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인 '나'의 간격

내가 아는 나, 남이 아는 나 ⑶

byItz토퍼
나를 잃지 않고, 나를 넓혀 가는 일


by ChatGPT & ItzTOPHER


이제 세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보자.

내가 아는 나, 전해 들은 이야기 속의 나, 나를 직접 겪은 사람들 속의 나.


첫 번째 나는 말한다.

“나는 나를 잘 알아.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야.”


두 번째 나는 대답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를 그렇게 알고 있어.”


세 번째 사람들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너를 이렇게 기억해.”

“나는 너에게서 저런 모습을 보았어.”

“내가 아는 너는 또 달라.”


이 세 사람은 때때로 서로 충돌한다.


나는 선의로 행동했지만 상대는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나는 아무런 의도 없이 한 말을 누군가는 오래 기억할 수도 있다.

나는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를 부족하게 여기는 순간에도, 누군가에게 나는 고마운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판단이 옳은 것일까.


어쩌면 이 질문 자체가 어긋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으로 나를 만났고, 그 경험에 따라 나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모든 해석이 합쳐져 슬롯 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내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내가 아는 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억울한 순간을 만난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 말에는 자기 방어가 담겨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진실도 담겨 있다.

상대가 아는 나는 나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내가 알고 있는 나 역시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던 행동,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말투,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태도가 누군가에게는 분명한 경험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나를 들여다보는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타인의 눈을 빌려 나를 다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평가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타인의 해석이 언제나 사실을 반영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오해를 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타인이 나를 다르게 경험했다는 사실과 내가 나 자신을 다르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든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경험이 반드시 서로의 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그 말 앞에서



처음 그 지인에게 들었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그때 나는 곧바로 내가 아는 나를 떠올렸다.

제자들, 지인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카라을 읽고 사진을 찍는 모임을 만들던 나를.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분이 나를 직접 겪었든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알았든, ‘어울린다’는 것을 여럿 속에 두루 섞이는 일로 여기는 눈에는 한쪽에서 몇 사람과 오래 이야기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을 수 있다. 반대로 나는 ‘어울린다’는 것을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가는 일로 알고 있었다.


처음에 그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했던 까닭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나를 부정할 이유도 없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여럿 속에 두루 섞이기보다는 몇 사람과 깊이 나누는 쪽을 택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과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가는 일에는 기꺼이 앞장선다. 이 모습들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함께 존재하는 여러 면일 것이다.


우리가 자주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저런 사람이다."

하지만 인간은 한 문장으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며, 타인의 시선 속에서 때때로 낯선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나면서도 여전히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간격을 이해해 가는 일


세 사람은 서로 다르다.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오해를 낳고, 때로는 내가 몰랐던 나를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차이야말로 내가 슬롯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나는 혼자서 나를 정의하지만 세상은 나를 관계 속에서 기억한다.


나는 나의 의도를 알지만 타인은 나의 행동을 경험한다.

나는 나를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아는 나와 타인이 아는 나 사이의 간격을 조금씩 이해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나를 오해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나를 뜻밖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도,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발견했을 때도,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다시 배운다.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아마 요즘 세대가 듣기에는 조금 불편한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말한 성찰은 나를 혼자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사이를 오가며 나를 다시 알아가는 일에 가깝다.


그렇게 나를 이해할 때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도, 나만의 이야기에 갇히지도 않으면서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는 순간은, 대부분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나' 사이의 간격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하나이지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 이해란 그 수많은 시선 속에서도 내가 아는 나를 잃지 않으면서,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나까지 받아들이는 일이다.


결국 나를 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아직 알지 못하는 나를 함께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 본문과 이어지는 온라인카지노북 『Itz토퍼 Vol.1』의 다음 이야기(2026.10.8): 「프랑켄슈타인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 괴물의 비극을 통해 우리의 인간관계를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He has no name. / by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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