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퇴근 후 터덜터덜 아무 생각 없이 집으로 향했는데 우리 집 어귀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것이다.
'이게 설마 우리 집에서 나는 거?’
하며 나는 반신반의 심정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이럴 수가, 우리 집이라니!’
그랬다. 틀림없는 우리 집 식탁에 떡하니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 것이다.
“와우, 이게 뭔 일이야? 어쩐지 냄새가 좀 익숙하더라니.”
하고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반색하는 나를 보며 여전히 큰애와 작은애가 분주히 주방과 식탁 사이를 오간다.
“딱 엄마가 올 시간인 것 같았지!”
그렇게 말하는 큰애에게 나는 함박웃음을 보이곤 잽싸게 손만 씻고 냉큼 식탁 앞에 앉았다.
냄비 받침대 위에 놓인 뚝배기엔 이제 막 화구에서 내려놓은 듯한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김치와 함께 적당히 갈색을 머금은 불고기는 반짝반짝 윤기를 내며 보는 것만으로 군침을 삼키게 했다.
더구나 오리고기 훈제 구이에 칠리소스랑 머스터드소스까지 그야말로 손색없는 차림이었다.
거기에 이미 내가 만들어 놓은 멸치 볶음과 고추장아찌 같은 밑반찬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 차림만도 과분하려니와 맛은 더 비할 데 없었다.
된장찌개도 정말 맛있고 불고기도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설혹 맛이 없다 한들 두 아들이 손수 차린 밥상은 임금님 수라상과 견주기에도 아까웠다. 그렇다고 임금님 수라상을 받아본 적도 없지만, 이 밥상이라면 드라마에서 본 그것을 넘기고도 남을만한, 화면에는 없는 독특한 풍미가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도 그럴 게 맛에서도 어느 것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이 기막힌 만찬에 나는 감탄을 연발하며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웠다. 더 감격스러운 건 이런 식탁을 차리게 된 이유였다. 무슨 기념일도 아닌데 그냥 저녁때가 되어 둘이 갑자기 엄마랑 먹을 밥상을 차리자 했다고 한다. 그 말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한마디 칭찬한다는 것이 자연스레 자화자찬 숟가락까지 얹었다.
“와, 음식 솜씨 최고인데? 음, 정말 맛있네! 이게 말이야, 원래 음식 솜씨는 엄마를 닮는다는데 니들이 고대로 날 닮은 거야, 그렇지, 응?”
하고 말이다. 내 말에 큰애가 아무렴, 하고 맞장구를 치는데 속으론 아차 싶었다.
‘에구, 그냥 맛있다 하면 그만이지 또 내가 너무 갔네, 너무 갔어.’
사실 이렇게 종종 선을 넘는 것을 인식하거나 매사에 과하지 않게 균형을 지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나처럼 성미 급하고 말 많은 엄마는 더욱 유념해야 하는 일임에도 잊어먹기가 부지기수다.
특히 MZ 세대를 대할 땐 아들이라도 예외란 없다. 그래서 덜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중간을 지킨다는 것, 어디까지 가고 어디서 멈출 것인지, 그 기준은 어때야 하는지 조금도 고민하지 않은 채 매양 하던 대로 내뱉고 행동하면 좋게 매겨진 점수도 까먹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중용의 도'를 지키기 쉽지 않다고들 말하는 것이리라.
아무튼 너무 수다스러운 엄마도 아니고 또 너무 과묵하지도 않은 그런 엄마로 머무는 것이 그저 자연스레 갖출 수 있는 일이라 여겼는데 그게 그리 녹녹지 않다. 아들 둘과 남편까지, 한집에서 남자 셋과의 동거는 가끔 어느 선에 맞춰야 할지 난감할 때도 있다. 다소 과묵한 남편에겐 좀 말 많고 애교도 부릴 줄 아는 아내가 되어야 하고 한창 20대를 달리는 두 아들에겐 그에 맞는 트렌드 한 엄마가 되려고 하다 보니 수다스러움은 때로 거추장스럽기까지 하다.
뭐 어쨌거나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밥상을 받아놓고 벌이는 이런 푸념 자체가 남들 보기엔 복에 겨운 투정이라 백안시할 것도 같다. 하지만 한편에선 이런 사소하나 큰 행복을 느끼는 순간에 앞으로 살아갈 많은 시간도 그런 감정의 연장선에 있기를 바란다면 이런 고민의 시도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칫하면 가족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그저 숨 쉬는 일처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될까 봐, 또 그런 나태에 빠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모르고 지나갈까 봐 노파심이 들어서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이런 아들들이라 이렇게 늘어놓는 것조차 자랑이 과하다 눈총 받을까 싶어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혹 심기가 오글거리더라도 널리 양해해 주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