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소리를 기다리는 사람

두려움이 지나간 자리에 그리움이 남았다

byMinseung Kang

초등학생 때 아버지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로 먼저 집에 도착했다. 구두 앞코가 바닥에 끌리며 내는 특유의 소리가 한 층씩 가까워지면, 나와 남동생은 하던 일을 멈추고 펼쳐놓은 것들을 번개처럼 치웠다. 무엇을 어질렀는지보다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사실이 먼저였고, 그 사실만으로 집 안에는 서둘러 정리해야 할 것이 생겼다. 우리는 문 앞에 도열해 아버지를 맞았다. 다녀오셨습니까. 인사를 마친 뒤에도 몸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퇴근 시간은 대체로 일정했다. 저녁마다 비슷한 시간에 발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집 안의 말소리는 작아졌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의 표정과 목소리를 살피며 우리는 그날 저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가늠했다. 질문에 기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목소리가 높아졌고, 불쾌해질 기미가 보이면 우리는 말투를 낮추고 숨을 죽였다. 아버지에게는 집안의 질서를 세우는 일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게 저녁은 그가 불쾌해지지 않도록 나를 먼저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


아버지는 그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자식들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때리는 일이 잦았지만, 무엇을 하면 얼마나 맞게 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회초리나 막대기를 들 때도 있었고 손과 발이 먼저 날아올 때도 있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도구로 맞는 편이 나았다. 적어도 아버지의 숨결과 몸의 열기, 눈빛이 한꺼번에 덮쳐오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맞는 고통과 때리는 사람을 가까이서 견디는 고통은 내게 서로 다른 것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화를 내지 않은 채 나를 때렸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것도, 순간적으로 격분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 술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던 아버지는 그날도 맑은 정신으로 조용히 때렸고, 나는 그 침착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화가 난 사람이라면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판단해서 하고 있었으므로, 맞고 있는 나는 언제 끝날지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중학교 3학년 때였을까. 진학할 대학과 전공을 생각하기 시작했을 무렵, 나는 어느 날 학교 바카라상에 ‘고려대 영문과’라고 적었던 것 같다. 이 집을 벗어나는 일이 막연한 상상이 아니라 아주 희미하게나마 가능한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로 가면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집을 떠나면서도 돌아오라는 말을 듣지 않을 이유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대학의 이름보다 절실했다.


그런데 서울의 이름난 대학에 가는 일은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내가 합격하면 아버지는 자신이 나를 잘 가르쳤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피해자인 나는 그 교육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스스로 내놓게 되는 셈이었다. 아버지를 견디며 공부한 시간이 아버지가 나를 잘 가르친 시간으로 읽힐 수도 있었다. 그의 그늘에서 도망치려고 공부할수록 그가 원하던 아들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역설은 지금도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모순을 따져보느라 떠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아버지가 무엇을 증명했다고 생각하든, 나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집을 벗어나야 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고려대는 아니었지만 서울의 이름난 사립대학의 영문과에 합격했다.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뻤다. 좋은 대학에 가게 됐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오래 상상하기만 했던 생활이 이제 실제로 내 앞에 놓였다는 기쁨이 더 컸다.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가던 날에는 더 이상 집을 떠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이미 떠나고 있었고, 그토록 바라던 일을 이루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앞으로의 생활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결정에는 지금도 후회가 없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발소리까지 두고 온 것은 아니었다. 결혼한 뒤에도 아파트 복도에서 누군가 구두를 끌며 걷는 소리가 들리면 순간적으로 몸이 멈췄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보다 곧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가 먼저 떠올랐고, 아버지가 올 리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뒤에야 멈췄던 몸이 풀렸다. 집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도 그 소리는 여전히 나를 문 앞에 세웠다.


큰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때, 저녁 무렵 초인종이 울리면 복도에 있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문 앞으로 몰려갔다. 선생님이 문을 열고 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아이는 부모의 손을 잡고 나갔고, 이름이 불리지 않은 아이들은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릴 때마다 아이들은 고개를 내밀었다. 이번에는 자기 엄마나 아빠가 온 것인지 확인하려고, 조금 전에도 확인했던 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오후 일곱 시가 가까워지면 남은 아이는 몇 되지 않았다. 회사에서 어린이집까지는 2킬로미터도 되지 않았지만 퇴근 시간에는 차가 밀려 삼십 분 넘게 걸렸고, 같은 신호 앞에서 두세 번씩 멈추는 동안 나는 자꾸 시계를 보았다. 문이 열릴 때마다 아이들이 고개를 내민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차가 멈출 때마다 그 복도가 떠올랐다. 큰아이도 저 문 앞에 서 있을까. 방금 들어온 사람을 보고 자기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방으로 돌아갔을까.


어린이집에 도착해 문을 열면 큰아이는 복도 끝에서 달려왔다. 몸이 앞으로 기울 만큼 뛰어와 내 다리를 붙잡았고, 나는 낮 동안 무엇을 했는지 묻기도 전에 아이를 안아 올렸다. 차 안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해하던 마음도, 그날 회사에서 겪은 일들도 아이의 몸이 내게 와 닿는 동안 잠시 멀어졌다. 내가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쉽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아했다. 아이를 안고 어린이집을 나설 때마다 나는 다른 아버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두려웠던 저녁의 문소리가 아이에게는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한 소리였다.


어린이집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이는 집에서도 내 곁으로 왔다. 내가 컴퓨터 앞에 앉거나 기타를 잡으면 자기도 함께하고 싶어 했는데, 아빠가 하는 일을 보고 싶고 자기 몫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는 컴퓨터와 기타를 만지려 하다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디 해?”


그러나 나는 컴퓨터 화면에 손자국이 남을까, 기타가 망가질까 신경이 쓰였다. 몇 번 주의를 주다가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는 울며 방을 나갔다. 나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린이집에서는 내게 달려오는 아이를 안아 올렸는데, 내 방에서는 곁으로 다가오는 아이보다 지켜야 할 물건과 끝내야 할 일이 먼저 보였다. 아이의 질문을 듣고도 그 질문이 내게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무렵 나도 지쳐가고 있었다. 둘째가 태어났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돈도 벌어야 했으며,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야근으로 소진된 몸을 그대로 집에 가져왔다. 아이가 말을 걸면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고, 같은 질문이 이어지면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지금도 말하고 싶지만, 받아줄 여유가 없다고 여기는 동안 아이는 기다리거나 물러나야 했다. 내가 왜 피곤한지, 집 밖에서 무엇을 견디고 돌아왔는지는 아이가 알 수 없는 사정이었다.


아이를 다그치다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훈육의 말이 내 입에서 되풀이될 때도 있었다. 말이 먼저 나가고 나서야 알아차렸는데, 그 말은 아이를 멈추게 하고 집 안을 조용하게 만드는 데 효과가 있었다. 바로 그 효과 때문에 다음에도 꺼내기 쉬웠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댄 적이 단 한 번도 없지만, 아이를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고 싶은 순간에는 내가 미워하던 사람에게서 배운 말을 쓰고 있었다. 아버지와 다르게 살고 싶다는 마음이 피곤한 저녁마다 나를 대신해 선택해주지는 않았다.


결혼생활 중 퇴근해 집에 돌아온 어느 날, 화장실 바닥에 먼지가 흩어져 있었다. 거실에 깔려 있던 러그의 먼지를 털어놓은 것이었고, 나는 아내에게 전에도 몇 번이나 그러지 말라고 말했다. 바닥을 보는 순간 “내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그 말을 꺼내면 저녁부터 다시 다툼이 시작될 것 같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아내가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는지를 따지다 보면 또 같은 자리로 돌아갈 것이었다. 나는 말을 삼키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그날 말을 참은 데에는 딸들이 있었다. 전에도 부부싸움이 커지면 두 아이는 바짝 얼어 숨을 죽였고, 방 안에 있어도 우리가 다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나는 누가 먼저 화를 냈는지, 누구의 말이 더 옳았는지를 마음속으로 따졌다. 아이들이 굳어 있는 동안에도 내가 옳다는 사실을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발소리를 듣고 몸을 낮추던 나는 주먹을 들지 않고도 아이들이 숨을 죽이게 되는 집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중고등학생이 되었다. 내가 말을 걸면 대답은 했지만 먼저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줄었고, 나는 아이들의 하루에서 모르는 것이 점점 많아졌다. 부부싸움이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사춘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싶으면서도 제대로 묻지 못한 채 가방을 한쪽 어깨로만 메지 말라거나 일찍 자라는 말처럼 당장 고칠 수 있는 것들만 입에 올렸다. 아이의 마음에 관해 아는 것이 줄어들수록 내 말에는 내가 옳다고 확신할 수 있는 내용만 남았다.


큰아이가 학원에서 늦게 돌아오기로 한 저녁에는 우리끼리 먼저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니 식탁에 반찬을 덜어낸 흔적과 접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아이가 돌아와 그 흔적부터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남은 반찬을 새 그릇에 옮기고 접시 가장자리에 묻은 양념을 닦았으며, 식탁도 행주로 훔쳤다.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만큼은 아무도 먼저 먹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싶었다. 아이가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는 모른다. 그날 어떤 표정으로 밥을 먹었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새 그릇을 꺼내고 식탁을 닦던 손이다. 말로 가까이 가기 어려워진 뒤에도 아이가 돌아올 시간은 알고 있었고, 그 시간을 기다리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집을 나와 따로 살기 시작했고, 결국 이혼했다. 아이들과의 만남도 예전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저녁이면 같은 집으로 돌아가던 생활이 끝났고, 아이들이 오늘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일은 이제 내가 먼저 연락해 묻고 대답을 기다려야 하는 일이 되었다.


연락을 보내도 대화창에는 내가 보낸 문장만 남는 날이 많았다. 처음에는 바쁜가 보다 했지만 하루가 지나면 내가 쓴 말을 다시 읽게 되었다. 질문이 부담스러웠을까 싶어 다음에는 질문을 줄였고, 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물음표도 아꼈다. 그래도 대화가 내 말에서 끝나고 나면 다음 문장을 보내기가 어려웠다. 연락하지 않으면 더 멀어질 것 같고, 연락하면 이미 멀어진 거리를 확인하게 될 것 같아서, 나는 대화창을 열고도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쓰다가 지운 적도 있다. 그 말에 답하려면 아이들이 내 그리움까지 받아주어야 할 것 같았다. 밥은 먹었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학교에서는 별일 없는지 궁금했지만 질문이 이어질수록 아버지의 안부가 점검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휴대전화를 엎어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 화면을 오래 들여다본다고 아이들이 왜 답하지 않는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아이의 말이 줄어들어도 같은 집에 있었으므로, 늦게 돌아오면 밥상을 차리고 방문 너머에서 기침 소리가 나면 아픈지 물을 수 있었다. 대화가 끊긴 자리에도 생활은 남아 있었다. 이제는 몇 줄의 안부를 보내고 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지우고도 보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여서,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뒤에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저녁에는 내가 아이들을 위해 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어린이집으로 서둘러 가던 일, 늦게 돌아올 아이를 위해 반찬을 새 그릇에 옮기던 일, 밥을 먹는 아이에게 천천히 먹으라고 말하던 일. 그러나 그 기억들을 아무리 모아도 아이들이 내 곁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까지 알 수는 없었다. 내가 밥상을 다시 차리던 저녁과 아이들이 부부싸움 앞에서 얼어붙던 저녁은 모두 같은 집에 있었다. 한쪽의 기억으로 다른 쪽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제 아이들의 대답이 없는 자리에서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서울의 대학에 가고 싶었던 이유를 아버지에게 모두 설명하지 않은 채, 내가 살기 위해 필요한 거리를 찾아 떠났다. 지금 아이들과 나 사이에 놓인 거리가 그때와 같은 것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견디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거리를 당장 좁혀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싶다는 바람에도 내 불안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다시 내게 온다면 무엇부터 물을지 생각하다가, 그 질문들 역시 내가 궁금한 것들이라는 데서 멈춘다. 어디에 있었는지, 왜 이제 왔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겠지만 아이들은 그저 잠깐 들렀다가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래 기다렸다는 이유로 오래 머물기를 바라거나, 찾아왔다는 이유로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까지 듣겠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앉을 자리를 내어주고, 말을 하면 듣고, 말이 없으면 그 곁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가족이 안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시간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함께 살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고, 찾아갔다고 해서 마음을 모두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으로 남는 일. 나는 아직 아이들에게 그런 아버지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언젠가 문이 열렸을 때 아이들이 내 표정부터 살피지 않아도 되기를 바란다. 어린 시절 나를 문 앞에 세웠던 소리를 떠올리며, 이제는 아이들의 발소리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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