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쓴 글에서 다시 건져 올린 장면과 생각들
오래전에 쓴 글을 다시 읽다가 무엇에 관해 썼는지는 잊었는데 어떤 문장만은 기억나는 일이 있었다. 그날의 주장보다 비가 그친 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던 냄새가, 돌아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던 시간이, 벽에 묻은 라면 국물을 닦아야 했던 저녁이 오래 남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한 흔적도 보였다. 아름답다고 여겼던 표현이 실은 설명을 피하는 수단이었던 날도 있다. 그래도 몇몇 문장에는 그때의 내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견디려 했는지가 남아 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쓴 글에서 그런 대목들을 다시 꺼냈다. 시라고 부르기에는 설명이 많고, 산문이라고 하기에는 자꾸 장면과 소리에 기대는 문장들이다.
계절은 단숨에 고개를 틀어 버렸다
1. 그 외의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2. 그러나 그 많은 종류의 바람들 중 하나를 굳이 산들바람이라 호명한 주체가 사람이듯, 산들바람은 그들이 느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산들바람이 되어 그들의 귓가를 타고 흐른다.
3. 이 가을에 회사의 업무가 낙엽처럼 쏟아지는 건 차라리 다행이고 위로라고 생각했다.
4. 데워질 대로 데워진 아스팔트에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질 때,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냄새만큼 나는 이 냄새를 좋아해.
5. 찬 바람을 쐬던 이가 집으로 갓 들어오면 아궁이에서 불을 쬐던 이의 냄새가 난다.
6. 거짓말 같은 코 앞의 약속을 계절은 매년 잘도 지켰다.
7. 꽃을 시샘하는 꽃을 나는 그대라고 부른다. 마중을 서둘러야지.
8. 비가 내리면 온 세상이 다 젖어도 택시는 마른다 내 마음도 마르고.
9. 계절은 단숨에 고개를 틀어 버렸다.
10. 파란색에 가까운 흰색, 그것은 새벽에 부서지는 제주의 포말빛이다.
11. 볕이 따스해서, 바람이 보드러워서 신경질이 다 난다. 상실감이 난데없다. 철 모르는 미인들이 길섶에서 봄을 판다.
12. 스며나온 물기에 달빛이 반짝거리는 봄밤이라니요.
13. 목이 타는 이 계절에 수박이 나고 목이 아픈 그 계절에 귤이 나는 걸 보면,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아 견디는 힘으로 삼는다.
14. 지독하게도, 간밤에 맞이한 손님은 보통 새벽에 먼저 방을 나섭니다.
15. 티끌보다 작은 호르몬에도 하루를 며칠을 망치곤 하는 우리는 밤이 데려오는 손님들을 쉽게 돌려보내지 못합니다.
16. 간절기에 한 번씩 앓는 것은 다가오는 계절에 대한 몸의 준비일 겁니다. 다시 간절하라고요.
17. 물이 녹으면 봄인가 하고 정전기가 일면 겨울인가 하고 바람이 불면 너인가 한다.
18. 입춘에 내리는 눈이라니, 봄은 초속 5cm로 달리는 열차 안에서 나처럼 조바심을 내고 있을까.
19. 통유리창이 등뒤로 드넓은 내 자리에서 첫눈이 내렸다는 소식을 축하 인사와 함께 들었다.
20. 언젠가는 내릴 눈을 의심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눈을 늦추는 계절을 괜히 원망하듯이, 이제야 빛을 보시네요.
21. 화려하게 피어올랐다가 곧 꺼져버리는 빛처럼, 기쁨의 시간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22. 바람이 지나치게 세지 않고 햇빛은 뜨겁지 않으며, 몸도 마음도 달릴 수 있는 날은 기다린다고 오래 머물러주지 않는다.
23. 방금 전까지 자동차와 부딪쳐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 위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24. 환호와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서 사람들은 내년을 준비하듯 묵묵히 길을 정리하고 있었다.
25. 물을 부은 뒤에는 왼손에 컵라면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참치가 금방이라도 빠질 듯 매달린 김밥을 집어 먹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26. 그녀가 매번 스스로 다짐하는 것처럼 그녀의 마음은, 10년 전과 비교해 볼 때 몸과 생각은 늙었을지라도, 전혀 늙지 않았다.
27. 아내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남자는 이 아이는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저 멀디 먼 태고적부터 알고 지내던 영혼이구나 싶었다.
28. 왜 그리 일찍 결혼했냐고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밤이 주는 감상은 보통 몸에 해롭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렸거든요.’ 라고 답하고 싶은데 이건 너무 문어체라 그냥 ’더 이상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라고 답하고 만다.
29. 강남 나이키에서도 운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willingness)는 팔지 않듯 도시인에게 필요한 건 웬만하면 다 구비돼 있는 편의점에서 사랑은 팔지 않는구나.
30. 바다에서 아이가 끝내 이기지 못한 물이라서 육지에서 아비는 끝내 이겨내야 한다.
31. 노을이 그렇게 예뻤다는데 전화 한 통이 없었어.
32.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나는 하룻밤 사이에 엄청난 손해를 본 기분.
33. 어떻게든 미래로 나아가려는 공주의 발목을 과거는, 아니 과거가 현전하는 현재는 악령처럼 끝끝내 붙들고 늘어진다.
34.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한 순간에도 변하는 것을 마치 그 때는 몰랐다는 듯이, 절대 잊지 않으려고 피부에 문신을 이식하듯이, 그 때는 왜 그렇게 네 전번을 꾹꾹 눌러썼나 몰라.
35. 아사코는 그 만남을 통해 인간과 고양이는 삶의 시간이 서로 달리 흐르고 있음을, 우리가 이렇게 잠시나마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의 시간의 축이 잠시 맞닿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36. 시간이 흘러서 흐릿해지는 것은 사진인가, 기억인가. 그도 아니라면 가능성인가, 그리움인가.
37. 베개가 온통 젖을 정도로 슬픈 꿈을 꾸었는데, 깨어서는 기억에 없고 여남은 감정이 며칠을 데려가버리는 것처럼.
38. 울리지도 않는 전화를 자꾸 들추어보는 것은 나도 기억을 잃어버려서일까.
39. 숨기는 것이 속이는 것은 아니지만은, 솔직함이 꼭 미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은 그래도 몇 년을 짐처럼 이고 온 어떤 기억을 퐁신할 저 눈 위에 풀어놓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다.
40. 예정에 없던 휴가는 새벽에 밀려든 오한 같은 외로움 때문이었다.
41. 쿠퍼와 아멜리아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우주가 아니라 지구였던 것처럼 이야기가 향하고 있는 곳 역시 상대성 이론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의 사랑이니까.
42. 그래서 그는 다만 삶이라는 고단한 순례길에서 허기가 질대로 진 나에게 따스한 정종이나 계란말이 혹은 문어 소세지를 위로처럼 내어놓는다.
43. 결말이 알려진 영화처럼 미래가 정해져 있다면, 그러니까 예지는 가능하지만 바꾸거나 대비할 수 없다면 그 지긋한 노력과 헌신들은 대체 왜 존재해서 이름까지 얻었는가.
44. 흑심을 품은 내가 온통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꼭 눈발이 바람에 날리는 풍경 속에 서 있는 것만 같아서.
45. 그러니까 사실은 이들의 사랑이 꽃피울 수 있는 건 대지와 우주만큼의 거리 덕분이다.
46. 그러나 역시 내가 사랑하는 것 중에는 그이처럼 무용해서 아름다운 것도 있다.
47. 그곳에서 누군가와 어떤 관계로 맺어진들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나의 누군가로 거듭나기까지 들여야 하는 품과 정성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보다 때로 더욱 고단하기 때문에.
48. 내가 기억하던 외할머니와 눈앞의 사람 사이에는 쉽게 건널 수 없는 거리가 생겨 있었다.
49. 그러나 내 삶을 모른다는 사람이 생년월일과 얼굴을 보고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은 개인의 친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사실처럼 들린다.
몸은 오래된 일을 기억한다
50.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역정, 그리고 나의 주저함이 벽돌들 사이사이에 파묻혀 있었다.
51. 요나만큼은 아니더라도 흙을 만지고 밟고 가까이 해본 적 없어 그런가 콘크리트 사이에서 올라온 강아지 풀을 들판의 야생화들을 꺾어 다발로 만드는 것처럼 작은 손으로 싸매더니 내게 쑥 내민다.
52. 현관 문이 열리자마자 확인된 사람의 아이는 마치 인형 뽑기의 그것처럼 ‘선택’받은 양 우쭐대고 다른 아이들은 우리 엄마 아빠가 아니네..
53. 지금 이곳의 나는 간밤엔 잠에 취해 꿈 한번 꾸지 않고 잤고, 새벽엔 무언가에 쫓기듯 깨어나 애들부터 입에 뭔가를 구겨넣는다.
54. 몽골의 고비 사막에 봄가뭄이 들면 우리 아이가 기침을 하듯 우리가 여름에 에어컨을 계속 틀면 이곳에서는 존재의 여부도 알지 못하는 북극의 곰이 익사하고 만다.
55. 젓가락 끝에서 무너지는 저녁 나는 갓 출소한 죄수마냥 다시는 이러지 않겠노라 두부만 꾸역꾸역 입구멍에 쳐넣는 것이다.
56. 아이들을 데리고 귀가하니 시간은 그제야 제 호흡을 찾았지만 이제는 체력이 바닥났더라는.
57. 격년으로 몇 천만원 씩 뛰는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걸 구하지 못하면 처자식이 당장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는 절박감에 대출 창구에서 강제로 발가벗겨진 듯한 무참함을 견뎌내는 가장의 마음을 당신은 짐작이라도 하겠는가.
58. 밤 늦게까지 지혈이 안 돼서 새벽에는 끝내 입 안에 피를 온통 머금고 응급실까지 갔었는데, 몇 년이 흘렀다고 이제는 그게 왼쪽이었는지 오른쪽이었는지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 것이다.
59. 지난 주 목요일 밤부터는 전에 느껴본 적 없는 오한이 돌더니 금요일부터는 위장 내벽을 누군가 기어오르기라도 하려는 듯, 잔뜩 독이 오른 손톱 열 개를 바짝 세워 할퀴어댔다.
60. 서너살쯤 되었을까, 아빠 등에 업혀 가던 어떤 아이가 뒤를 돌아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마치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언제부턴가 나를 알았던 것처럼 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네왔다.
61. 발목과 어깨가 아픈 것은 아무 데나 주저 앉으면 달래졌지만 마음은, 배낭의 내용물이 데려온 과거를 재정리하느라 여행 내내 제대로 한번 쉬질 못했다.
62. 힘은 속도와 무게에 정비례하니까 거대한 몸과 섬세한 마음이 여기저기 불필요하게 부딪히면서 상처를 입어왔던 걸까.
63. 서자로 들어온 아이가 아무리 똑똑하고 유능해도 게으른 데다 무능하기까지한 적자의 피 한방울을 이기지 못하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 한번 웃겨보려고 쓴 문장이 내용이 있을 리 없는 미인의 오운완 샷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64. 누군가는 하루를 일기로 남기고,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잠이 들며,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문장을 붙잡았다.
65. 도열하지 않아도 되는 집, 발소리가 반가운 사람, 문을 열었을 때 숨지 않아도 되는 공기.
66. 정말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 분재를 만든다며 가지를 꺾고 줄기를 비틀고 뿌리를 잘라낼까.
67. 부모가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내놓는 기억은 언제나 부모에게 유리하게 편집돼 있다.
68.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의 발소리를 듣고 몸을 굳혔는데, 내 아이는 나를 보자 발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69. 예전에 둘째를 할머니 집에 하룻밤 맡기고 돌아온 날, 나는 집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침묵 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고 썼다.
70. 우유팩을 떨어뜨린 내 잘못과 그 잘못이 교사에게 내 얼굴을 때릴 권리까지 주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당시의 나는 둘을 나눠 생각할 언어가 없었다.
71. 한 아이에게 평범함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사는 세계는 충분히 설명된다.
글을 쓰고 일을 한다는 것
72. 미래를 위해 돈을 벌고 보험을 들고 사람 보는 눈을 키우고 무엇이든 배워야만 하고, 온통 미래를 위한 삶이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73. 손실된 기억은 그 장소에, 그 음악에, 그 시간에 묻어 있었던 기억-바이러스에 의해 다시 복구된다.
74. 이 아이에게도 여러분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 남의 호사에 함께 기뻐할 줄 알고 남의 비사에 함께 슬퍼할 줄 알도록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자에게 한없이 관대하도록 가르치겠습니다.
75. 회사가 직면해 있는 문제를 사실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고, 귓등으로 들려온 어제의 말 한마디가 오늘 나의 하루를 다 무너뜨리는 느낌.
76. 내년은 다르다, 우린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는 오만한 단언 같은 자기 주문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삶이라는 것이 새해를 맞이해서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불안한 예감 때문일 터.
77. 예전에 썼던 글들을 데려와서는 구조를 문단으로 부수고 그걸 다시 문장으로 분해해보니 재게시할 만한 글들이 많지 않다.
78. 잔변감 같은 바카라임감에 일단 가방은 바리바리 싸왔다만, 저녁을 먹으면 잠이 별처럼 쏟아질 것이다.
79. 아무리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라지만 뼈아프게 설복할 만한 지적을 해줄 수 있는 동료가 있다면 당장은 다소 불쾌할지언정 귀갓길이 이렇게 고독하지는 않을 것이다.
80. 설렘이 문장을 그리고, 양심이 문장을 고친다.
81. 담배 한 개비에 원고 한 줄 커피 한 모금에 자막 한 토막 마른 세수 한 번에 밝아온다 정신이 여름 밤이.
82. 이를테면 같은 표현이라도 문장의 말미를 긍정형으로 바꾼다든가 하면 해질녘 한강을 가로질러 한줄기 바람이라도 불어올까 막연히 나는 기대하고 있다.
83. 반세기가 넘는 회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시시대대로 명멸했던 인물들의 말로를 톺아보자면 곱게 늙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84. 그런데 복수의 대상들은 저지른 업보가 이미 한몸처럼 얽히고 설켜서 동은이 풀어버린 나사 하나에 전부가 스스로 무너져내렸다.
85. 살아서는 경찰과 언론,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매 순간을 촘촘히도 시달렸고 죽어서도 애도와 안타까움을 빙자한 수많은 표현과 입장, 죽음 자체에 대한 불필요하게도 섬세한 묘사들로 좀처럼 쉬지 못한다.
86. 모 후배를 보면, 내가 후배의 계절을 지날 때 뭔가를 잘 모르거나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면 정중하게 물어보거나 차라리 난장판을 치걸 그랬다 싶어.
87. 그의 발걸음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향하지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의 언젠가, 그가 무엇을 하거나 되기를 바라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끝내 답하지 않는다.
88. 불러주는 이 하나 없이, 알아주는 자 하나 없이 홀로 자신을 갈아넣고 있는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 규남의 내달림은 그래서 다소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89. 어떤 문장은 지금도 내가 쓴 것 같고, 어떤 문장은 낯선 사람의 기록처럼 느껴집니다.
90. 사람은 자신에게 유리한 장면만 기억하고, 잘못을 사정으로 바꾸며, 타인의 상처를 자신의 고통 안에 묻어버릴 수 있다.
91. 오히려 문장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모순을 더 그럴듯하게 숨길 수 있다.
92. 존댓말로도 사람을 기능처럼 부릴 수 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바카라임을 떠넘길 수 있다.
그다음에 남는 질문
93. 삶이 서글프다고 혼자 끓여 먹던 라면을 벽을 향해 집어던지면, 벽에 덕지덕지 묻은 라면 국물을 이내 닦아내야만 하는 것이 삶이다.
94. 판단의 유예는 중립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한쪽 편에서 움직이는 밤에는 가장 강한 쪽을 돕는다.
95. 역사 앞에서의 용기는 때로 대단한 신념보다, 두려움 때문에 포기했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일에 가깝다.
96. 전화를 한 번 더 돌린 사람, 문을 열어준 사람, 잘못된 명령을 조금 늦게 수행한 사람, 담을 넘은 사람, 돌아갔던 길에서 다시 차를 돌린 사람의 작은 선택이 역사의 속도를 바꾼다.
97. 한 아이를 한 명의 가해자에게서 떼어내는 것과 그 아이에게 자기 삶의 선택지를 돌려주는 것은 다르다.
98. 후배가 선배가 되면 같은 방법을 다시 사용했고, 관행은 사람보다 오래 살았다.
99. 영화의 희망이 서늘한 것은 그 다음 길을 여전히 아이 혼자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100. 예의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형식이 아니다. 상대에게 행사할 수 있는 힘을 스스로 제한하는 일이다.
문장 하나로 그날을 되찾을 수는 없다. 다만 무엇을 보았는지보다 어떻게 보았는지가 남는 때가 있다. 오래된 글을 다시 읽는 일은 내가 그 사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또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