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너머의 슬로베니아

수업 대신 슬로베니아를 들여다본 시간

by슬로하라


일주일 한 번, 그녀와 만나는 영어 수업은 늘 문법바카라으로 시작한다. 기초적인 시제를 익히고, 예문을 따라 읽고, 같은 표현을 몇 번이고 반복한다. 새로운 표현을 많이 배우는 시간이라기보다, 이미 배운 문장들이 입에 붙을 때까지 소리 내어 익히는 시간에 가깝다.


그런데 그날은 거의 3주 만에 그녀를 만난 날이었다. 문법바카라을 펴기도 전에 안부부터 나눴다. 최근 슬로베니아어 A1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는 A1은 기초 수준일 뿐인데도 앞으로 계속 공부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언어 같다고 말했다. 영어도, 슬로베니아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어렵다고.


그녀는 내 푸념에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래도 영어가 슬로베니아어보다는 조금 더 쉬워요."


그 말에서 시작해 우리는 문법 수업 대신 자연스럽게 언어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녀는 슬로베니아인 번역가다. 영어뿐 아니라 독일어와 크로아티아어를 비롯해 여러 유럽 언어를 다룬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자녀도 있고, 지금도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그러다 예전부터 궁금했던 걸 하나 물어봤다. 어디선가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는 노래처럼, 멜로디처럼 들린다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실제로도 그런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당신에게는 한국어가 어떻게 들려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조금 독일어처럼 들려요."


조금 뜻밖이었다. 그렇게 들릴 줄은 몰랐다. 내게는 한국어와 독일어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한국어가 딱딱딱, 음절마다 힘 있게 끊어지는 느낌이라 독일어의 단단한 어조와 닮은 것 같다고 했다. 그녀의 귀에는 그렇게 들린다는 게 신기했다.


그녀는 내가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쉬운 단어를 골라 이야기했다. 중간중간 내가 이해했는지 살폈다. 멈칫하면 다른 표현으로 다시 설명했고, 예를 들어가며 풀어 주었다. 솔직히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그날 나눈 이야기들은 집에 와서도 자꾸 생각났다.


나는 이곳에서 지내며 느낀 슬로베니아 사람들의 인상을 이야기했다. 식당이나 공공장소에서는 비교적 조용한 편이고, 주변 사람들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기본적인 예절은 잘 지키는 느낌이었다고. 어딘가 한국과 비슷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녀도 어느 정도는 공감했다. 하지만 슬로베니아 사람들을 하나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북쪽은 오스트리아, 동쪽은 헝가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서남쪽은 이탈리아와 크로아티아에 맞닿아 있다. 그러다 보니 지역마다 분위기도 다르고, 국경을 맞댄 나라에 따라 생활권도 조금씩 달라진다고 했다.


슬로베니아를 중부유럽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발칸 국가들과 함께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이웃한 발칸 국가들과는 다른 점이 많다고 했다. 뿌리는 같은 슬라브어 계통이라 해도 문법이나 억양이 많이 다르고, 사람들의 분위기도 꽤 다르다고 했다.


중간중간에는 오래 이웃으로 살아온 나라들끼리만 할 수 있는 농담도 있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과 만나면 등을 조심해야 한다며 웃음 섞어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유고슬라비아 시절도 직접 겪은 세대였다. 그래서 그 말도 단순한 농담이라기보다, 오래된 역사와 경험이 묻어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슬로베니아가 생겨 나게 된 전설 같은 오래된 이야기도 하나 들려주었다.


신이 사람들에게 땅을 하나씩 나누어 주던 때,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던 작은 민족 하나를 뒤늦게 떠올렸다는 거였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장 아름다운 작은 땅, '천국의 한 조각'을 내어 주었다고 했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고, 숲도 있는 작은 나라.


뜬금없이 이름 속에 'LOVE'를 품고 있는 Slovenia가 떠올랐다. 우연일 뿐이겠지만, '천국의 한 조각'이라는 표현도 이 나라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국과 닮은 점도 적지 않았다. 국토는 크지 않지만 산과 바다를 함께 품고 있다는 점. 이 작은 땅 안에서도 지역마다 말투와 음식,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


그날은 결국 문법바카라을 펼치지 않았다. 영어를 얼마나 공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신 슬로베니아어가 어렵다는 단순한 푸념에서 시작된 대화는 슬로베니아를 한 발 더 들여다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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