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켄슈타인에게 말을 걸었더라면

괴물이 알려 주는 소통의 기술

byItz토퍼
by ChatGPT

프롤로그: 괴물 이름을 아시나요?


누군가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초록색 얼굴에 목에 볼트가 박힌

괴물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건 그의 이름이 아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성이고,

괴물에게는 끝까지 이름이 없다.


그 이름 없는 존재가

우리에게 많은 사유를 품게 만든다.


아니, 그 소설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 없는 괴물이 품게 하는 사유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소설을 간단히 정리해서 소개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1818년, 열아홉 살 무렵의 메리 셸리가 쓴 『프랑켄슈타인』은 북극을 향하던 탐험선의 선장 월턴이 한 남자를 구조하면서 시작된다. 그 남자가 바로 젊은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다.


빅터는 생명의 비밀에 사로잡혀 시체의 조각들로 인조 생명체를 만들어 내지만, 눈을 뜬 피조물의 흉측한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쳐 버린다.


그 뒤 홀로 남겨진 피조물은 세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외로움과 분노를 키워 간다.


마침내 그는 창조자에게 복수를 시작하고, 빅터는 동생과 친구, 아내를 차례로 잃는다. 빅터는 끝없이 피조물을 쫓다가 북극에서 숨을 거두고, 피조물 역시 슬픔 속에 어둠 너머로 사라진다.


이 모든 이야기는 탐험선의 선장 월턴이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담겨 전해진다.



보통 이 소설은 "과학이 선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경고하는 이야기로 소개된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시각, 나만의 빗각으로 이 소설을 다시 바라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이 소설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시체를 조합해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우리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이끌어 보고자 한다.

바로 '대화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극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순한 실험실 이야기로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소설 속에는 우리 일상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세 가지 장면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이야기: 첫인상에서 외면당한 존재


피조물이 눈을 뜬 날, 빅터는 인사도 없이 도망쳤다. 몇 년을 공들여 만들어 놓고, 눈을 뜬 지 몇 초 만에 "으악" 하고 자리를 떠 버린 것이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매정하게 등을 돌린 장면이다.


피조물은 손을 뻗었지만 돌아온 건, 자신을 창조한 자의 뒷모습뿐이었다.

말을 걸기도 전에 대화의 문이 닫혀 버린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시각 하나를 불러올 수 있다.


우리는 "괴물이 사나워서 사람들이 피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순서는 반대였다. 피함이 먼저였고, 사나워진 건 그다음 일이다.


나중에 피조물은 놀랍도록 말을 잘하는 존재로 다시 등장한다.

말이 통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아무도 말을 걸어 주지 않았던 것뿐이다.


우리도 가끔 겉모습이나 단편적인 표현 하나만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타인을 판단하곤 한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은 없는가?

혹은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적은 없는가?


"당신은 왜 나를 괴물로 만들었는가?"



두 번째 이야기: "말하면 걱정할까 봐" 병


빅터에게는 치명적인 습관이 있었다.

바로 혼자 끌어안기다.


우리 모두에게 있는 병 중 하나지만, 때론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


동생 윌리엄이 살해당하고, 억울한 하녀 저스틴이 범인으로 몰려 재판을 받는다.

빅터는 진범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테니까."


결국 하녀 저스틴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런데 이 치명적 습관의 백미는 결혼식 날 밤이었다.


괴물이 "네 결혼식 날 밤에 찾아가겠다"고 경고했는데, 빅터는 이를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기가 괴물의 표적이 될 거라고만 생각하고 혼자 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위험에 노출된 사람은 아내였다.


이건 우리 주변에서도 흔한 장면이다.


"괜히 걱정시킬까 봐"

"말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 소설이 보여 주는 건, 보호하려는 침묵이 오히려 상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까지 안겨 줄 수도 있다.


최근에 "말 안 하는 게 배려"라고 생각하며 삼킨 이야기가 있는가?

그 사람은 정말 몰라도 괜찮았을까?


"왜 말하지 않았는가?"



세 번째 이야기: 눈을 감았더니 대화가 되더라


피조물은 숲 속 오두막의 드 라세 가족을 몰래 지켜보며 말과 감정을 배운다.


그러다 용기를 내어 다가가는데,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이 앞을 보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여기서 잠시 눈길을 멈추고 이들의 관계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은 괴물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오직 목소리와 말투로 그를 만난 것이다.

그래서 두 존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가족이 돌아와 괴물의 모습을 보는 순간, 대화는 비명과 폭력으로 바뀌고 만다.

같은 존재, 같은 말인데도 눈에 보이는 순간 소통이 단절된 것이다.


반면 이 이야기를 전해 듣는 탐험선의 선장 월턴은 다르다.


그는 빅터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결국 선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위험한 탐험을 접는다.

비극이 되풀이될 뻔한 순간, 듣는 쪽을 택해서 이야기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얼마나 드물게 "듣고" 이해하려 할까?


"왜 날 그렇게 섣불리 판단하면서, 이해하려고는 하지 않았는가?"



에필로그: 만든 다음에 해야 할 일


이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괴물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외면당하며 완성되었다."


요즘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이 소설이 자주 소환된다.


"어디까지 만들어도 되는가"라는 질문은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다.


물론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이 알려 주는

더 현실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은,

그 결과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바카라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빅터는 오랜 시간을 들여 생명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비극을 키운 것은 만든 일 자체가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도망과 침묵과 외면이었다.


눈을 뜬 피조물 앞에서 도망쳤고,

억울한 죽음 앞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자신이 만든 결과를 끝내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문제는

무엇을 만들었느냐에만 있지 않았다.


그것을 마주하고, 이해하고,

끝까지 바카라임지는 일이 남아 있었다.




200년 전 소설이 건네는 조언은

의외로 단순하다.


만남 앞에서 한마디 더 건네고,
삼키기 전에 한마디 더 귀 기울이고,
자신이 만든 모든 일에
끝까지 바카라임지는 것.


그 대상이
사람이든 AI든,
결국 우리가 바카라임져야 할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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