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엄마가,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침상에 앉은 채 멀뚱멀뚱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는 아버지 등 뒤로 나는 목이 메어 더 나오지도 않는 소리를 겨우, 가까스로 쥐어짰다.
하지만 아버지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버지, 엄마가 돌아가셨다구요!”
이번에는 내가 거의 발작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그예 참았던 울음이 따라붙고 말았다.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10년 만이었다. 살아서는 두 번 다시 보지 않겠다던 아버지를 만난 것은.
그제야 아버지는 시선을 옮겨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선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울어요, 누구세요? 나를 알아요?”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치매와 함께 있었다.
‘아, 당신은 여전하시군요. 그래서 이렇게 달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아, 아니,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꿈, 바로 그 난데없는 꿈 때문이었다. 보라색 꽃무늬가 잔잔한 분홍색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엄마는 어느 번화한 거리의 정육점 몇 군데를 다 들려서는 내 손에 다짜고짜 쇠고기를 들리는 것이다. 어느새 내 양손에는 비닐봉지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왜 고기를 이렇게나 많이 사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그저 꼭 가져다 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어디에, 누구한테 주냐고 물었는데도 엄마는 ‘꼭 갖다 주그라, 꼭 갖다 주그래이.’라고만 할 뿐이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났고, 무언가에 이끌리듯 도대체 누구에게 고기를 갖다 주라는 건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아버지였다. 죽음이 바싹 엄마 곁에 왔을 때도 엄마는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를 잊지 않았다. 간성 혼수가 와서 정상적인 의식이 아니었을 때도 엄마는 링거를 치렁치렁 매달고는 새벽 내내 가야 한다고, 아버지한테 가겠다고 병실을 나가려 시도했고 그 앞을 가로막은 나랑 간호사는 엄마와 씨름 아닌 씨름으로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화가 치밀기도 했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고 그때는 이미 내 마음에서 아버지를 밀어낸 뒤였다.
10년 전이던가. 병든 엄마를 버려두고 집을 나간 아버지는 엄마의 병세가 악화될 때마다 우왕좌왕 응급실과 병실을 오가며 전화했던 나에게 와보겠다는 짧은 한마디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엄마의 첫 번째 항암 시술이 있는 날, 나는 아버지에게 한 번만이라도 엄마를 만나러 와달라고 다시 전화를 붙들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때도 오겠다던 아버지는 결국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그 후로도 엄마는 의사로부터 더는 시술이 어렵다는 말을 듣기까지 수없이 응급실과 병실을 들락거렸건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엄마의 유일한 간병인으로 점점 지쳐갔다. 하지만 그렇긴 해도 이 세상에 엄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어찌 됐든 내 옆에 좀 더 오래 머물기를 갈망했다.
아버지의 외유는 엄마가 아프기 훨씬 전에 시작되었다. 어쩌면 그때 그대로 아버지와의 인연을 끝냈다면 차라리 엄마는 조금 더 생을 연명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바람처럼 가족을 떠났던 아버지는 바람처럼 우리 곁을 찾아온 것이다. 10년 만이었다.
당신이 번 돈이니까 당신이 가져가겠다며 십억이 넘는 돈을 챙겨나갔던 아버지는 그 돈을 지키지 못했고, 신분증도 도장도, 그 어떤 것도 지니지 못한 채 그야말로 맨 몸뚱이에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엄마를 힘들게 한 건 아버지의 치매였다. 친정 동네 인근을 떠돌고 있는 아버지를 엄마의 지인이 붙잡아 두었고 내 집에 있는 엄마에게로 연락이 와닿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집에 돌아왔지만, 정신은 오락가락했고, 아버지는 엄마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엄마는 아버지를 바로 요양원에 입원시키고는 자신이 암 환자라는 것도 뒤로 한 채 아버지를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엄마도 나에게 차마 아버지를 찾아가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성한 몸도 아니면서 아버지를 찾는 엄마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말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요양원을 다녀오고 나면 더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엄마를 돌보는 건 오로지 내 몫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지 않아 아버지는 더는 엄마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간암 말기의 엄마에게는 그것도 치명적이었을까. 엄마의 병세는 빠르게 나빠졌고, 아버지를 만난 이듬해 엄마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만히 숨을 거두었다. 엄마는 나에게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아버지를, 아버지를 부탁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는 뜰 수 없는 눈으로 마지막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고는 그 한 많은 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아직 엄마를 보낼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그때에도 엄마 곁을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번엔 치매와 함께 있었다. 엄마의 보험 처리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엄마가 남긴 몇 개 보험의 제1 상속자는 아버지였고 그런 계약서를 대할 때마다 나는 아연실색했다.
엄마는,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이 아버지를 은애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내 마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으로 들끓었다. 얼마 뒤, 그 보험 처리를 위한 조치로 어쩔 수 없이 금치산자로서의 아버지에 대한 법적 수속을 다 밟았을 때 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에 맞닥뜨렸다.
아버지가 치매로 나타날 때부터 의문이었던 그 재산의 향방이었다.
정말 아버지에게는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 명의로 있던 아파트와 빌라도 누군가에게 팔아넘긴 뒤였고 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아버지로부터 상가를 증여받은 여자가 있었고, 그 여자는 아버지가 요양원에 있는 그 순간에도 증권사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돈까지를 모조리 빼내갔다. 그 여자에게는 아버지의 친필 사인한 위임장이 있었고 이쪽에서 법적 대응을 했을 때는 아무것도 문제 삼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던가. 거의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어떤 모질고 독한 여자에게 모든 재산을 잃었고 모든 것을 빼앗겼고 그렇게 병든 채로 엄마한테 맡겨진 것이다. 나의 엄마는 빈털터리의 병든 아버지를 그렇게 끌어안았고 만난 지 10개월 만에 그토록 가슴 아팠던 세상을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만나러 요양원에 갔다.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은 엄마는 내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화사한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나타나 침묵으로 말했다.
'네 아버지에게 가라.'고...
나는 딱 한 번만 엄마의 부탁을 들어주겠노라는 그 생각만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언제나 우리나라 최고 학부를 나왔다며 그토록 자신을 앞세웠던 아버지, 사장 아니면 아무것도 당신한테 맞지 않는다며 버티었던 그 아버지, 소학교밖에 못 나온 엄마에게 가차 없이 무식하다고 무시하던 아버지, 그럼에도 생계는 엄마와 자식들에게 떠맡겼던 아버지, 여자란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 아버지….
거기엔 아주 늙고 초라하고 쪼글쪼글한 주름만 남은 노인이 있었다.
나도 알아보지 못하고, 당신의 사위도 알아보지 못하고 이제는 의사가 되어 척박한 몽골 땅에서 이민족을 위해 독신의 선교사로 그 삶을 던지고 있는 셋째 딸도 알아보지 못하는 한 노인이, 스러질 듯 앉아 있었다.
나는 ‘아버지’라고 불렀고 금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어쩌지 못했다.
나는 엉엉 울었다. 목이 터져라 울었다.
그건 아버지를 향한 분노의 울음이었고 엄마를 향한 연민의 울음이었고 서러움의 눈물이었다.
영문도 모르는 채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다가 종내는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내 분노도 연민도 알지 못했겠지만 내 서러움은 가 닿았던 것일까.
그러나 끝내 가닿을 수 없었던 엄마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요양원에 3년을 머물다 비로소 엄마의 곁에 잠들었다.
어느 시인은 자기 인생의 스물세 해를 키운 게 8할의 바람이라고 하였던가.
그러나 나는 내 반세기 인생을 키운 건 8할이 오직 아버지였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 8할의 내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인생의 쓴맛을 고스란히 맛볼 수 있었던 천혜의 기회였다고도 말할 것이다. 나는 그저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는 단 2할의 인생만큼만 온전히 행복할 수 있었으며, 그랬기에 오히려 불행의 진가를 남들보다 더 빨리 터득할 수 있었다.
웃지 못할 아이러니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도 그 8할의 불행에서 깨달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나에게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어떻게 너를 이 세상에 있게 한 분한테 8할의 불행을 운운할 수 있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내가 비난받아야 한다면 그 화살들을 내 온몸으로 받으리라.
그리고 세상과 하직하는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당신은 내 인생의 아킬레스건이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내 인생의 포르테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