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나, 남이 아는 나 ⑵
전해 들은 나, 겪어 본 나
사실 이러한 현상은 SNS와 플랫폼에서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게시물 하나를 통해 게시자의 의도와 성향을 각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한 사람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나'가 내가 쓴 이야기라면, '남이 아는 나'는 누가 쓴 이야기일까?
이야기 속에 태어난 '나'
두 번째 사람은 나를 직접 만난 적 없는 사람이다.
그는 대개 누군가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알게 된다.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
“예전부터 좀 그랬어.”
“아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걸.”
이런 말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하나의 인물을 만들어 낸다. 심리학에서는 타인에 관한 정보로 인상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인상 형성(Impression Formation)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정보가 반드시 직접 경험에서 나올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전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타인을 판단한다. 문제는 이야기가 전달되는 동안 사실과 해석이 조금씩 뒤섞인다는 데 있다.
나는 한 모임에서 여러 사람과 두루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조용했다’고 기억할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고 해석하고, 또 다른 사람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것 같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눈에 띄는 것은 내가 하지 않은 일, 곧 여럿과 두루 어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두 사람과 나눈 이야기가 아무리 깊었다 해도 그것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의 행동이 세 가지 인상으로 갈라지고, 그중 하나가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된다.
그 사람은 나를 만나기도 전에 나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특정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슬롯적 존재로 살아가는 인간이 감당해야 할 숙명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행동으로 살아가지만, 타인에게는 그 행동에 대한 해석으로 기억된다.
내가 모르는 나를 아는 사람들
세 번째 사람들은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직접 겪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아는 나가 언제나 틀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시선에는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모습이 담겨 있을 수 있다.
나는 스스로를 신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결정이 느린 사람으로 경험했을 수 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한다고 믿지만, 누군가는 그 솔직함에서 차가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상대를 배려했다고 생각했으나, 상대는 그것을 간섭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어느 한쪽이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의 의도를 경험하고, 상대는 나의 행동이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조지프 러프트와 해리 잉햄이 제안한 조해리의 창(Johari Window)은 이런 자기 인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이 모델에는 ‘맹점 영역’이라 것이 있다.
나는 알지 못하지만 타인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이 영역을 조금씩 발견하며 살아간다.
친구의 솔직한 충고에서, 배우자의 무심한 한마디에서, 온라인 게임 동료의 반응에서, 때로는 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의 뜻밖의 평가에서.
어쩌면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에도 그런 맹점이 조금은 들어 있는지 모른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는, 그 자리에 있는 나보다 그 자리를 바라보는 사람이 더 잘 알 수 있으니까.
물론 타인의 판단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틀렸다고 밀어낼 수도 없다. 그 안에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나의 일부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계마다 다른 나
이 세 번째 사람은 한 명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기억 속에 서로 다른 나를 저장한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바카라을 읽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 나는 먼저 나서서 모임을 꾸리는 사람일 수 있다.
하지만 큰 모임에서 잠시 스친 사람에게는 한쪽에서 한두 사람과만 이야기하던 사람일 수 있고, 마주 앉아 오래 이야기를 나눈 사람에게는 끝까지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일 수 있다.
가족에게는 말없이 곁을 지키는 사람일 수 있고, 친구에게는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나는 그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행동하지 않는다.
상황이 다르고, 관계가 다르며, 그때의 나의 기분이나 형편도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그 모두가 나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모습들이 어떻게 한 사람일 수 있을까.
우리는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누군가에게는 조언하는 사람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된다.
어떤 자리에서는 침묵하지만, 편안한 사람 앞에서는 말이 많아진다. 혼자 있을 때의 나와 사랑하는 사람 곁에서의 나가 다르다고 해서 어느 한쪽이 거짓된 자아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여러 가능성 가운데 특정한 관계에서 드러난 모습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모든 모습을 하나로 묶어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주는 것일까?”
나에게 그것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대한 관심인 듯하다.
사람들을 모아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 갈 때도, 한 사람과 마주 앉아 그의 이야기를 오래 들을 때도, 내가 끝내 붙들고 있는 것은 같다. 서로 다른 상황과 역할 속에서도 내가 계속해서 바라보고 궁금해하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 그 안에서 움직이는 생각과 마음이다.
그래서 ‘나’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들을 하나로 엮으며 그 모든 것을 이어주는 연속성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