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마당에선 하고 싶은 일이 참 많다. 꽃차를 말리고, 쑥부쟁이 작은 꽃잎으로 압화도 만들고, 떨어진 단풍잎을 주워 바카라갈피에 끼워두고, 눈앞에 펼쳐진 가을 풍경도 그리고 싶다. 파란 하늘, 맑은 바람, 환하게 쏟아지는 햇살까지 그림 속에 담고 싶은 날이다.
그림 대신 하얀 천에 가을빛을 물들이기로 했다. 먼저 메리골드 꽃잎을 땄다. 해마다 마당과 텃밭을 점령하듯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이다. 예년만큼 풍성하지는 않지만, 올해도 화단은 물론이고 흙이 있는 곳엔 어디든 제 몫의 자리를 차지하고 피어났다.
애써 돌보지 않아도 제 때를 알고 찾아오는 메리골드를 고맙고 귀하게 쓴다. 흔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공기, 물, 햇살이 그러하듯이, 늘 있어 귀한 줄 모르지만 소중한 것들이다. 이젠 특별하고 값나가는 것보다 언제든 손 닿는 곳에 가까이 있는 것들이 좋다. 물건도, 사람도 그렇다. 무엇보다 편하다.
갓 피어난 꽃들은 꽃차를 만들고, 좀 지나 꽃잎이 퍼진 것들은 염색으로 빛을 담아낸다. 햇살을 듬뿍 머금은 메리골드 꽃잎은 선명하다 못해 투명하게 빛난다. 특히 햇살이 부드러워지는 해 질 녘이면 노랑과 주황이 더욱 깊어진다.
형형색색의 꽃잎을 바구니에 따담으며 마음속에도 차곡차곡 행복을 채웠다. 옆에서 말없이 손을 보태는 남편에게 "꽃 따는 남자가 될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어?" 하고 묻자, 피식 웃어 보이는 그의 얼굴도 한없이 편안해 보였다.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이라는 꽃말이 아니어도 꽃을 따는 일은 즐겁다. 똑똑 꽃자루 꺾이는 경쾌한 소리는 가을의 맑은 적막을 깨우는 종소리 같다. 잎새를 스칠 때마다 진하게 퍼지는 향기는 도파민이 되어 온몸에 번지고, 손끝에는 가을이 묻어났다.
꽃잎을 끓여 색을 우리는 동안 마당에 앉아 가을을 바라보았다. 여름처럼 요란하지도, 겨울처럼 고요하지도 않은 마당.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흔들리고, 구절초는 줄기 끝에 동글동글한 꽃망울을 맺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는 것은 시간을 채집하는 일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진이 어느 한순간의 풍경과 기억을 모아두는 것이라면, 천연염색은 한 계절의 빛과 향기를 천에 스며들게 하는 일이다.
고맙게도, 메리골드 염색은 어떻게 해도 망치는 일이 없다. 할 때마다 같은 듯 다른 색을 얻는 묘미가 있다. 염색천과 매염제인 백반 양에 따라 조금씩 다른 색이 펼쳐지는 맛이 그림을 그리는 기분이기도 하다.
꽃잎에 물을 부어 충분히 끓이고, 골고루 주물러 마침내 세상에 하나뿐인 머플러를 얻었다. 가을볕을 그대로 으깨어 담은 듯 노랗다. 보이지 않던 바람의 결, 마당 한쪽에서 묵묵히 익어가던 계절의 냄새까지 하얗던 천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꽃은 지고 계절은 흘러가지만, 마당을 물들였던 색채는 이렇게 천 한 자락에 머물게 되었다.
붙잡아두고 싶어도 속절없이 가버리는 것들이 많다. 고운 단풍은 이내 빛을 잃고 흩어지고, 눈이 시리도록 푸르던 가을 하늘도 계절과 함께 물러나곤 한다. 그런데 오늘 메리골드의 진한 노을빛을 머플러에 그대로 붙잡아두었다. 막 물들인 머플러에선 꽃향이 난다.
머플러를 두를 때마다 올가을 햇살이 되살아날 것 같다. 꽃잎을 따모으던 손끝의 기억과 스치던 바람의 숨결까지도. 늦가을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 때, 노랗게 물든 은행잎빛 머플러로 멋을 내고 흩날리는 낙엽 속을 걸어볼 일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