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다
오늘도 산바카라길에서 "Čao." 하고 인사를 건넸다. 이름은 모르지만, 이제는 서로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슬로베니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의 나는 남편에게 늘 같은 말을 했다.
"우리가 여기 사는지 잘 모르게, 있는 듯 없는 듯 살자."
낮에는 대부분 혼자였다. 장을 보거나 특별한 약속이 있는 날이 아니면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었다.
남편은 회식이 있는 날이면 늦게 들어오곤 했는데, 현관문을 열며 큰 소리로 인사라도 하면 나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 조용."
이웃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었다. 낯선 나라였다. 언어도, 문화도 몰랐다. 혹시라도 혼자 있는 시간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영어도 자신 없었고, 슬로베니아어는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내가 아는 한, 이 동네의 한국인은 우리 둘뿐이었다.
원래도 낯선 공간에서는 한동안 경계를 세우는 편이었다. 열쇠 하나를 돌려 들어가는 현관문은 그때의 나에게 집이면서도, 이곳과 나를 나누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일상이 조금씩 달라진 건 반려견이 우리 집에 온 뒤부터였다.
산바카라은 하루의 일상이 되었고, 같은 길을 여러 번 오가게 됐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반려견을 먼저 봤다.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만져 봐도 될까요?"
짧은 말들이 오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반려견이 없어도 먼저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Dober dan."
"Čao."
어디 사는지도,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가다 자연스럽게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건넨다. 그 짧은 인사가 쌓이면서, 어느새 나도 이 동네의 풍경 한 조각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오면, 어떤 인사를 남기게 될지 가끔 생각한다.
반려견에게도 자주 마주치는 강아지 친구들이 있다. 산바카라하다 반갑게 달려가는 친구가 있고, 늘 먼저 향하는 놀이터가 있다. 어느 길가에서는 오래 냄새를 맡는다. 그 냄새 속에서 친구들이 남기고 간 소식을 읽는 것만 같다.
새벽 산바카라길에 늘 공구함을 들고 출근하는 아저씨가 있다. 그 공구함 한 칸에는 강아지용 쿠키가 채워져 있다. 마주칠 때마다 몇 번 그렇게 간식을 받아먹은 뒤부터는 그 아저씨만 보면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먼저 달려간다.
산바카라 때나 걷다 잠시 들러 종종 끼니와 커피로 배를 채우기도 하는 카페의 그녀들도 반려견용 쿠키를 건네며 아낌없는 애정을 주곤 한다.
집 앞이나 놀이터에서 자주 만나는 아주머니들은 반려견을 번쩍 안아 올릴 만큼 예뻐해 준다. 그러면 반려견은 얼굴을 핥으며 반가움을 쏟아낸다.
무엇보다 반려견은 이곳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에게는 몇 년 머무는 곳이지만, 반려견에게는 고향인 셈이다.
함께 이곳을 떠나는 날이 온다면, 우리에게도 작별 인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그때도 지금처럼 "Čao." 하고 웃으며 지나갈 수 있을까. 아니면 조금 더 오래 손을 흔들게 될까.
아직은 모르겠다.
처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었던 내가, 이제는 이 동네를 어떻게 떠나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오늘의 산바카라은 계속되고, 오늘의 "Čao."는 여전히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