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가 떠오르는 가을 아침. 정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없이 높고 푸르다.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던 구름도 오늘은 감히 손대기 어려웠던 걸까. 구름까지 비껴간 청명한 하늘은 올려다보는 마음까지 맑고 밝게 한다.
바람이 지나며 몇 잎 남은 벚나무 잎새를 떨구고 간다. 푸르던 잔디는 조금씩 제 빛깔을 바꾸고, 마당에도 가을이 가득하다.
구절초 꽃몽우리는 어느덧 거의 새하얗게 꽃잎을 펼쳤다. 여름부터 피고 지기를 거듭하며 마당을 밝혀온 메리골드도 여전히 건재하다. 샛노란 꽃송이와 주황빛 꽃잎이 옅어지기는커녕 수수한 가을꽃들 사이에서 오히려 색 잔치를 벌이고 있다.
구절초가 그리움을 부르고 가을의 사색을 이야기한다면, 메리골드는 훗훗한 가을의 풍요를 노래하는 것만 같다. 서로 다른 빛깔과 향기로 피어서 가을을 물들인다. 핫립쎄이지, 백일홍, 설악초도 색을 보태고 있다.
텃밭에도 가을은 넘친다.
김장 배추와 무는 보름달 차오르듯 나날이 속을 채워가고, 김장에 함께 버무려질 적갓은 보랏빛이 짙어간다. 초록 단장한 쪽파가 줄줄이 서있는 모습도 뿌듯하다.
여름에 뜸하던 애호박들은 날씨가 선선해지자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얼굴을 내밀었다. 잎사귀를 들출 때마다 "여기요, 여기", 마치 출석 체크에 답이라도 하는 것 같은 호박들의 익살스러운 출현에 나도 그만 웃음이 나온다.
며칠 전 캐낸 고구마 고랑을 뒤집으며 몇 개 더 얻은 이삭에도 미소가 일었다.
가을은 사람들 마음에도 넉넉하게 내려앉았다. 지나가던 매실밭 이웃이 나를 보자 배낭을 열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캐모마일 차였다. 만나면 주려고 직접 따서 덖은 꽃차를 내내 가방에 넣어 다녔단다. 이런 살가운 여인을 보았나. 가을 햇살이 가슴속까지 환하게 비쳐 드는 것 같았다.
가끔씩 들르는 동네 어르신은 아들이 영국에서 보냈다는 블랙티를 감자 한 봉지와 함께 들고 왔다. 슬며시 정자에 놓고 간다.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누군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하루를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이런 작은 나눔이 이 계절에는 유난히 아름답다. 사람도 자연을 닮아 가는 걸까. 주변에 건네는 소소한 정이 서로의 마음을 물들이며 따뜻하게 한다.
나도 막 따낸 둥근 애호박 하나를 봉지에 넣어 담장에 걸어두었다. 윗집에 사는 이웃이 산바카라을 나간다기에 돌아올 때 가져가라고.
가을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하는 계절이다. 지나온 날들을 헤아리게 하고, 곁에 있는 것들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뜨겁던 여름은 어서 지나가기를 바라며 견디어낸 날들이었는데, 이제는 하루하루가 아깝다. 마당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이 한가로운 시간마저 오래 붙들어 두고 싶다.
라디오에서는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가 흘러나왔다. 조수미의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높푸른 하늘에 번지고, 김동규의 깊고 그윽한 음성은 가을볕처럼 마당 위로 가만가만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