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된 글을 통해 알게 된 것들

by김하정

저장해 놓은 글을 발행하기 위해 다시 읽는데 부끄러웠다. 사실이었고 솔직한 얘기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폭로에 가까웠다. 더구나 형제의 허물을 들춰내서 내가 이해받으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으니 사장이 답이었다. 덧붙이고 지울 것도 없이 잘못된 글의 예시로 묻어두기로 했다.


잠깐 동안이야 위로받고 카타르시스겠지만 그래서 뭐 할까. 무엇보다도 쌓인 피로가 엄마만 할까. 거기에 이르니 '내가 뭐라고' 싶어 졌다. 묵은 애환이 고구마 줄기처럼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어도 엄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몇 날 며칠 메어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눈에도 부당했고 이해되지 않은 것들,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들을 이제는 바로 잡고 싶었을까. 아니면 잊고 살기로 했던 기억들을 순식간에 지금으로 불러들이고야 마는 태도에 화가 났던 것이었을까.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쯤이면 바뀌어야 하지 않냐고 줄곧 떼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욕심이었다.

허락도 없이 과도하게 키워 온 내 기대가 화근이었다. 영영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로 끝나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 것이다. 짝사랑과도 같은 기대는 오로지 내 안에서 발생됐을 뿐 약속됐던 게 아니었다. 대어를 꿈꾸며 파도 가장 심한 곳에 그물망을 던져 놓고 텅 빈 채로 끌어올리자니 민망했던 모양이다. 물살 탓 바람 탓이라도 했어야 했으니까.


실컷 징징 거리다가 엄마가 개입해서야 끝이 나는 어릴 적 싸움과 다를 게 없었다. 어른도 한참인 지금 모든 갈등에 중재를 나서도 시원찮을 판에 엄마를 떠올리고 나서야 제 자리를 찾아갔다. 기억을 잃어가도 엄마는 끝까지 나를 지켜내는 기준점이 되었다. 조용히 타이르듯 글의 방향성까지도 이끌고 있었다.

글이란 어디까지 반영돼야 글의 가치를 다 하는 것일까도 생각하게 했다. 수위조절로 걸러버린 글도 글일까 싶다가도 쓸 거리가 고갈되더라도 침범하지 말아야 할 기준점은 분명 중요해졌다. 그렇다고 그리운 것들을 쓰려고 했는데 그립지 않은 부분이 묻어나버리면 그때마다 돌아 나오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버릇처럼 지우고 사장시키는 것도 비겁의 다른 이름일 것이었다.


초등학교 운동회 때 청군 백군 각각의 커다란 박에 모래주머니를 던져 먼저 열리는 쪽이 이기는 최종 미션이 있었다. 드디어 박이 열리고, 희망의 메시지가 세로로 주르르 펼쳐 나올 때면 까무러치게 좋았던 기억들. 그때 준비해 갔던 모래주머니 같은 역할이 글이어야 되지 않을까도 고민했던 것 같다. 꼭 희망의 메시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열리게라도 힘을 모아 볼 수 있는 게 글이라고 믿고 있었다.


수정이 불가한 것보다는 수정될 수 있는 것들에만 마음을 보태는 글이 글일까. 아니면 수정되지 않은 것에도 열 번 스무 번 던져서 깨치고 나오게 해야 맞는 걸까. 둘 다 아니었다. 글은 결과를 끌어내야만 하는 계몽일 수 없음을 이제는 안다. 수정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두리뭉실 돌리지 않고 그저 쓸 수 있어야 한다. 과하게 따옴표 물음표 끌어오지 말고 놓인 그대로의 상태를 전달하는 것만이 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마지막에 들었다.

결국 가장 나쁜 바카라도 다시는 읽지 말아야겠다는 한 가지의 교훈은 주는 법이다. 사장된 글을 통해 지켜가야 할 저지선만큼은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내게 글쓰기란 배설 하듯 쏟아놓고 보자는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 상태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아픔도 돌 볼 줄 알게 됐다. 참아야 할 게 많아지면 어깨가 뻐근하게 아파오듯 너무 꾹꾹 눌러쓰지 않게 힘을 빼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사장된 글에서 떼쓰지 않고 인정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바랐다. 무겁거나 가볍지 말고 조금 더 내밀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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