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 틀렸고, 나는 기다렸다

점괘를 들은 뒤 달라진 삶의 해석

byMinseung Kang

내 생애 처음 보는 신점이었다. 경기 남양주의 점쟁이는 내 몸에 열두 신이 번갈아 드나든다고 했다. 그래서 감정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고, 다른 사람 눈에는 ADHD가 있는 사람처럼 보일 거라고 했다. 그해 들어 좋지 않은 일이 잇따랐으니 나는 그 이유를 무속에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나는 그렇게 부산한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앉은 사람도 잘못 보면서 앞으로 닥칠 일은 어떻게 안다는 걸까. 뒤에 이어진 말들도 믿기 어려웠다.


그가 내놓은 길은 셋이었다. 앞으로도 이어질 고통을 그대로 견디거나, 신내림을 받되 어중간한 신기로 그 길에서도 죽도록 애쓰거나, 천만 원을 들여 굿을 함으로써 낀 살을 푸는 것. 내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일과 그것을 없애는 값을 정하는 일이 한자리에서 끝났다. 신살이 풀리지 않아 이런 일이 생겼다는 판단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를 다시 찾아갈 이유도 생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영험함을 믿게 할 근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생각해보겠다고 짧게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 뒤에는 전북 익산으로 향했다. 남양주에서 들은 말은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잘 잊히지도 않았다. 익산의 점쟁이가 남양주와 전혀 다른 말을 한다면 그날의 찝찝함을 떨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대로 같은 말을 한다면 한 사람의 억측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름의 교차검증이었다. 물론 둘 다 틀렸다 해도 그해 내게 닥친 일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제는 하나씩 처리하면 된다. 다만 서로 무관한 일들이 왜 하필 이때 한꺼번에 생기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익산에서 듣고 싶었던 것은 해결바카라보다 이 시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줄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익산의 무당도 내가 스님 팔자에 가깝고 마음대로 죽기도 힘든 사람이라고 했다. 큰 운이 바뀌는 시기의 끝에 와 있어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이 한꺼번에 몰리고, 그 때문에 사건사고가 잦다는 말도 남양주에서 들은 것과 비슷했다. 첫 점쟁이는 아무것도 맞히지 못했다고 여겼는데, 같은 말을 듣자 그 판단이 흔들렸다. 점술가들 사이에 통용되는 어떤 레토릭 같은 건 아니었을까. 그렇게 의심하면서도 두 사람이 같은 곳을 가리키는 듯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그러다 그는 한참 나를 들여다보더니 그동안 어떻게 그렇게 살았느냐고 물었다. 많이 힘들었겠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에게 들었다면 내 사정을 알고 건네는 위로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내 생활을 모르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달랐다. 내가 잘못 살아 모든 일이 꼬인 게 아니라, 버티기 어려운 시간을 지나왔다는 판정처럼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미래를 물으러 익산까지 갔는데, 돌아와서도 자꾸 떠오른 것은 그가 알아본 듯 말한 나의 과거였다.


팔자에도 공짜는 없다고 했다. 힘들게 살아온 대신 두 아이를 얻었고, 말년에는 좋은 일이 따를 거라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 셈법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불행의 대가로 지급된 보상이 아니다. 그런데도 아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올랐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됐다. 그는 내 직업을 모른 채 쉰 살 무렵 명예운이 크게 들어온다며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하는 일도 모르면서 훗날의 명예를 어떻게 아는가 싶었다. 한편으로는 직업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미리 준비한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바라는 미래에 가까운 말일수록 귀를 기울이게 됐고, 그럴수록 내 판단을 믿기 어려웠다.


나는 짐짓 으름장을 놓듯 일 년 뒤에도, 쉰이 넘어서도 다시 와서 확인하겠다고 했다. 그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언제든지, 얼마든지 오라고 했다. 그 자신감이 예언의 정확성을 보증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잠시 그를 믿고 싶어졌다. 남양주에서는 앞으로 겪을 고통과 그것을 막을 비용을 들었고, 익산에서는 이미 겪은 고통을 알아봐 주는 말을 들었다. 어느 쪽도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았는데, 익산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복채가 적게 느껴졌다.


익산의 말은 그 자리에 두고 올 수 없었다. 그는 2027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지난 십 년의 운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제 그 시기를 정리할 일들이 몰리면서 사건사고가 잇따른다는 설명이었다. 집에 돌아와 그 시간을 거꾸로 세어보았다. 프로그램으로 상을 받았고 팀장으로 승진했다. 내게는 힘들게 일해 얻은 결과였지만, 좋은 운이 머물렀다는 증거로도 볼 수 있었다. 지난 십 년을 그렇게 읽기 시작하자 아직 오지 않은 쉰 살의 명예운까지 그럴듯해졌다. 좋은 시절이 저물고 있다는 말은 최근의 곤란함에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일이 어긋나는 까닭을 매번 내 판단이나 성정에서만 찾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위로가 됐다.


익산에서 돌아온 지 며칠 뒤, 숨을 쉬다가 왼쪽 등과 옆구리 사이가 덜컥했다. 그때부터 몸을 틀거나 걷고 기침할 때마다 결렸다. 무리한 운동을 하다 다친 것도 아니었다. 숨까지 쉬지 말라는 것인가 싶어 웃음이 났다가, 평소처럼 지내다 몸에 문제가 생긴 일마저 대운이 바뀌는 과정에 넣어보고 있는 나를 알아차렸다. 통증은 몸에서 일어났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벌써 점괘의 사례가 되고 있었다.


오래전 들었던 다른 예언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한 점쟁이는 서른넷부터 인생이 풀리니 회사를 그만둘 거라면 그 뒤로 미루라고 했다. 서른넷이 된 해 일곱 달이 지나도록 달라진 것은 없었다. 회사와 가정에서 마음 쓸 일만 늘었다. 노랗게 물들였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거울을 보면서, 원래 살아가는 일이 힘든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 점쟁이에게 화를 냈지만 몇 년 뒤에는 마흔쯤 풀린다는 다른 말을 기다렸다. 서른넷이라는 숫자가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도 좋은 때가 따로 예정돼 있다는 기대는 버리지 못했다.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은 이유를 점괘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다. 생활을 꾸려야 했고 일도 남아 있었다. 신중해서 머문 시간과 두려워서 미룬 시간, 사정이 허락하지 않아 버틴 시간이 세월이 지나면 서로 닮는다. 예언은 그 시간에 하나의 이름을 붙여준다. 약속한 나이가 지나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기다리는 동안 하지 않은 일과 기다렸기에 해낸 일을 따로 떼어 계산하기는 어렵다.


점을 보는 일도 어쩌면 점쟁이의 모호한 말에 듣는 사람이 자기 경험을 채워 넣는 과정인지 모른다. 가까운 사람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에는 떠올릴 얼굴을 찾고, 큰 운이 오기 전에 정리할 일이 있다는 말에는 지금 겪는 문제를 대입한다. 맞지 않는 말은 흘려보내고 맞는 말에는 날짜까지 붙인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적용될 말을 자신만의 정확한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바넘 효과라고 한다. 그러나 익산에서 받은 위로를 착각으로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의 말에 기억을 보탰고, 덕분에 흩어진 일들을 잠시 견딜 만한 이야기로 묶었다. 그 말이 정확해서 위로받았는지, 위로받았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느꼈는지는 구별하기 어렵다.


디즈니+의 〈운명전쟁49〉는 점집 안의 사적인 판단을 여러 사람 앞에 놓았다. 신점과 사주, 타로와 관상 등 서로 다른 방법을 쓰는 운명술사들이 같은 과제에 답한다. 한 사람의 사망 원인이나 학력, 재산, 혼인 여부에 관한 판단이 여러 입에서 비슷하게 나올 때면 내담자가 혼자 기억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두 무당에게 공통된 말을 들은 나도 그 장면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운명이라는 틀이 실제로 있고 그들이 저마다 다른 부분을 읽어내는 것은 아닐까.


누구를 만나고 어디에서 일하며 언제 실패할지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서른넷의 나는 왜 그토록 애를 썼을까. 그 뒤에 얻은 성취는 무엇이 되는가. 반대로 모든 것이 내 선택의 결과라면 태어난 집과 시대, 처음부터 가질 수 없었던 기회도 내 바카라임인가. 사람마다 선택할 수 있는 길의 수부터 달랐다. 운명이라는 말은 실패한 사람을 잠시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과 불안정한 노동까지 팔자로 돌리면, 그런 조건을 만든 사람과 제도는 바카라임에서 빠져나간다. 누구나 노력한 만큼 얻는다는 말도 같은 차이를 다른 방향에서 지운다.


내 앞의 문제는 더 작고 직접적이다. 2027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따라 시도를 멈춘다면, 달라지지 않은 내일을 다시 나쁜 운의 증거로 삼게 될지 모른다. 오래가지 않을 인연이라는 말을 듣고 상대를 처음부터 경계한다면, 관계가 멀어진 뒤에는 예언이 맞았다고 여길 수 있다. 점괘가 미래를 알아본 것인지, 그 말을 들은 사람이 그 미래를 만드는 데 가담한 것인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익산에서 돌아온 뒤 작은 통증에도 2027년을 떠올린 내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에는 아버지 세대가 집안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찾아가던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 이름에 쓸 한자나 이사 날짜, 결혼할 사람과의 궁합까지 왜 정작 그 삶을 살아갈 사람들에게 묻지 않는가 싶었다. 참고만 한다면서 날짜가 나쁘면 이사를 미루고, 이름에 부족한 기운이 있다면 글자를 고쳤다. 이제는 그렇게 해야 마음이 놓였을 두려움을 조금 이해한다. 경험이 쌓이면 판단에 자신이 생길 줄 알았는데, 어떤 선택은 오래 살아온 만큼 더 무거워진다. 자신이 고른 일이 몇 년 뒤 가족에게 어떤 결과를 남길지 누구도 미리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묻는 일은 답을 얻으려는 시도이면서, 그 불확실성을 혼자 감당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나 역시 그 마음으로 익산에 갔다. 그에게 위로받은 일과 결정을 맡기는 일은 다르다. 그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설명해줄 수 있어도, 일을 미룬 뒤의 시간을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점집에 가지 않는 사람도 전문가의 전망이나 조직의 판단, 주변의 기대에 기대어 결정한다. 그 말들은 점괘보다 검토할 근거가 많다. 그래도 일이 잘못되었을 때 누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마음까지 없애주지는 못한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의 일을 결정하기 위해 그 답부터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조건이 있고, 지난 십 년의 성취에도 내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몫이 있다. 그렇다고 2027년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따라 지금 할 수 있는 일까지 미룰 생각은 없다. 몸이 아프면 원인을 살피고, 일이 어긋나면 손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결과를 모두 내 바카라임으로 돌릴 수는 없어도, 판단마저 점괘에 맡길 수는 없다.


일 년 뒤에는 익산의 무당을 다시 찾아갈 생각이다. 그가 맞힌 말과 틀린 말을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서른넷의 예언은 틀렸지만, 나는 그 뒤에도 좋은 때가 올 나이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그가 내 미래를 얼마나 알아봤는지만 묻지 않으려 한다. 그의 말을 들은 뒤 나는 무엇을 기다렸고,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도 돌아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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