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이라는 이름으로 몸을 내어주던 시간
오늘은 케이던스 80 이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케이던스는 자전거 페달을 1분 동안 몇 번 돌리는지를 나타내는 수치인데, 일정한 속도로 오래 달리려면 분당 80회에서 90회 정도가 좋다고 들었다. 기어를 올리면 속도가 빨라지는 대신 허벅지에 묵직한 부담이 오면서 숫자가 80 아래로 떨어졌고, 기어를 내리면 숫자는 올라갔지만 차체가 흔들리거나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 계기판을 보다가 몸의 상태를 살피고, 다시 숫자를 확인하며 페달을 밟았다. 다리와 허리, 호흡과 심장이 어느 지점에서 함께 견딜 수 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일정하게 맞추려고 하는 동안 몸은 오히려 리듬을 잃었다. 내 몸에 맞는 속도를 찾으려고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몸을 권장 수치에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케이던스 80은 더 멀리 가기 위해 참고할 기준이었지만, 여기에 천착하다보니 어느새 이 자체가 달리는 목적이 되었다. 숨이 가쁘거나 허벅지가 당겨도 기어를 바꾸고 속도를 낮추기보다 내 몸이 아직 기준에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몸을 이해하기 위해 켠 계기판 앞에서 나는 몸의 말을 의심하고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려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다음 날은 휴일이었지만 전국에 내린 폭우로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일을 나눠줄 수도 있었지만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맡겼다가 다시 손을 보는 것보다는 내가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 마음이 놓였고, 그 방식에 익숙해진 나는 그것을 나의 리듬이라고 여겼다. 자전거 위에서는 몸을 숫자에 맞추려 했고, 회사에서는 일을 내려놓지 못하는 몸을 바카라임감 있는 사람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팀원들을 평가할 때 살피는 것은 크게 세 가지였다. 맡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가, 얼마나 열의를 가지고 임하는가, 관행에서 벗어나 얼마나 창의적으로 생각하는가. 함께 일하는 사람의 능력과 태도를 판단하는 데 필요한 질문들이었다. 모든 일을 같은 사람이 떠맡을 수는 없고, 한 사람의 부주의가 다른 사람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으니 평가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다만 일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 열의가 부족한 사람, 새롭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다른 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불편하다는 판단이 그 사람 전체에 대한 판단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 기준은 타인에게 향하기 전에 나를 먼저 붙들었다. 어떤 업무든 제대로 끝내야 했고, 맡은 일에는 열의를 보여야 했으며, 이전과 다른 결과를 내놓아야 했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잠시 안도했지만 그다음에는 더 높은 기준이 기다렸다. 한 번 해낸 일은 곧 기본값이 되었고, 그만큼 해내지 못하면 후퇴한 것처럼 느껴졌다. 성실성은 나를 보호하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계속 증명해야 하는 자격이었다. 아무도 분당 80회를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 계기판을 내려다보며 부족한 숫자를 채우려 했다.
이런 습관은 일상 곳곳에서 익숙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방송 프로그램은 시청률과 화제성으로 비교하고, 회사원은 실적과 평가등급으로 줄을 세운다. 운동을 하면 속도와 거리, 심박수와 소모 열량을 기록하고, 잠을 자고 난 뒤에도 얼마나 깊이 잤는지 점수로 확인한다. 수치는 서로 다른 사람과 시간을 같은 표 위에 올려놓아 어제보다 나아졌는지, 다른 사람보다 뒤처졌는지, 들인 비용만큼 성과를 냈는지 빠르게 판단하게 해준다.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를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는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점 더 많은 것을 측정하려 한다.
그러나 측정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숫자는 측정하기 쉬운 것을 먼저 보여준다.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알 수 있지만 한 편의 방송이 어떤 사람에게 얼마나 오래 남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업무 처리량은 셀 수 있어도 일이 잘못되지 않도록 동료가 미리 살핀 시간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는다. 출근한 날과 완성한 문서는 남지만, 그 일을 해내느라 잃은 잠과 관계, 몸의 통증은 평가표 바깥에 놓인다. 측정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처럼 취급되면, 평가받는 사람도 표에 들어가는 것부터 생산하게 된다. 무엇을 했는지보다 무엇이 실적으로 남는지가 먼저 고려된다.
평가표를 의식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누군가의 지시가 없어도 사람은 스스로를 관리하게 된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시키고 작업량을 확인하며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나무라는 관리자는 여전히 있지만, 그 역할의 일부를 이제는 각자가 맡는다.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진행 상황을 기록하며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다. 회사가 요구하기 전에 자격을 갖추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퇴근 후에도 배운다. 운동과 휴식까지 관리하며 내일 더 효율적으로 일할 몸을 준비한다. 통제는 명령의 모습만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지와 함께 일상 안으로 들어온다.
일에서 자율성을 얻을수록 이런 관리는 오히려 더 깊어질 수 있다. 업무의 범위와 끝이 분명하면 일을 두고 나오기도 비교적 쉽지만, 자신의 판단과 창의성을 투입한 일은 퇴근한다고 쉽게 멈추지 않는다. 내가 기획한 프로그램과 내가 내린 편성 판단에는 내 이름이 붙는다. 결과가 좋으면 성취감도 크지만, 실패했을 때에는 업무의 실패를 내 부족함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자신이 만든 것에 애착을 가질수록 사람은 더 많은 시간과 감정을 자발적으로 내놓는다.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말에는 분명 기쁨이 있지만, 그 기쁨 때문에 일과 자신 사이에 거리를 두기가 어려워지기도 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구상을 외부의 형태로 구현하는 활동에 주목했다. 머릿속의 생각을 물건이나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자신이 만든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문제는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자신이 만든 것이 오히려 자신을 지배할 때 생긴다. 이 생각을 내 생활에 겹쳐보면, 내가 만들어낸 성과가 다음 목표가 되고 그 목표가 다시 나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돌아오는 순간이 보인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 일도 나를 규정하고 있었으며, 내가 확인하던 수치가 어느새 나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설명되는 사람에게 능력은 여러 특성 가운데 하나로 남기 어렵다. 무엇을 얼마나 빨리 생산할 수 있는지, 조직에 어느 정도 이익을 주는지, 얼마나 오래 일할 수 있는지가 그의 가치를 가늠하는 언어가 된다. 채용할 때에는 역량을 보고 조직 안에서는 성과를 평가하며, 몸이 아프면 언제 업무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묻는다. 이 언어에 오래 익숙해지면 자신을 소개할 때도 직업과 경력, 실적부터 꺼내게 된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시간의 나는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쉬는 동안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보낼지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회사의 탐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일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하기 어렵고, 능력을 인정받으면 더 많은 기회와 보상이 생긴다. 일을 잘하는 데서 오는 기쁨도 분명하다. 자신의 일을 바카라임지고 이전보다 잘해내려는 태도에는 존중할 만한 것이 있다. 다만 유용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이 삶의 일부를 넘어 존재의 조건이 되면, 일을 해내기 위해 무엇을 내놓고 있는지 묻기 어려워진다. 살아남고 인정받고 사랑하는 사람을 부양하려는 마음으로 우리는 기꺼이 자신을 더 쓸모 있는 형태로 바꾸어간다.
2008년의 어느 달, 월급을 받자 제일 먼저 빚부터 갚았다. 한 달 동안 일한 대가로 다음 월급날까지 살아야 했지만 늘 부족했고, 근무시간과 업무량이 적어 보이지 않는데도 왜 매달 같은 자리인지 알 수 없었다. 일을 더 해야 하는지, 꿈을 덜 꾸어야 하는지 생각했다. 월급을 받은 기념으로 읽고 싶은 바카라을 골랐더니 여덟 권에 10만 8천 원이었다. 한 달이 아니라 평생 두고 읽을 수도 있는 바카라들이었지만 선뜻 사기에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일해서 받은 돈은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다음 달까지 살아갈 비용으로 먼저 나갔다.
서울에서 살면서 나는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더라도 그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는 비용이 들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도, 지친 몸을 눕혀 쉬는 동안에도 생활비는 필요했다. 돈을 버는 일을 잠시 멈출 수는 있어도 살아가는 데 드는 돈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쉬어야 한다는 몸의 요구와 쉬는 동안에도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같은 저녁에 나를 붙들었다.
나의 수명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 시간이 다할 때까지 살아갈 비용이 필요하다는 것은 안다. 내게는 그것이 언제까지일지 모르는 노동의 시간으로 느껴졌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일하는 날도 있겠지만, 하기 싫은 일을 견디며 다음 달을 마련해야 하는 날도 계속될 것이다. 한 달을 버틸 돈을 벌고 나면 그다음 달이 기다리고, 그달을 지나면 다시 살아갈 날들이 남는다. 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지쳤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반복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디에 들어가 갇히는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은데도 계속해야 하는 시간. 그렇다고 스스로 삶을 끝낼 수는 없으니, 나는 다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다음 날을 마련해야 했다. 다음 월급날까지 버틴다는 말에는 그 뒤의 월급날까지 다시 버텨야 한다는 뜻이 이미 들어 있었다. 하루를 견뎌낸 자리에는 견뎌야 할 다음 하루가 놓였다.
그렇게 계속 살아갈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몸도 가능한 한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건강할 때에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않았다. 잠을 줄이고 끼니를 미뤄도 다음 날 다시 움직일 수 있으면 큰 문제가 없다고 여겼고, 통증이 찾아와도 일을 멈추기보다 치료와 업무를 어떻게 병행할지부터 계산했다. 병원은 회복을 위해 가는 곳이면서, 가능한 한 빨리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들르는 곳이기도 했다. 얼마나 아픈지와 언제 다시 일할 수 있는지가 내게는 쉽게 분리되지 않았다.
나는 한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을 취재했다. 건강했던 사람들이 작업장에서 화학물질과 설비를 다루다가 백혈병과 희귀질환을 얻었지만, 자신이 왜 아프게 되었는지는 노동자와 가족이 증명해야 했다. 회사는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련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고, 보상제도는 근무기간과 발병 시점, 질병의 종류에 따라 사람을 다시 나누었다. 고통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보상받을 수는 없었다. 생산에 투입될 때에는 회사의 관리 아래 있던 몸이, 병을 얻은 뒤에는 개인이 인과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몸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질병과 내 통증을 같은 크기에 놓을 수는 없다. 다만 몇 년 뒤 실손보험금을 청구하며 진단서와 영수증, 시술 확인서와 처방전을 내놓았을 때 오래전 취재 현장에서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보험사는 손해사정사를 보냈고, 나는 실제로 아팠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통증은 내가 느끼는 감각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진단명이 있어야 했고 치료의 필요성과 비용이 서류 안에서 서로 맞아야 했다. 몸의 고통이 제도의 언어로 들어가려면 먼저 그 제도가 인정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어야 했다.
그해에는 대상포진과 자전거 낙차, 허리디스크가 차례로 찾아왔다. 몸에는 완치보다 관리라는 말이 더 어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치료를 받을 때마다 효과와 비용, 회복에 걸리는 시간을 함께 계산했다. 오래된 차량의 일부가 고장 나면 차주는 수리비를 감당할지, 조금 손봐서 더 탈지 고민한다. 부품을 바꾼다면 무엇을 쓸지, 공식 정비소와 동네 공업사 가운데 어디를 택할지도 따져본다. 나도 비슷한 방식으로 내 몸을 바라보았다. 당장 움직이는 데 큰 문제가 없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가족의 생활비는 계속 필요했다.
몸을 자동차에 비유하는 것은 상태를 설명하기에 편리하다. 고장과 수리, 관리와 내구연한 같은 말로 통증과 치료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비유에 익숙해질수록 몸을 대하는 태도도 기계에 가까워졌다. 기계는 정해진 기능을 수행하면 되고, 수리비가 잔존가치보다 크면 교체를 검토한다. 그런 계산법을 내 몸에 적용하는 동안,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나보다 그 몸을 앞으로 얼마나 더 사용할 수 있을지가 먼저 보였다.
서글픈 것은 누군가 나를 그렇게 취급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그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피곤하다는 몸의 말을 의지 부족으로 해석했고, 쉬고 싶은 마음을 나태함으로 판단했다.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못하면서 바카라임감이라고 불렀으며,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처럼 몰아세웠다. 조직이 사람을 도구로 사용한다고 비판하면서도 더 잘 쓰이는 사람이 되려고 스스로를 단련했다. 중요한 일에 쓰이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나 없이도 일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물화라는 말은 사람이 실제로 물건이 된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대할 때 그의 감정과 관계, 지나온 시간보다 기능과 교환가치를 먼저 보는 태도와 관련된다. 타인에게 향하던 그 시선은 자신에게도 돌아온다. 나는 오늘 몇 건의 일을 처리했는지, 조직에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지, 가족에게 얼마를 제공할 수 있는지로 자신을 계산했다. 일을 하지 않거나 기대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날에는 나라는 사람 전체의 가치가 줄어든 것처럼 느꼈다. 하루의 업무가 끝나도 평가는 끝나지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나를 사용하고 점검하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자신을 소모하지 말라는 말만으로 이 생활을 바꿀 수는 없다. 누군가의 노동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삶이 유지되고, 바카라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의 몫은 결국 주변 사람이 떠맡는다. 아픈 몸을 쉬게 하라는 말은 옳지만, 그가 쉬는 동안 일을 대신할 사람과 줄어든 소득을 감당할 제도가 없다면 쉬는 비용은 다시 개인에게 돌아간다. 스스로를 관리하지 말라는 충고도 마찬가지다. 평가와 경쟁이 계속되는 곳에서 혼자 계기판을 보지 않기로 한다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에는 현실의 근거가 있다.
그래서 자신을 도구화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는 절반의 진실이 있다. 노동력과 능력을 제공하지 않고 슬롯 안에서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사용하는 것과 자신 전체를 그 기능으로 환산하는 것은 다르다. 노동하면서 능력을 펼치고 자신이 만든 결과에서 기쁨을 얻는 일은 인간다운 삶의 일부다. 문제는 그 일을 위해 내놓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데도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일하지 않는 자신을 설명할 언어마저 사라지는 데 있다.
좋은 노동은 힘들지 않은 노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라도 그 과정에 대한 판단권이 있고, 자신이 만든 결과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몸이 보내는 신호에 따라 멈출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일하는 사람을 업무 능력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여유도 필요하다. 실패한 사람에게 다시 시도할 자리와 아픈 사람에게 회복할 시간이 주어져야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의 분담과 생활의 보장이 뒤따라야 한다. 노동의 성과를 평가할 때 그 성과를 만든 사람이 어떤 상태로 남았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이제는 그 자리를 지키는 일과 나를 지키는 일을 함께 생각해보려 한다. 필요한 일을 맡아 바카라임지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판단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도 바카라임에 속할 것이다. 피곤한 몸으로 더 많은 일을 끝냈다는 사실만으로 하루를 잘 살았다고 여길 수는 없다. 일이 끝난 뒤에도 몸과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다음 날을 내 생활로 맞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