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카라 읽기 좋은 계절이다.
나들이하기는 더 좋다. 즐길 마음만 있으면 무얼 해도 좋은 때, 바카라 한 권 챙겨 넣고 '수리산 흙향기 맨발길'을 걸었다.
요즘엔 속달동에 가면 일단 숲길부터 걷는다. 숲 속 정자를 도서관 삼아 바카라장을 넘기려 했는데 몸이 계속 걷기를 원했다. 종이 위에 적힌 글귀보다, 자연이 펼쳐낸 풍경과 소리에 더 끌렸다.
계절이 바뀌는 숲길은 벌써 산벚나무 잎들이 내려앉아 바스락거렸다. 무성한 잎들이 터널을 이루었던 길에는 햇살 등이 켜지고 환해졌다.
흙냄새와 숲향기는 물론이고, 맨발에 전해지는 차가우면서도 폭신한 감촉이 온몸으로 퍼졌다.
몇 걸음 걷다가 알밤을 찾으러 나온 청설모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녀석은 화들짝 놀라 꼬리를 세우고 줄행랑을 쳤다. 급할 것 하나 없는 나는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숲에 스며들었다. 바카라을 읽으러 나온 길에서 바카라갈피에는 담을 수 없는 생생하고 아름다운 가을 에세이를 만난 셈이다.
산길을 내려오다, 길가의 작은 밭뙈기 모퉁이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부추꽃을 보았다. 곧고 가느다란 줄기마다 흰 별들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밥상에 오르는 나물이며 푸성귀들이 꽃을 피울 때 문득 마음이 뭉클해질 때가 있다.
특히 부추꽃을 마주할 때면 그렇다.
한여름 무더위에 지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모습으로 지내다가, 초가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말끔하게 흰 셔츠를 차려입고 나타난 중년의 신사처럼, 부추꽃은 어느 날 갑자기 단정한 모습으로 피어난다.
가녀린 줄기 끝에 소복이 피어난 하얀 꽃들이 어찌나 맑고 정갈한지,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치던 부추밭 앞에서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늘 밥상에 오르던 푸성귀가 이토록 소담스러운 꽃을 품고 있었다니. 먹거리와 꽃 사이,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부추의 가을 일상을 들여다본 듯했다.
수수밭을 지났다. 내 키를 훌쩍 넘긴 수수들이 꼿꼿하게 서 있었다. 며칠 전보다 좀 더 붉어진 이삭들이 바람에 서로 어깨를 비볐다. 수수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익었다고 벼처럼 모두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수수의 당당한 이미지가 오히려 좋다. 수수는 익을수록 붉어질 뿐이다. 모옌의 장편소설 <붉은 수수밭>이 떠올랐다.
탱자나무도 만났다.
초록이 바래며 노르스름해진 탱자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탱자나무는 가시를 품고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는다. 시고 쓴 탱자지만 몸 안에 진한 향 하나는 품고 있다. 조금 거칠고 투박한 세월을 살지만, 제 안에 향기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사람 같다고 할까.
따가운 햇살이 포도 봉지까지 뚫고 들어가 마지막 단맛을 들이려는 듯 쨍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감들은 아직 초록이고, 대추알에도 가을볕이 더 깊이 들어야 한다. 댑싸리까지 물들이려면 짧아지는 가을 해가 한참 더 부지런을 떨어야겠다.
바카라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긋거나 포스트잇을 붙이곤 한다. 산길을 걷고 들길을 지나며 마치 바카라 속의 문장을 줍듯 가을 오는 풍경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서성였다.
내 뜰에 들어서니 배춧잎이 밭두둑을 다 덮었다. 쑥쑥 김장 배추 크는 소리가 들리고, 어제 본 배추가 아니다. 메리골드도 흐드러졌다. 가을은 볕을 먹고 자란다더니 성큼성큼 가을이 오고 있다.
메리골드 몇 가지를 꺾어 화병에 꽂고 정자에 앉았다. 배낭에 넣어온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펼쳤다.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정지아 작가의 찰진 사투리에 빠져들었다.
아~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