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본대지진과 도쿄올림픽을 잇는 10년의 취재
2021년 7월 21일, 도쿄올림픽 전체 종목의 첫 경기가 열리는 후쿠시마 아즈마 경기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방사선량 측정기를 켰다. 후쿠시마 나들목을 50km쯤 남겨둔 지점에서 액정에 시간당 0.5마이크로시버트가 찍혔다. 측정기를 땅에 대고 특정 지점을 오래 잰 것이 아니라 달리는 차 안에서 확인한 수치였다.
한두 시간 지나가는 것만으로 급성 장애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같은 수치에 일 년 내내 노출된다고 단순 환산한 값도 실제 생활에서 받는 선량과 같을 수 없다. 체류 시간과 측정 높이, 장비와 날씨를 비롯한 조건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환경성이 연간 추가 피폭선량 1밀리시버트를 전제로 제염 판단에 사용한 시간당 0.23마이크로시버트와 견주면 가볍게 지나칠 수도 없는 값이었다. 0.23과 0.5 사이에는 안전과 위험을 단번에 가르는 의학적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더 측정하고 관리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행정의 바카라임이 놓여 있었다.
경기장에 가까워질수록 수치는 낮아졌다. 도로 옆에는 제염 과정에서 걷어낸 흙과 낙엽이 검은 포대에 담겨 있었다. 오염의 흔적이 늘어선 길 끝에서 경기장은 말끔한 표면을 드러냈다. 일본 정부가 ‘부흥 올림픽’의 첫 장면으로 선택한 장소였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딛고 일어선 일본을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성화가 후쿠시마에서 출발했고, 야구와 소프트볼 경기도 이곳에 배치됐다.
그러나 일본과 호주의 여자 소프트볼 경기가 시작되자 카메라에 잡힌 것은 텅 빈 관중석이었다. 코로나19로 주민과 관중이 들어오지 못한 객석에 녹음된 환호가 흘러나왔다. 재난의 극복을 증명하기 위해 마련된 무대가 또 다른 재난 때문에 비었고, 사람의 부재는 미리 준비한 소리로 보충됐다. 그 장면은 부흥의 실패라기보다 부흥을 제시하는 방식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회복은 주민의 삶에서 확인되기 전에 국가적 행사의 형식으로 먼저 완성돼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전인 2011년 3월 11일 오후, 거대한 쓰나미가 미야기현 나토리시를 집어삼키는 모습이 NHK의 실시간 중계로 전 세계에 타전됐다. 〈추적 60분〉 팀은 즉시 현장 취재를 결정했고 센다이에 세 팀, 아오모리와 도쿄에 각각 한 팀을 보내기로 했다. 한 팀은 PD와 촬영감독, 두 명으로 꾸렸는데 나는 센다이로 가는 팀에 속했다. 출국 준비 중 센다이 공항은 이미 쓰나미로 침수돼 착륙이 불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센다이 팀은 후쿠시마 공항으로 들어가야 했다. 재난취재 매뉴얼은 따로 없었다. 공사장용 안전모와 면장갑, 취재진임을 알리는 KBS NEWS 스티커를 챙겼다. 그런 소박한 장비가 현장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지켜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 필요할지조차 알 수 없었으므로 일단 쓸모가 있을 듯한 물건을 가방에 넣었을 뿐이었다.
3월 12일 오후, 취재진은 후쿠시마 공항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지고 간 통신 장비가 모두 먹통이었다. 개인 휴대전화도, 국제 로밍폰도, 마지막 수단으로 챙긴 위성전화도 모두 연결되지 않았다. 일본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본사에 알리는 일부터 막혔다.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짧은 메시지가 간헐적으로 오가는 정도였다. 도쿄에서 출발한 현지 코디네이터도 무너진 도로와 피난 차량에 가로막혀 후쿠시마에 언제 도착할지 예정하지 못했다. 우리는 사실상 공항에 고립된 것이다. 재난은 전기와 통신, 교통을 차례로 멈추지 않았다. 도시가 작동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한꺼번에 거두어갔다.
오후 6시가 조금 지나 공항의 사람들이 텔레비전 앞으로 몰려들었다. 화면에는 그날 오후 3시 36분에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 1호기 건물 폭발이 반복되고 있었다. 같은 공항에 있던 내외신 취재진은 본사에서 철수 지시가 내려왔다며 카메라와 가방을 서둘러 챙겼다. 그중 누군가 우리에게 KBS는 귀국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 짧은 질문을 듣고서야 화면 속 폭발과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하나의 지도 위에 놓였다. 후쿠시마의 원전이 폭발했고, 우리는 지금 후쿠시마 공항에 있다. 두 지점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58킬로미터. 그러나 그 거리가 충분히 먼지, 바람은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지금 공항에 머무는 것과 밖으로 나가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안전한지는 알 수 없었다. 위험을 몰랐기 때문에 유지할 수 있었던 침착을 안전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날 저녁 늦게, 우리는 후쿠시마공항을 탈출했다. 센다이의 대한민국 총영사관까지 약 150킬로미터를 가는 데 여섯 시간 반이 걸렸다. 자정이 훌쩍 넘어 도착한 영사관 강당에는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피난 온 교민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사람, 집이 남아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새벽 4시쯤 영사관 내외 취재를 마치고 대리석 바닥 위 카펫에 가까스로 몸을 눕혔다.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몸이 물침대 위에 놓인 것처럼 흔들렸다. 여진이었다. 영사관 밖에는 태평양 연안과 원전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야마가타행 버스를 기다리는 행렬이 1킬로미터 넘게 이어져 있었다.
이튿날 오전 9시 반에는 후쿠시마 제1원전 3호기도 폭발할 수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한 대뿐인 취재 차량은 다른 현장에 나가 있었고, 나는 영사관에 혼자 남아 있었다. 본사에서는 가능하다면 버스든 주민 차량이든 얻어 타고 현장에서 벗어나라고 했다. 그러나 피난 버스는 교민을 위한 것이었고, 낯선 사람의 차를 세워 탈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지시는 있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단이 없었다.
대신 영사관 밖으로 나가 야마가타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어디로 가려는지, 줄을 선 지 얼마나 됐는지, 지금 심정이 어떤지를 물었다. 답을 듣고 다음 사람에게 같은 질문을 건넸다. 원전에서는 추가 폭발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었고, 사람들은 서쪽으로 빠져나갈 차례를 기다렸다. 나는 그 행렬을 따라 걸으며 카메라에 그들의 사정을 남겼다. 피할 길이 없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3월 14일에는 미나미산리쿠로 향했다. 미나미산리쿠는 미야기현 북동부에서 시즈가와만을 둘러싸고 있는 항구 마을이다. 잔잔한 만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굴과 미역 같은 양식업을 주요 산업으로 일궈온 곳이었지만, 동일본대지진 때는 거대한 쓰나미가 마을 중심부를 덮쳤다. 훗날 집계된 사망자는 관련 사망을 포함해 620명, 실종자는 211명에 이르렀고 주택 3,143동이 완전히 파괴됐다. 피해가 특히 컸던 해안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목적지를 20킬로미터쯤 남겨둔 오전, 라디오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왔다. 자위대가 헬기로 해상을 확인한 결과 쓰나미가 해안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코디네이터는 속보를 통역한 뒤 차를 세웠다. 자신은 더 이상 항구 쪽으로 갈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당장의 진입 여부보다 아오모리와 도쿄에서 취재 중인 다른 동료 PD들을 먼저 걱정했다. 그들이 이미 해안에서 촬영하고 있다면 이 속보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휴대전화와 국제 로밍폰, 위성전화를 차례로 걸었지만 어느 것도 연결되지 않았다. 우리는 인근 마을로 들어가 유선전화를 찾아다녔다. 전화가 있는 곳을 발견할 때마다 수화기를 들었지만 신호가 가지 않았다. 무선만이 아니라 유선 통신까지 끊겨 있었다. 동료들이 어느 해안에 있는지, 경보를 들었는지, 이미 대피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쓰나미가 오고 있다는 정보는 손에 들어왔지만 정작 그 정보를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었다. 전화기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자 우리는 망연히 다음 보도를 기다렸다.
얼마 뒤 라디오는, 다행스럽게도, 자위대 헬기가 경고했던 쓰나미를 더는 확인할 수 없다고 전했다. 우리는 다시 미나미산리쿠로 향했다. 항구 입구를 지키던 경찰은 잠시 차량을 멈춰 세웠다가, 이후 발생할 위험에 관해 일본 정부에 바카라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통과시켰다.
미나미산리쿠에 들어서자 바다가 어디까지였고 마을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항구에 떠 있어야 할 큰 배가 내륙까지 밀려와 건물에 걸려 있었다. 배와 건물이 한 화면 안에 놓이자 항구와 주거지라는 공간의 구분도 무의미해졌다. 도로에는 자동차가 뒤집혀 있었고 열린 차체 안쪽에는 해초가 붙어 있었다. 바닷물이 그 자리까지 들어온 것인지, 자동차를 바다에서부터 끌고 온 것인지 눈앞의 잔해만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진흙에 젖은 가족사진도 보였다. 집은 사라지고 사진만 남았다. 폐허가 얼마 전까지 누군가 밥을 먹고 잠을 자며 가족의 시간을 쌓아온 장소였다는 사실은 그런 사적인 물건에 의해서만 겨우 드러났다.
현장을 촬영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차에서 너무 멀리 떨어졌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쓰나미 사이렌이 울렸다. 전날부터 세 번째 듣는 경보였지만 이번에는 바다가 바로 앞에 있었다. 먼바다의 쓰나미는 여객기에 가까운 속도로 이동하고 연안에서도 사람이 달려 따돌릴 수 있다고 장담할 속도가 아니다. 그러나 그 순간 수치를 계산할 정신은 없었다. 파도를 눈으로 확인한 뒤 움직이면 이미 늦는다는 생각만 들었다. 촬영을 중단하고 VJ와 함께 장비를 든 채 차를 세워둔 곳으로 뛰었다.
그런데 차가 보이지 않았다. 사이렌은 계속 울렸고 대피 안내 방송은 서둘러 피하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한쪽으로 달리다가 차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항구 쪽으로, 다시 내륙 쪽으로 뛰는 동안 어느 방향이 더 안전한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를 찾으려고 차량이 먼저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얼마를 달렸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을 때 항구 입구 쪽에서 차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올라탄 뒤에야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경보가 실제 쓰나미로 이어졌다면 몇 분의 어긋남이 생사를 갈랐을 것이다.
나흘간의 취재를 마친 밤, 우리는 센다이에서 도쿄로 향했다. 밤을 달려 한국으로 돌아갈 오전 비행기를 타야 했다. 한밤의 고속도로는 폐쇄돼 있었다. 진입을 통제하던 경찰에게 우리는 한국에서 온 취재진이며 반드시 도쿄로 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는 이후 발생하는 일에 대해 일본 정부에 어떠한 바카라임도 묻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서명한 뒤에야 우리는 통제된 도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며칠째 거의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센다이 팀은 차에 오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나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에 눈을 떴다. 그로부터 5분쯤 뒤, 고속도로를 내달리던 우리 차량이 갑자기 왼쪽으로 기울었다. 차체가 도로를 긁는 굉음을 내며 수십 미터를 더 나아갔다. 차는 전복될 듯 좌우로 흔들리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내려서 확인해보니 왼쪽 뒷바퀴가 빠져있었다. 그리고 빠져나간 바퀴는 도로 밖 언덕 아래로 굴러가고 있었다. 함께 타고 있었던 선배가 비탈을 내려가 그것을 주워 왔다. 귀국길도 순탄치 않다.
귀국 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취재진의 건강 상태였다. 원전 건물이 폭발한 뒤 후쿠시마와 미야기현을 돌아다녔지만, 파견된 취재진 가운데 누구도 출국 전에 개인선량계를 지급받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상처가 없다는 사실은 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없었다. 어느 지점에서 얼마만큼 노출됐는지 보여줄 기록은 처음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외부피폭이나 방사성 물질의 흡입에 따른 내부피폭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느 정도였는지를 귀국한 뒤에야 검사해야 했다. 사전 측정을 하지 않은 대가는 몸에 남은 흔적으로 노출량을 뒤늦게 추정해야 하는 불확실성으로 돌아왔다.
노조가 일본 파견 취재진의 안전 문제를 제기하자 회사는 3월 17일께 일본 출장자들에게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를 보냈다. 3월 21일, 박성주 촬영감독을 비롯한 〈추적 60분〉 일본 파견 취재진은 서울 노원구 소재 원자력병원에 설치된 국가방사선비상진료센터를 찾았다. 그러나 센터 의료진은 취재진의 동선과 원전으로부터의 거리를 고려하면 건강에 영향을 미칠 만큼 피폭됐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으므로 정밀검사까지 받을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은 측정 자료도 없이 피폭 가능성을 0퍼센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항의하며 검사를 요구했다. 그 결과 혈액 속 림프구의 염색체 이상을 분석해 방사선 노출의 흔적과 생물학적 추정선량을 확인하는 검사가 진행됐다.
검사 결과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센터의 설명과 적지 않은 간극을 드러냈다. 그해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일본 취재를 다녀온 KBS 직원 79명 가운데 19명에게서 3개 이상의 불안정형 염색체 이상이 발견됐다. 그중에서도 박성주 촬영감독의 검사 결과가 두드러졌다. 박 감독이 당시 공개한 자료에서는 조사한 세포 1,000개 가운데 7개에서 염색체 이상이 관찰됐다. 이를 토대로 생물학적으로 추정한 피폭선량은 0.148그레이였고, 추정 범위는 0.027에서 0.322그레이까지로 넓었다. 이 결과만으로 염색체 이상의 원인을 후쿠시마 취재라고 의학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개인선량계도, 이동 지점별 방사선 측정 기록도 없었으므로 후쿠시마 취재와 무관하다고 단정할 근거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측정하지 않은 조직은 인과관계를 입증할 자료도, 반박할 자료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같은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이상 소견은 나오지 않았다.)
취재진의 몸에서 시작된 질문은 곧 공기와 빗물, 식품과 생활환경의 문제로 확장됐다. 원전에서 대기 중으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이 어디까지 이동했는지, 우리나라의 환경과 건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즉시 판단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했다. 비를 맞아도 되는지, 일본산 식품을 먹어도 되는지 같은 일상적인 선택까지 방사선의 문제가 됐다. 나는 〈추적 60분〉 팀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국내 영향을 계속 취재했다.
사고 발생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4월 7일, 제주에서 채취한 빗물에서 요오드-131과 세슘-134·137이 검출됐다. 농도는 당장 건강 피해를 예상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후쿠시마에서 방출된 것으로 추정되는 방사성 물질이 제주도의 빗물에서 확인됐다는 사실은 사고의 영향이 일본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부는 당시 시료의 농도와 예상 노출량을 근거로 인체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즉각적인 위해 가능성이 낮다는 판단과 장기간의 영향까지 포함해 안전이 입증됐다는 선언은 구분돼야 했다.
저선량 방사선의 영향은 다른 발병 원인과 분리하기 어렵고 노출과 질병 사이에도 긴 시간이 놓인다. 기준치 역시 위험의 유무를 가르는 자연의 경계가 아니라 일정한 체류 시간과 노출 경로를 전제로 정한 관리선이다. 불확실성은 공포를 과장할 근거가 아니지만 관리의 바카라임을 끝낼 이유도 아니었다. 필요한 것은 안전이라는 결론을 서두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측정했고 아직 확인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를 공개하는 일이었다.
2021년 4월, 나는 〈시사직격〉 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추적 60분〉의 계보를 잇는 프로그램이었다. 동일본대지진 취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프로그램의 후신으로 10년 만에 돌아온 셈이었다. 석 달 뒤에는 도쿄올림픽 취재가 예정돼 있었다. 일본 출장은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 취재 이후 처음이었다. 프로그램의 계보와 취재의 동선이 10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다시 겹쳤다. 2011년에는 재난이 벌어진 직후의 일본으로 들어갔고, 2021년에는 일본이 재난의 극복을 세계에 전시하려는 무대로 향했다.
7월 17일, 일본 도쿄 나리타공항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타액 검사였다. 입국 절차가 길어지는 동안 입안은 말라 있었고, 필요한 만큼의 침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검사 칸막이에는 매실장아찌와 레몬 사진이 붙어 있었다. 신맛을 상상하라는 영어 단어, ‘imagine’도 적혀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취재진은 작은 투명 용기를 든 채 그 사진을 바라보며 침이 고이기를 기다렸다. 팬데믹 중 치러지는 최초의 올림픽은 거대한 방역 구호가 아니라 침 몇 밀리리터를 받아내는 난처한 육체의 문제에서 시작됐다. 여러 차례의 확인을 거쳐 공항을 빠져나오기까지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입국 뒤 14일 동안은 조직위원회에 미리 제출한 활동계획서에 적힌 장소만 오갈 수 있었다. 대중교통을 탈 수 없었고, 식당과 술집, 체육시설에도 갈 수 없었다. 일반 시민을 만나 인터뷰하는 일도 금지됐다. 스마트폰에는 접촉 확인과 건강 상태 보고를 위한 애플리케이션을 설치했고 매일 체온과 몸 상태를 입력했다. 방송센터에서는 각자의 자리에 떨어져 앉아 도시락을 먹고, 날마다 타액을 제출했다. 선수와는 2미터, 다른 사람과는 1미터를 떨어져야 했으며 포옹과 악수, 하이파이브는 금지됐다. 믹스트존 인터뷰는 붐마이크를 사용해 90초 안에 끝내도록 설계됐다. 경기의 열기를 전달해야 하는 방송이 접촉과 체류 시간을 최소화하는 규칙에 따라 제작됐다.
일반 식당에 갈 수 없었으므로 끼니는 거의 도시락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지 사흘째 처음 김치를 먹고 반가워할 정도였다. 날마다 정해진 동선 안에서 이동했지만 몸은 오히려 더 서둘렀다. 허용된 시간 안에 촬영하고, 편집하고, 송출하고, 다시 검사해야 했다. 활동의 범위가 좁아질수록 역설적으로 하루의 밀도는 높아졌다. 호텔 방역요원이 벌써 얼굴이 많이 탔다고 내게 말했을 때, 준비해간 서툰 일본어로 짧게 대꾸하는 일이 여행다운 순간의 거의 전부였다.
올림픽 경기장도 익숙한 대회의 풍경과 달랐다. 유메노시마 양궁장과 요코하마 야구장, 아리아케 아레나를 오갔지만 관중석 대부분은 비어 있었다. 선수의 동작과 심판의 판정, 취재진의 카메라는 예전처럼 움직였는데 그것을 받아줄 군중만 빠져 있었다. 경기장 안의 모든 것은 올림픽이 열리고 있음을 증명했고, 텅 빈 객석은 이 대회가 정상적인 올림픽일 수 없음을 동시에 드러냈다.
도쿄의 하루 확진자는 연일 최고치를 경신했고 일본 전체의 신규 확진자도 1만 명을 넘어섰다. 정부는 긴급사태 적용 지역을 넓히면서도 대회는 계속 진행했다. 경기장에는 시민이 들어갈 수 없었지만 오륜 조형물 주변에는 올림픽의 분위기를 경험하려는 사람들이 모였다. 방역은 시민의 이동을 억제했고 국가는 같은 시기에 거대한 국가 행사를 멈추지 않았다. 이 기묘한 축제의 복판에서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취재허가를 받은 외국 언론인조차 시민에게 다가가 질문할 수 없는 조건에서 이 도시의 찬반을 어떻게 화면에 담을 것인가였다. 팬데믹 올림픽은 관중만 없는 대회가 아니었다. 개최를 둘러싼 시민의 목소리와 취재진 사이에도 방역이라는 물리적 거리를 설치한 대회였다.
그 모순이 가장 압축된 장소가 후쿠시마였다. 일본은 올림픽 첫 경기를 도쿄가 아닌 후쿠시마에서 열기로 했다. 7월 21일 아즈마 경기장에서 열리는 일본과 호주의 소프트볼 경기였다. 동일본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극복한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경기는 무관중으로 치러지게 됐다. 후쿠시마의 회복을 주민과 함께 선언하려던 무대에서 정작 주민이 빠진 것이다. ‘부흥 올림픽’과 ‘팬데믹 올림픽’이라는 서로 다른 두 기획이 그 경기장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직접 확인해야 했다. 2011년 〈추적 60분〉을 연출하며 동일본대지진 현장을 취재했고, 귀국한 뒤에도 후쿠시마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의 국내 영향을 뒤쫓았다. 그로부터 10년 뒤 일본은 같은 장소를 재난 극복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원전 폭발 직후의 혼란과 폐허를 목격한 사람에게 정돈된 경기장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었다. 그곳으로 돌아가는 일은 지난 10년 동안 무엇이 복구됐고 무엇이 여전히 남아 있는지, 일본이 말하는 부흥이 어떤 현실 위에 세워졌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자 2011년에 시작된 취재를 10년 뒤의 현장에서 다시 잇는 하나의 의식처럼 다가왔다.
7월 21일 새벽, 촬영감독과 코디네이터와 함께 후쿠시마로 출발했다. 마스크와 물, 촬영장비에 방사선량 측정기까지 챙겼다. 그러나 입국 뒤 14일 동안은 조직위원회에 신고한 장소만 방문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사선량이 순간적으로 급증해도 마음대로 차를 세우거나 다른 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후쿠시마는 아즈마 경기장과 그곳까지 이어진 도로로 한정돼 있었다.
아즈마 경기장에서 열린 일본과 호주의 소프트볼 경기는 도쿄올림픽의 첫 공식 경기였다. 객석에는 후쿠시마 주민 대신 내외신 취재진과 대회 관계자들만 앉아 있었다. 복구된 경기장에서 경기가 열린 것은 회복의 증거였지만, 주민 없는 부흥 행사는 그 회복을 누구의 시선으로 확인할 것인지 묻게 했다. 일주일 뒤인 7월 28일에도 일본과 도미니카공화국의 야구 개막전을 취재하기 위해 아즈마 경기장으로 다시 갔다. 비가 간헐적으로 내렸고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도 경기장을 찾았다. 바흐 위원장이 후쿠시마의 중학생에게 공을 건넸고, 그 학생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구를 했다. 재난을 경험한 지역의 다음 세대가 올림픽의 첫 공을 던지는 장면이었다. 후쿠시마의 과거와 일본이 보여주려는 미래를 한 프레임 안에 배치한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일본이 말하는 부흥의 범위는 분명하지 않았다. 도로와 경기장을 다시 세워 국제대회를 치를 수 있게 됐다는 의미라면 상당 부분 이루어진 일이었다. 주민의 귀환과 공동체의 회복, 원전 사고가 남긴 위험의 해소까지 뜻한다면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였다. 서로 다른 시간표에 놓인 일들을 올림픽은 부흥이라는 한 단어로 묶었다. 후쿠시마의 중학생이 던진 공은 재난 이후에도 삶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다음 세대에게 일본의 회복을 증명할 역할을 맡기는 장면으로도 읽혔다.
코로나19가 확산돼 주민조차 관중석에 들어오지 못했지만 일본 정부와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준비한 의식을 예정대로 진행했다. 대회를 다시 미루거나 취소하는 일은 일본이 지난 10년 동안 쌓아온 재난 극복의 서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아즈마 경기장은 부흥의 정도를 확인하기보다 완료되지 않은 부흥을 먼저 선언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대회가 막바지에 이르자 제한된 동선과 도시락, 타액 검사와 생방송이 반복되는 생활에도 익숙해졌다. 선수들의 승부를 지켜보고 전달하는 일은 분명 재미있었고 영광스러웠다. 팬데믹 속에서도 경기는 실제로 열렸고 선수들의 성취와 취재진의 노동도 실제였다. 그 경험의 가치와 대회를 둘러싼 의문은 어느 하나를 지운다고 해결되는 관계가 아니었다.
2011년 회사는 재난 취재 매뉴얼과 개인선량계, 철수 기준을 마련하지 않은 채 취재진을 현장에 보냈다. 2021년 조직위원회는 방역 애플리케이션과 검사, 출입기록으로 취재진을 촘촘하게 관리했지만, 그 중심에는 개인의 안녕보다 대회의 정상 운영이 있었다. 전자에서는 취재를 성사시키는 일이 취재진의 안전보다 앞섰고, 후자에서는 부흥의 장면을 완성하는 일이 주민의 참여와 취재진의 자유로운 확인보다 앞섰다. 주체와 방식은 달랐지만 사람보다 방송과 대회라는 제도의 작동이 우선됐다는 점은 같았다.
그렇다고 시간당 0.5마이크로시버트라는 측정값과 제염토 포대만으로 후쿠시마는 위험하고 부흥은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취재가 해야 할 일은 안전하다는 선언에 위험하다는 선언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측정했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경기장에 누가 있었으며 누가 제외됐는지를 남기는 일이었다. 아즈마 경기장에서는 미리 준비된 환호가 흘렀고 돌아오는 길에는 검은 포대가 이어졌다. 어느 한쪽도 후쿠시마의 전부는 아니었다. 10년 만에 다시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재난의 종결이 아니라, 재난을 기록하고 극복한다는 제도가 누구를 위해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