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넘어가는 자리에서
초록이 거의 다 덮고 있는 길이었다.
산바카라하듯 익숙하게 오가던 길 옆, 어느 날부터 풀틈 사이로 붉은색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간간이 데이지의 하양과 노랑, 라일락의 보랏빛을 품은 초록들 틈에서, 붉은 꽃잎들은 예고 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처음엔 꽃이라기보다, 빨간 종잇조각 같은 것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까이서 보면 꽃잎은 얇고 구겨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움츠러들 것처럼 허술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색만큼은 유난히 짙었다. 초록 속에 섞여 있는데도 자꾸 시선이 갔다. 언제 움츠러들지 모를 모습이면서도, 서 있는 동안만큼은 꽤 강렬했다.
한 주간 세찬 비가 내린 뒤로 풀들은 한층 더 무성해졌는데, 드문드문 피어 있는 그 붉은색은 그 틈에서도 여전히 눈에 걸렸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개양귀비라는 이름의 꽃이었다. 이름은 알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것은 계절을 먼저 알리던 붉은색으로 더 오래 남았다.
그 붉은색은 늘 생활 가까이의 애매한 자리에서 나타났다. 길 가장자리, 덜 깎인 풀숲, 비어 있는 경사면, 정리된 듯하다가도 끝내 손이 완전히 닿지는 않은 공간들 사이에서 듬성듬성 올라와 있었다.
어느 날은 뒤에서 걸어오던 노년의 아주머니가 길가에 핀 꽃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무 말 없이, 몇 송이를 가볍게 꺾어 손에 쥐고는 다시 걸어갔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흐드러지게 핀 데이지와 라일락도 들려 있었다. 내 눈에는 걸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풀들과 함께. 그녀 손이 이미 화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꽃은 풍경 안에 남겨진 작은 신호 같았다. 슬로베니아에서 자주 마주치는 풍경들도 그랬다. 완전히 정돈되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버려지지도 않은 상태. 관리와 방치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자리들. 그리고 그 틈에서 계절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의 봄은 그 붉음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