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을 노동으로 바꾸는 마음
2024년 7월 19일, 방송인 전현무 씨는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 555회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상담을 받았다. 아나운서 시절부터 매일 일하는 것이 몸에 밴 그는 어쩌다 며칠의 휴가가 생기자 오히려 불안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뜻밖의 휴일은 반갑지 않았다. 쉬어도 되는지, 일이 다시 들어오기는 할지 알 수 없는 시간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이미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고 방송인으로서의 지위도 확고해 보였지만, 어제까지의 성취가 오늘의 휴식을 보증하지는 못했다. 그는 사람보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고 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더는 자신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그 믿음의 이면에 있었다. 그 결과, 여유는 누리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는 시간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의 양보다 공백의 성격이다. 일정을 앞두고 있을 때 시간은 준비와 촬영, 이동과 회복으로 분할된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하고 하루가 제대로 사용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갑자기 비어버린 며칠에는 기준이 없다. 한가함이 일시적인 휴식인지 잊히기 시작했다는 징후인지 판정할 길도 없다. 노동은 이 모호한 시간을 다시 측정할 수 있는 시간으로 바꾼다. 오래 일했다는 사실이 안정을 축적해주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실은 미덕에 앞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기술이 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의 ‘불안이’도 미래를 이런 방식으로 처리한다. ‘소심이’가 눈앞의 위험에 반응한다면 불안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앞당겨 계산한다. 주인공 라일리가 하키 캠프에서 실수할 가능성, 새 학교에서 친구를 잃을 가능성, 선망하는 선배에게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을 미리 배열하고 제거하려 한다. 불안이는 라일리를 겁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미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나 더 좋은 결과를 보장하려는 계획은 곧 현재의 라일리를 심사한다. 실패 가능성은 지금의 자신에게 실패할 만한 결함이 있다는 판정으로 바뀌고, 라일리의 자아에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신념이 자리 잡는다.
캠프 마지막 경기에서 그레이스와 충돌한 라일리는 페널티 박스에 앉는다. 유리벽 너머로 경기는 계속되지만 라일리에게 남은 것은 거칠어진 호흡과 떨리는 손이다. 머릿속 본부에서는 불안이가 조정반을 붙든 채 점점 빠르게 회전한다. 주황빛 궤적은 다른 감정들이 다가갈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고, 수많은 가능성을 계산하는 불안이 자신도 그 안에 갇힌다. 밖의 라일리도 움직이지 못한다. 선택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선발과 인정, 우정 가운데 무엇 하나 잃어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모든 선택을 다른 실패의 원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많은 계획이 마침내 현재의 몸을 정지시킨다. 영화는 이 장면에서 불안을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이 지키려는 미래를 너무 많이 만들어낸 정신의 마비로 묘사한다.
반면, 나에게 불안은 드물게 찾아오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이 감정이라는 사실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오래 몸 안에 머문 숙환 같은 것이다. 회사 생활 12년째 되던 어느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숙직실의 비상구 등이 지나치게 밝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회사에 가만히 누워 있자니 입사 뒤의 시간이 아스라이 멀어졌다. 처음 프로그램을 맡았던 때와 제작을 마치고 이름이 올라가던 순간들, 편성표를 붙들고 방송 시간을 조정하던 날들이 서로 다른 시기의 일처럼 흩어졌다.
2005년 입사 이후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나름의 능력을 인정받았고, 2013년에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포상을 받았다. 생물처럼 움직이는 편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한 노고를 인정받은 것이지만, 혼자 만든 성과는 아니었다. 방송 시간이 바뀔 때마다 제작진에게 연락해 일정을 다시 맞춰야 했고, 제작진이 번번이 전화를 받아주고 변경을 감수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장은 내 이름으로 나왔으나 그 이름 아래에는 여러 선후배의 협조가 들어 있었다. 이후에도 훌륭한 동료들을 만나 혼자서는 도달하기 어려웠을 성과를 냈다.
그 경험은 자신감만 쌓아주지 않았다. 방송은 기획과 섭외, 촬영과 구성, 편집과 편성이 맞물려 만들어지므로 결과에서 개인의 몫만 떼어낼 수 없다. 좋은 동료들과 거둔 성과 가운데 어디까지가 나의 실력이었는지, 판단과 방식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일할 때에도 같은 수준의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성공은 능력을 입증하면서 동시에 그 능력이 발휘되기 위해 필요했던 조건들을 드러냈다. 숙직실에서 잠들지 못하게 한 것은 성과의 부재가 아니라 다른 조건에서도 그 정도의 성과나 그것을 뛰어넘는 결과를 다시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불안이 나를 성장시킨 면도 부정할 수 없다. 부족한 경험은 준비량으로 메웠고, 방송 전에는 한 번 더 확인했으며, 편성 변경에서 생길 빈틈을 먼저 계산했다. 불안은 실력과 준비량을 구분하지 않은 채 둘 다 늘리라고 요구했고, 그 요구를 수행하는 동안 나는 실제로 더 능숙해졌다. 몇몇 실패를 피했고 때로는 능력 이상의 성과도 거두었다. 문제는 불안의 효용이 입증될수록 그 적정량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었다. 필요한 긴장과 자신을 소모하는 강박은 모두 성실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그해 8월에는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과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한꺼번에 끌어와 고민했다. 자질구레한 문제 하나를 넘는 데에도 중대한 사건을 견딜 때와 비슷한 품이 들었다. 불행의 크기보다 그것을 처리하는 데 소모되는 마음의 크기가 늘 비슷했다. 스스로 할 수 있다고 거듭 다독였지만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 일상의 작동을 멈추지 않기 위한 응급 명령에 가까웠다. 급기야 두 달 뒤에는 괜찮은 정신과를 추천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불안과 무기력을 더는 날씨나 기분 탓으로 돌릴 수 없었고, 이 상태가 계속되면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들었다.
2020년 가을에는 매일 2만 5천 보를 걸었다. 누군가 왜 그렇게까지 걷느냐고 물었을 때,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지 않으냐고 답했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많이 걷는 생활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잘못했는지 특정하지도 못한 채 자신 전체를 싫어하고, 몸을 지치게 해야 그 감정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상태를 뜻했다. 걷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잘못들이 몸 안에 함께 들어 있었다. 오래 걸으면 설명할 수 없는 업보가 조금은 줄어들 것 같았고, 발을 움직이는 동안 자기혐오도 흐려졌다. 걷기는 운동인 동시에 죄목과 형량이 정해지지 않은 속죄였다.
섭외가 무산되거나 계획한 일이 틀어질 때에도 실패의 직접적인 이유보다 오래전의 잘못들이 먼저 떠올랐다. 길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보고도 모른 척했던 일, 내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위하는 체했던 일, 한때 누군가의 죽음을 맹렬히 바랐던 마음이 현재의 실패와 연결되었다.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공연히 나의 실패가 평소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이었을지 모르는 행실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우연과 타인의 판단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과거의 잘못으로 채웠다.
이 사고에는 자기혐오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효용이 있었다. 실패가 조직의 사정과 타인의 취향, 시기와 우연이 뒤섞인 결과라면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된다. 반대로 나의 부족함이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면 더 유능해지고 더 성실해지며 더 선하게 사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자신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대신 교정할 권한도 자신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불안은 모호한 결과를 도덕적 인과관계로 바꾸고, 노동과 자기 처벌은 그 결과를 수정하기 위한 행동이 된다. 걷기는 알 수 없는 죄바카라감에 형량을 부여했고,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비하는 상환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 속 불안이처럼 같은 자리를 계속 돌고 돌았다.
두 편의 〈인사이드 아웃〉은 이 심리를 서로 다른 시간의 편집으로 보여준다. 첫 영화에서 기쁨이는 행복한 기억을 선별하고 슬픔의 개입을 막아 라일리의 과거를 정돈한다. 두 번째 영화에서 불안이는 나쁜 미래를 선별해 현재의 행동을 통제한다. 하나는 과거를 편집해 행복한 아이로서의 자아를 만들고, 다른 하나는 미래를 선점해 더 나아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아를 만든다. 두 감정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복잡한 경험을 하나의 일관된 설명으로 만들려 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두 번째 영화의 결말에서도 불안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조정반을 독점하던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것을 감정의 화해나 완성된 자아의 탄생으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하나의 예측이 미리 확정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영화는 불안을 해결하기보다 가능성을 판결로 바꾸는 속도를 잠시 늦춘다. 그 뒤 라일리가 불확실한 미래를 어떻게 견딜지는 여전히 미지수로 남아 있다.
나 역시 불안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현실의 경쟁과 평가는 계속되고, 협업의 조건은 뜻대로 되지 않으며, 한 번의 성과가 다음 성과를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런 세계에서 불안은 근거 없는 오류만은 아니다. 다만 오래 겪은 고통은 그 고통이 시작되는 지점과 번져가는 경로를 조금씩 익히게 한다. 전현무에게 일이 비었을 때 찾아오는 두려움은 게으름의 죄바카라감이 아니라 다시 선택받지 못할 가능성에서 온다. 내게 좋은 동료들과 성과를 낸 뒤 남은 의심은 무능의 증거라기보다 그 성취를 혼자 반복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예측에서 비롯된다. 실패를 과거의 잘못과 연결하는 습관 또한 도덕적 인과가 아니라 우연을 견디기 어려운 마음이 만들어낸 설명이다.
근원을 안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은 다시 찾아올 것이고, 결과를 기다릴 때면 최악의 경우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출처를 알고 있는 동안에는 그 감정을 곧바로 나 자신 전체에 대한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몫과 조직과 타인, 시기와 우연의 몫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의 근원을 찾는 일은 적의 위치를 확인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 위치를 안다고 공격이 멈추지는 않지만, 적어도 사방이 적이라고 오인해 자신까지 공격하지는 않게 된다. 불안을 없앨 수 없다면 지금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 정도의 이해는 오래 앓은 고통이 남긴 쓸모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