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비슷한 성향의 평직원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2023년 11월, 팀장으로 처음 출근한 날이었다. 같은 부서의 다른 팀장, 팀원들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팀장님!” 하고 불렀다. 대답이 없자 다시 한번 “팀장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팀장이 저렇게 불러도 대답이 없나 싶어서 고개를 들었는데, 그들이 부르던 팀장은 바로 나였다.
회사에 들어온 지 거의 이십 년 만에 처음 얻은 호칭이었다. 그동안 나는 팀장에게 보고하고, 팀장의 판단을 기다리고, 때로는 그 판단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었다. 식탁에 함께 앉은 사람들 가운데 나도 팀장이라는 사실이 아직 몸에 붙지 않았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등 뒤로 통유리창이 넓게 펼쳐진 내 자리에서,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카톡으로 전해들었다. 그 사이 축하 인사도 끼어있었다. 그중 “이제야 빛을 보시네요”라는 말이 오래 남았다. 뒤늦게나마 내 일을 인정받았다는 기쁨이 있었고, 그 자리가 내게 어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호칭에는 좀처럼 반응하지 못했으면서 사람을 가려내는 눈은 뜻밖에 빨리 달라졌다. 팀장이 된 지 하루 만에 나는 함께 일할 사람의 조건을 헤아리고 있었다. 일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 똑똑하고 아이디어가 많으면서도 팀에 잘 섞이는 사람, 자기 생각이 분명하되 최종 결정은 상급자가 하도록 남겨두는 사람. 거기에는 내가 위에 보고할 때 나를 빛나게 해줄 만한 성과를 내는 사람이라는 조건까지 들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는 평직원으로서 다소 툴툴거리더라도 내 일만 잘하면 알아줄 것이라고 믿었다.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보다 상사의 기분을 얼마나 잘 맞추었는지가 중요해 보일 때면 모욕감을 느꼈다. 회사에 일을 하러 왔지 누구의 마음에 들려고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상급자가 되자, 시키는 일은 하면서도 대답이 퉁명스럽고 자기 노고를 몰라준다고 불평하는 직원과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에 그려놓은 불편한 직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평직원이던 내가 거기 있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면 회사 경내 광장에서 당시의 박 모 팀장과 고성을 주고받았던 일이 생각난다. 2014년 무렵 당시의 나는 내가 감당하는 업무량에 비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고 그 서운함을 상대가 알아듣게 하는 데 실패했다. 목소리는 커졌고 대화는 싸움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인사고과를 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한번 들이받아야 덜 억울할 것 같았다. 당시에는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그런데도 얼마나 인정받지 못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 말을 듣는 팀장이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내가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팀장이 되고 나서 감히(!) 저항하는 후배를 보았을 때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저렇게까지 화가 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싶으면서도, 그 화를 받아내며 일을 진행해야 하는 처지는 편하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내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옳은 말을 한 다음에도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보였다. 서로 감정이 상한 채로 다시 의논하고, 결정을 내리고, 결과를 만들어야 했다. 화를 낸 순간보다 그 뒤를 수습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과거의 상사들이 조금씩 이해되었다. 그들도 내 일만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 그들에게는 여러 일 가운데 하나였을 수 있고, 내가 정당하게 요구한 몫을 마련하려면 다른 누군가의 몫을 조정해야 했을 수도 있다. 내가 일을 잘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나와 일하기 편하다는 사실은 저절로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동안, 그들은 나를 어떻게 인정해야 일을 함께할 수 있을지 난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시의 내 불만이 모두 철없음이었다고 정리할 수는 없다. 상사가 된 뒤에야 알게 된 사정으로 과거를 설명하면 모든 갈등은 아랫사람이 아직 모르는 데서 비롯된 일이 되고 만다. 나는 그때도 나름의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다만 상사의 사정을 몰랐고, 상사 역시 내 사정을 끝까지 알려 하지 않았을 수 있다. 서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한쪽에 더 많은 결정권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팀장이 되고 나니 그 결정권이 내게도 주어졌다. 이제는 내 일을 잘하는 데서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그 결과까지 바카라임져야 했다. 내가 하면 빠른 일을 설명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는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결과를 전부 고치다 보면 결국 다시 내가 일하고 있다. 그렇다고 잘하는 사람에게만 계속 맡기면 그 사람의 불만이 쌓인다. 평직원일 때에는 눈앞에 주어진 일이 부담이었다면, 팀장이 된 뒤에는 그 일을 누구에게 어떻게 맡길지가 새로운 부담이 된다.
그 부담은 종종 농담으로 먼저 입 밖에 나온다. 2024년 9월, 팀장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서 강사가 물었다. 직원이 일이 너무 많다거나 자기 업무분장에 없는 일이라는 이유로 지시를 거절하면 어떻게 대응하겠느냐는 질문이었다. 강사는 직원의 말을 이렇게 제시했다. “팀장님, 저는 일이 너무 많아서, 혹은 제 업무분장에 없는 일이라서 이 일은 못하겠는데요?” 교육장에 앉은 팀장들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강사가 어떤 답을 바랄지 생각했다. 평소 하던 말을 그대로 내놓으면 정답은 아닐 것 같았다. 모두가 잠잠히 있는 사이, 뒤쪽에 있던 내가 농담조로 한마디를 던졌다. “나는 노냐?”
사람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실제로 일을 거절한 직원을 앞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만 가능한 농담이었고, 웃음이 터진 것은 적어도 낯선 말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일이 많고, 나도 내 업무만 하는 것은 아니며, 나 역시 내 상사인 부장에게 못 하겠다고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짧은 한마디 안에 들어 있었다. 나는 직원의 사정을 듣는 방법을 배우러 와서 내 사정을 먼저 이야기한 셈이었다.
평직원일 때의 내가 그 교육장에 있었다면 직원이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업무분장은 왜 있으며, 일의 한계를 밝히는 것이 어째서 태도의 문제가 되어야 하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틀리지 않다. 다만 팀장이 된 나는 그 직원이 하지 않은 일을 누가 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직원에게 맡기면 그 사람의 일이 늘어나고, 내가 하면 내 일이 늘어난다. 그렇다고 일이 끝날 때까지 조직의 요구를 미뤄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웃음이 나온 자리에는 그런 난감함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난감함이 너무 쉽게 직원의 태도에 대한 판단으로 바뀐다는 데 있다. 일이 많다고 말하는 사람을 바카라임감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 업무량을 다시 살필 필요가 줄어든다. 업무분장을 따지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부르면 일이 누구에게 얼마나 쌓였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팀장도 바쁘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일을 더 맡기는 판단까지 정당해지지는 않는다. 내 피로를 알아달라는 마음과 상대에게 일을 요구할 권한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을 때에는, 서운함조차 지시의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고 팀장의 어려움을 전부 소통 능력의 문제로 돌리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사람은 늘지 않는데 해야 할 일만 늘어나는 상황에서, 더 잘 설명하고 공감한다고 부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위에서는 성과를 요구하고 아래에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말할 때, 팀장은 그 부족분을 자기 시간으로 메우거나 누군가를 더 설득하게 된다. 그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설득에 잘 응하는 직원이 좋은 직원으로 보이기 쉽다. 조직이 해결하지 않은 문제를 누군가의 성실함으로 견디고 있으면서, 그 성실함을 사람의 기본 자질로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이면서 여전히 그 요구를 받는 사람이기도 하다. 팀장 위에도 상사, 부장이 있다. 내 판단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더 좋은 아이디어와 적극적인 태도를 요구하는 상사를 떠올려보면, 나는 어떤 직원이 될까. 납득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는데 거기에 내 열의까지 보태고 싶을까. 주어진 일은 하겠지만 마음까지 내놓으라는 요구에는 선뜻 응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냥 시키는 일만 기능적으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그런 때다.
그런데 그것은 팀장이 된 다음 날 내가 함께 일하기 싫다고 생각했던 직원의 태도였다. 시키는 일은 하지만 마음을 보태지는 않는 사람, 상사가 자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여겨 의욕을 거두는 사람. 내 위의 상사에게는 내가 그런 직원일 수 있었다. 나는 내 무기력을 설명할 때에는 업무의 방향과 조직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아랫사람의 무기력을 볼 때에는 그 사람의 태도를 먼저 살피고 있지 않았을까.
팀장이라는 존재는 보고하는 자리와 보고받는 자리를 오간다. 위에서는 내 판단을 존중해주기를 바라면서 아래에서는 내 결정을 따라주기를 바라고, 위에서 열의까지 요구하면 부당하다고 느끼면서 아래에서 기능적으로만 일하면 서운하다. 팀장이라는 자리가 불편한 것은 바카라임이 늘어서만은 아니다. 평직원일 때 비판했던 방식이 지금 내게 얼마나 편리한지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말을 잘 듣는 사람을 선호하는 상사를 비판하기는 쉬웠지만,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과 일을 끝내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서 요즘 이해되는 선배들의 모습에도 여러 결이 있다. 내 불평을 받아내면서도 일을 맡겼던 사람, 내가 미처 보지 못한 부담을 조용히 감당했던 사람은 뒤늦게 고맙다. 반대로 후배의 생각을 꺾어 자기 일을 편하게 만들었던 사람의 마음도 이제는 짐작할 수 있다. 두 경우를 모두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이해는 내가 어떤 쪽으로 가고 있는지를 저절로 가려주지 않는다.
평직원이던 나는 좋은 관리자는 일하는 사람을 보호해주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남아 있지만, 보호한다는 말의 무게는 달라졌다. 후배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면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생기고, 위의 요구를 그대로 넘기지 않으려면 그 요구에 대해 내 판단을 밝혀야 한다. 그 판단이 틀렸을 때에도 내 몫의 바카라임이 남는다. 예전에는 선배가 해주기를 바랐던 일을 이제는 누군가 내게 바라고 있다.
팀장이라는 호칭에는 금세 익숙해졌다. 이제는 점심을 먹다가도 누가 부르면 나를 찾는 줄 안다. 그러나 나와 일하는 사람이 지금 어떤 마음으로 그 호칭을 부르는지는 여전히 알아듣기 어렵다. 보고할 일이 있어서인지, 결정을 내려달라는 것인지, 더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나는 그 말을 듣기도 전에 그 사람과 일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부터 생각할 때가 있다. 나 같은 직원과 함께 일하는 것은 불편하다.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고,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하며, 납득되지 않는 지시에는 쉽게 마음을 내주지 않는 사람. 오래도록 나는 그런 나를 이해해줄 상사를 바랐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사람도 같은 것을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그를 다루기 어렵다는 말에는, 내가 그의 상사로 일하는 데 아직 서툴다는 고백도 섞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