지된 보물이라도 찾은 양 그것을 들고 우르르 동네 시장 입구에 있던 파출소를 향해 달려갔다.


아이들이 몰려오자 좁은 파출소 안은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아빠뻘 되어 보이는 순경 아저씨들은 갑작스러운 어린이들의 방문에 처음에는 당황한 듯했지만, 종이를 증거품으로 내밀며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저간의 사정을 전해 듣고는 기특하다는 듯 환하게 웃으셨다.


"잘했다."


순경 아저씨들은 우리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주며 칭찬했고, 포상이라며 서랍에서 새 연필을 꺼내어 한 사람씩 나눠주셨다. 덕분에 파출소 내부 구경도 하고, 칭찬도 받고, 덤으로 선물까지 받았으니 여덟아홉 살 아이들에게는 꽤나 특별한 경험이었다. 마치 TV 드라마에 나오는 꼬마 탐정단이 된 기분으로 어깨가 으쓱했다.


그날 집에 돌아가서도,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우리는 그 무용담을 조금씩 부풀려가며 신나게 떠들어댔다. 그 뒤로도 한동안 뱀이 나온다는 어른들의 경고마저 잊은 채 인근 덤불숲을 뒤지며 삐라 찾기에 열을 올렸다.


그 시절에는 매년 6월이 되면 학교에서 주최하는 각종 포스터 대회와 글짓기 대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반공 교육도 빠지지 않았다. 세세한 내용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6·25 전쟁과 분단의 비극에 대한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들려오곤 했다. 어른들은 참상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이렇듯 어린 시절의 내게 북한은 같은 민족이라는 말과는 별개로, 실제 국가라기보다 하나의 이념적 상징에 가까운 존재였다. 삐라와 반공 포스터 속에서 접했고, 때로는 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방송될 때마다 가족들이 눈물로 재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또 상황에 따라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을 꾸려 함께 출전하고 응원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경계해야 할 적이라고 배웠지만 마냥 미워할 수도 없는, 어린 마음에는 어딘가 모순적이고도 알쏭달쏭한 대상이었다.


가깝고도 먼 나라


피를 나눈 형제라 하지만 이렇듯 대한민국에 살면서 실제 북한 사람을 만나볼 기회는 흔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현실의 인물이라기보다 뉴스나 바카라 속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느껴졌다. 군인이나 국정원 요원 같은 특수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는 이상 북한사람을 대면한다는 건 평생 경험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다 보면 한 번씩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마주할 때가 있었다.






우리가 모스크바에 입국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남편은 우리 가족의 재회를 위해 먼 길을 함께 와준 이모와 이모부께 감사의 의미로 뭔가 특별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 했다. 내심 러시아 전통 요릿집쯤 되겠거니 했는데, 나의 상상력이 너무 빈약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뜻밖에도 북한 식당이었다.


2019년 당시 모스크바에는 두 곳의 북한 식당이 있었다. 모스크바국립종합대학(MGU) 근처의 '릉라도'와 조금 더 동쪽에 자리한 '고려'였다.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한국인들의 출입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남편은 어른들을 모시는 자리인 만큼 좀 더 깔끔하고 차분한 분위기의 '릉라도'를 택했다. 아무리 외식으로 먹는 빵과 고기가 맛있어도 며칠째 한식을 드시지 못했으니 속이 허전하실 것 같았다.


일단 밥이라기에 좋다고 얼른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막상 택시에 오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잡고 물었다.


"거기 안전하긴 한 거지?"


예전에 해외 북한 식당을 자주 이용하면 의심을 받아 국정원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또 훨씬 오래전에는 해외에 있던 한국인들이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사건들도 연달아 떠올랐다. 현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괜히 긴장이 됐다.


모스크바 생활 9개월 차였던 남편은 나의 질문에 짐짓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러시아 사람들도 많이 오고, 여기 교민 중에 안 가본 사람이 더 드물걸? 나도 온라인 게임 동료들이랑 한식 먹고 싶을 때 몇 번 가봤어. 아무 일 없는데 뭘."


'그렇겠지…' 싶으면서도 선뜻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혹시 그곳이 해외에서 활동하는 간첩들의 아지트라면? 내부 어딘가에 일반인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첩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그런 망상 끝에 도착한 식당의 외관은 의외로 무척 평범했다. 러시아어로 적힌 '릉라도' 간판과 아이보리색 외벽, 그리고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길고 커다란 창문이 전부였다. 모르고 왔다면 흔한 유러피안 식당이라고 짐작했을 것 같았다. 한낮에 창을 통해 실내까지 햇빛이 환하게 쏟아지고 있으니, 내가 상상했던 비밀스러운 첩보 영화의 배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들은 인원수를 확인한 뒤 우리를 조용한 2층으로 안내했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각이라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장내가 텅 비어 있으니 휑한 느낌에 더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다른 가족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저 신기해할 뿐 모두 태연했다. 결국 나만 '쫄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증명된 셈이었다.


아이 손을 씻겨주러 화장실에 가면서도 남편에게 "5분이 지나도 안 오면 꼭 찾으러 와 달라"라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아무도 그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모두 정수리를 맞댄 채 남북회담을 방불케 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차림표를 들여다보며, 익숙한 음식을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었다.


메뉴판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한식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김치가 기본 찬이 아니라 별도 주문 품목이라는 점이었다. 김치를 따로 주문하다니. 한식은 자고로 김치를 비롯하여 밑반찬이 기본세팅 아닌가. 마치 서양 식당에서 샐러드를 따로 시키듯 김치를 추가 주문해야 한다니. 그 순간만큼은 애국심인지 식탐인지 모를 감정에 사로잡혀 영 기본이 안되었다며 혼자 투덜거렸다.


"그래도 여기 백김치는 꼭 먹어봐야 해."


남편의 추천으로 주문한 평양식 백김치는 정갈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한 입 먹어보니 정말 아삭하면서도 청량감 도는 맛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가 아는 김치 맛과는 같은 듯, 다른 신기한 맛이었다. 이어 나온 랭면과 돼지고기구이, 생선요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외국인 입맛을 고려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북한 음식의 전통적인 특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평소 먹던 것보다 조금 더 담백했고 은은한 단맛이 느껴졌다.


북한식당 '릉라도'에서 먹었던 랭면과 고기구이


추가 주문을 위해 두리번거리다 테이블 근처를 오가던 여직원들의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에 눈길이 갔다.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긴장한 듯 굳은 표정이었지만 단정한 옷차림, 수수한 인상의 외형만으로는 남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말끝에 묻어나는 억양만이 그들이 북에서 왔다는 사실을 한 번씩 상기시켰다. 요리가 테이블에 오르자 그들은 업무 수칙이라도 있는 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물러섰고, 필요한 일이 생길 때까지 근거리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음식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모부는 접시를 정리하는 담당 직원들에게 가벼운 대화를 건넸다. 하지만 그들은 어색한 듯 살짝 웃기만 할 뿐, 자연스럽게 답을 피했다. 상차림 사진을 찍는 것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지만, 우리끼리 사진을 찍는 와중에도 직원이 화면에 함께 담기는 것은 안 된다며 조심스럽게 주의를 주었다.


그 순간, 묘한 이질감이 밀려왔다. 분명 유사한 언어로 주문을 하며 통역 없이도 소통이 가능했지만, 정작 자유롭게 가벼운 이야기조차 나눌 수는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북한 동포를 만나는 일이 막연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는데, 막상 눈앞에서 마주한 이들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처럼 지극히 평범했다. 흔히 외향이 유사한 중국인이나 일본인 같은 외국인들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말로는 설명이 힘든 이질감이 거의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 사이에는, 결코 넘어서는 안 되는 보이지 않는 선 하나가 놓여있는 듯했다.


전반적으로 주문한 요리들은 한국의 향수를 자극하듯 입맛에 잘 맞았다. 하지만 식사를 하는 내내 공간 안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긴장감이 함께 감돌았다. 누군가 대놓고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다는 느낌, 그 부자연스러운 공기가 왠지 모르게 먹먹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이 우리가 그 식당을 방문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북한 식당은 국제슬롯의 대북 제재 여파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이었을까.


나는 모스크바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심한 감기몸살을 앓았다. 아이들을 맡길 곳도 없었던 터라 며칠 동안은 가져온 상비약을 꾸역꾸역 챙겨 먹으며 정신없이 버텼다. 입맛은 뚝 떨어져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열이 내리고 겨우 기운을 차리자 신기하게도 사라졌던 식욕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메뉴만 맴돌기 시작했다.


김치찌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날 미처 다 먹지 못한 아쉬움이라도 남았던 걸까.

며칠 이어진 병치레로 니글거리는 속을 달래 줄 소울푸드가 필요했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는 뜨끈하고 칼칼한 찌개 생각뿐이었다.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에 묵은지와 고소한 돼지고기를 듬뿍 넣고, 대파와 마늘 향이 진하게 배어 있는 찌개. 한 숟가락 뜨는 순간 집밥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질 것 같은 그런 김치찌개 말이다.

비상용으로 챙겨 둔 인스턴트 라면으로는 도저히 달랠 수 없는 간절함이 밀려왔다.


말끝마다 김치찌개 타령을 멈추지 못하는 나를 본 남편은 모스크바의 마지막 북한 식당, '고려'에 가보자고 했다. 당시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어쩌면 여기도 머지않아 사라질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가격이 일반 한식당보다 저렴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다른 식당과 달리 이곳은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남편을 따라나섰다.


같은 나라 계열의 식당이니 비슷할 거라 생각했지만 또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릉라도'가 밝고 정돈된 느낌이었다면 '고려'는 밖에서 보면 '지금 영업하는 건가?' 싶게 입구를 비롯한 외형이 소박했다. 일단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부터 어둑했고, 안에 홀은 제법 넓었지만 벽면의 초록빛 네온 조명 인테리어가 다소 난해하게 느껴졌다. 저녁시간이라 우리말고도 손님이 많았는데 안에 들어오면 묘하게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여기도 메뉴판으로 보기에는 우리 한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요리들이 즐비했다. 익숙한 메뉴들이 반가웠다.'떡볶이'가 '떡볶음'으로 살짝 다르게 표기된 정도가 눈에 띄었다. 애초에 온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우리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김치찌개와 고기 요리, 그리고 랭면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나는 들뜬 마음에 수저를 두 손에 꼭 들고 있었다. 뚝배기에 담긴 찌개가 보글보글 끓으며 내 앞에 놓이는 순간에는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대충 후후 불어 입천장이 데는 줄도 모르고 한 입 가득 욱여넣었다. '음?' 그런데 막상 입안에 퍼진 맛은 예상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북한은 김치찌개가 이런 맛인가?


겉보기에는 비슷했지만, 그토록 먹고 싶었던 김치찌개는 생각보다 달고 슴슴했다. 기분 탓인가? 다시 한 숟갈 떠먹어봐도 국물에서 어렴풋이 달짝지근한 떡볶이 국물 맛이 느껴졌다.

연달아 국물을 떠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도, 그래도 이게 어디냐 싶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오랜만에 김치가 들어간 뜨거운 국물을 먹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덕분에 그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아기띠 속에서 잠든 둘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고, 누가 뺏어가기라도 할세라 말 한마디 없이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어느 정도 속이 채워지자, 오히려 내 눈길을 끈 것은 달큰한 찌개 맛이 아니라 함께 나온 밥이었다. 윤기가 거의 없고 군데군데 뭉쳐 있어 마치 떡처럼 눌러 쪄 낸 듯했다. 모든 한식의 기본은 ‘밥’ 아닌가. 고슬고슬하고 윤기 흐르는 밥 한 공기라면 어떤 반찬과도 잘 어울린다는 게 평소 내 지론이었다. 그런데 이 밥은 떡과 밥의 경계를 오가는 듯 어딘가 어색했다. 나도 모르게 “밥이 좀 이상하네.” 하는 아쉬운 말이 새어 나왔다.

쌀 품종 때문인지, 조리 방식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이국땅의 낯선 식당에서 마주한 그 밥 한 공기는 분명 한국에서 먹던 밥과는 다른 맛과 식감을 지니고 있었다.


한참 식사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직원들의 태도도 일반 식당과는 달리 미묘하게 어색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서빙을 담당하는 직원은 우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빠른 말투로 주문을 확인했고, 음식이 담긴 그릇을 내려놓은 뒤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그 모든 과정에서 특별히 문제 될 만한 불친절은 없었지만, 마치 '더 다가오면 안 돼!'라는 느낌의 어딘가 생경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분명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뿌리를 가진 민족인데도, 막상 마주하니 어딘가 낯설었다. 언제봤다고.....그 낯섦 앞에서 괜스레 헛헛해지는 내 마음이 우스웠다.


마치 집안 어른들에게 전해 듣기만 했던,

오래전에 헤어진 먼 친척을 예기치 않게 타국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면 이럴까. 얼굴에서는 분명 익숙한 흔적이 보여 반갑긴 한데, 함께 살아온 시간은 너무 달라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그 짧은 경험들은 참 복잡 미묘한 감정을 남겼다.


어릴 적 덤불 속에서 '삐라'를 줍던 내가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모스크바의 한 식당에서 그들이 차려준 밥을 먹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했고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주문을 받고 음식을 설명하는 짧은 대화는 가능했지만, 그 이상의 다정한 눈 맞춤도, 유쾌한 농담 하나도 나눌 수 없었다.

말은 통해도, 정작 마음은 나누지 못하는 기묘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북한 식당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70년 분단'이라는 말의 무게를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다. 분단은 지도 위에 그어진 선 하나가 아니라,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의 삶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게 만든 긴 시간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 서글픈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설명하기 어려운 씁쓸함이 오래도록 내 안에 머물렀다. 그건 비단 음식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제는 같은 민족이라는 말만으로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 시간의 간극이 있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걸까. 그날따라 우리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거리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자라날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게 북한은 어떤 나라로 남게 될까. 그 생각에 문득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그날 식탁 위의 풍경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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