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아름다운 건 구절초가 피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소슬바람에 실려온 향기를 따라가다 보니 구절초 앞에서 발길이 머물렀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당에 구절초가 왔다. 아홉 마디쯤 되는 꽃대 끝마다 분홍빛 몽우리가 몽실몽실 부풀었다. 한발 먼저 깨어난 꽃들은 새하얀 꽃잎을 펼치고 해사하게 웃고 있다. 바람결에 하늘거리는 청초한 모습이 꽃말 그대로 '가을 여인'을 닮았다.
여인의 분첩을 연듯한 배시시 한 향이 유난히 가을을 타는 아낙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꽃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바라보고 있으면 내 마음속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젊은 날에는 봄꽃이 좋았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면 덩달아 마음도 들떴다. 이제는 소슬한 바람 속에서도 제 빛을 잃지 않고 피어나는 들국화가 좋다. 요란하지 않은 깊은 아름다움이 있다.
비단, 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도 그렇다. 눈에 드러나기보다 은은한 향을 품은 사람이 끌리고, 크게 웃기보다 살포시 미소 짓는 마음이 좋다.
구절초를 들여다보며 옛 추억에 젖어들었다. 구절초는 내게 특별하다. 속달동 마당을 가꾸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심은 꽃이 구절초였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 깨끗하고 순박해 보이는 모습에 매료되기도 하거니와, 그 하얀 꽃잎마다 아련한 어릴 적 기억이 묻어있는 까닭이다.
해마다, 늦가을 볕이 쏟아지는 날이면 문창호지를 새것으로 갈아붙였다. 김장 날만큼이나 분주하고도 커다란 겨울맞이 행사였다. 누렇고 해진 묵은 창호지를 벗고 햅쌀에서 나온 뽀얀 뜨물 같은 새 종이를 입은 문짝들이 햇살에 말라가는 풍경이 지금도 선연하다. 손이 자주 닿는 문고리 주변은 두 겹으로 덧대어 발랐다. 그 사이에 정성 들여 끼워 넣던 꽃 중에 하나가 구절초였다.
겨울 아침 햇살이 창호지를 타고 은은하게 드리울 때 구절초 꽃잎도 함께 피어났다. 단조로운 방에 액자 같기도 하고, 가을이 보내온 엽서 같기도 했다. 시골의 겨울방을 따뜻하고 아늑하게 하는 소박한 장식이었다.
먹고사는 일과 무관한 소소한 이런 것들이 좋다. 기억 속에 반짝이는 무늬로 남아 가끔씩 꺼내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돌아보니, 삶은 별거 아닌 것이 더 의미 있고, 치열하게 살며 목숨을 걸었던 것들이 별거 아닌 경우가 많았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삶을 풍성하게 하는 소중한 추억을 담으며 살아가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벗들에게 알려야겠다.
구절초가 피었다고. 한번 다녀가라고. 구절초 생꽃차를 우리며 함께하는 시간이 고향집 문창호지에 머물던 꽃잎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가을 이야기로 남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