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의 속도로

수학여행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간단했다.


휠체어를 미는 일이었다.


물론 말로 하면 간단하다. 손잡이를 잡고 앞으로 밀면 된다. 하지만 3박 4일 동안 한 학생의 이동을 바카라임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일이었다. 길의 기울기를 먼저 살피고, 바퀴가 걸릴 만한 턱을 눈으로 재고,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내리막에서는 내 몸을 먼저 긴장시켜야 했다. 여행이 시작되기 전까지 나는 몰랐다. 세상에는 걷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높이와 각도가 그렇게 많다는 것을.


특수학교의 수학여행은 일반학교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보통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면 담임교사들이 중심이 되고, 보건교사나 부담임 몇 명이 함께 가는 정도다. 그런데 특수학교에서는 훨씬 많은 선생님들이 인솔에 참여했다. 애초에 학교 규모도 특이했다. 학생 수는 몇 백 명 정도였지만 교직원 수는 100명 가까이 되었다. 아침마다 학교 앞에 끝없이 이어지던 교직원 차량 행렬을 보면, 이 학교가 얼마나 많은 손길로 움직이는 곳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수학여행도 마찬가지였다. 학생 두세 명당 교사 한 명 정도가 배정되는 느낌이었다. 담임이 아니었던 나도 자연스럽게 수학여행 인솔 명단에 들어갔다. 다만 내가 부담임으로 있던 반이 아니라 옆반 학생들과 함께하게 되었다.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그 반에는 신체적으로 불편해 휠체어를 이용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나는 남교사 중에서도 젊은 편에 속했다.


쉽게 말해, 3박 4일 동안 힘껏 밀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 선생님, 이번 수학여행 때 옆반 좀 도와주셔야겠어요.”


“네? 제가요?”


“젊잖아요.”


교직슬롯에서 ‘젊다’는 말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젊으니까 할 수 있고, 젊으니까 들어야 하고, 젊으니까 밀어야 한다. 나는 잠시 웃었다. 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열심히 밀어보겠습니다.”


휠체어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 소년소녀합창단 활동을 하며 휠체어를 타던 동생을 공연 때마다 밀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손잡이를 잡는 법이나, 휠체어를 접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하루 종일 밀착해서 인솔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나는 휠체어 사용법을 다시 배웠다. 선생님이 아니라 학교에서 늘 휠체어를 밀던 공익근무요원에게 배웠다.


“내리막에서는 그냥 앞으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왜요?”


“속도 붙으면 위험해요. 뒤로 돌려서 천천히 내려가야 해요.”


그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휠체어를 뒤로 돌린 뒤, 몸을 낮추고 천천히 바퀴를 굴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데에도 기술이 있었다.


“울퉁불퉁한 길은요?”


“앞바퀴가 걸리니까 살짝 들어줘야 해요. 턱 있으면 무조건 조심하고요. 계단은 혼자 하지 마세요. 꼭 두 명이서 들어야 합니다.”


나는 몇 번이고 연습했다. 휠체어를 접고 펴는 법, 계단에서 앞뒤로 잡는 법, 버스에 싣고 내리는 법. 평소에는 별생각 없이 지나가던 길이 갑자기 문제집처럼 보였다. 이 턱은 어떻게 넘을까. 저 경사로는 괜찮을까. 좁은 문을 지나갈 때 바퀴가 걸리지는 않을까. 길은 더 이상 그냥 길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는 허락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장벽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수학여행을 떠났다.


특수학교 학생들이라 여행지가 제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코스는 생각보다 넓고 깊었다. 경북에서 출발해 대전으로 올라가고, 전주를 거쳐 순천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버스에는 학생들과 선생님들, 짐과 휠체어가 함께 실렸다. 누군가는 들떠 있었고, 누군가는 벌써 멀미를 걱정했다. 버스 안은 수학여행 특유의 어수선함으로 가득했다.


창밖으로는 계절이 천천히 흘러갔다. 들판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고, 산등성이는 옅은 가을빛을 입기 시작했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햇살은 창문에 부딪혔다가 아이들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휠체어를 싣고 내리고, 학생을 태우고 내리며 우리는 국토의 중심부와 남서쪽을 조금씩 통과했다.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곳은 대전 오월드였다.


오월드는 산자락에 안겨 있는 공원 같았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길은 완만하게 이어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휠체어를 밀어보면 그 완만함이 결코 완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걷는 사람에게는 산바카라로였지만, 휠체어를 미는 사람에게는 작은 등산로였다.


“선생님, 저 동물 보고 싶어요.”


학생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 오케이. 가자.”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경사로는 잘 되어 있었지만 오르막이 많았다. 처음에는 힘차게 밀었다.


‘젊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르막은 생각보다 길었고, 휠체어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바퀴는 천천히 굴러갔고, 내 허벅지와 팔은 점점 뜨거워졌다.


그래도 학생이 동물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 원숭이를 보고 손뼉을 치고, 커다란 동물을 보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그 엄지 하나가 이상하게 큰 힘이 되었다.


“재밌어?”


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다시 세웠다.


“그럼 다음 것도 보러 가야지.”


나는 또 밀었다. 한 동물이라도 놓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아마 그날 나는 사육사보다 열심히 동물 위치를 확인했을 것이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길로 가야 덜 힘든지, 어느 방향으로 돌아야 더 많이 볼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했다. 선선한 가을날이었지만 등줄기에는 땀이 흘렀다.


아쉬운 일도 있었다. 놀이기구를 하나도 태워주지 못한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번쩍 들어 자리에 앉혀서 어떻게든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안전이 걱정되었고, 나에게도 그럴 용기가 부족했다. 학생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 듯 보였다. 여전히 엄지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엄지가 오히려 내 마음을 더 미안하게 했다.


며칠 동안 그렇게 다니다 보니 온몸이 쑤셨다. 팔, 어깨, 허리, 손목까지 몸 곳곳이 자기 존재를 주장했다. 예전에 한 동료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체장애가 있는 학생들이 많은 특수학교에서 몇 년 근무하면 몸이 정말 많이 상해요.”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막연히 힘들겠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3박 4일 수학여행을 따라가 보니 그 말의 무게가 조금 느껴졌다. 학생의 이동을 돕는 일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몸의 일이고, 기술의 일이고, 바카라임의 일이었다. 하루 이틀은 의지로 할 수 있지만,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선생님들은 정말 대단했다.


나도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장애인 기관에서 봉사를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봉사는 잠깐이었다. 이야기 나누기, 청소하기, 행사 돕기 정도였다. 한 사람의 하루에 이렇게 깊이 관여한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 화장실에 가야 하는지,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 어느 길이 덜 위험한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계속 살펴야 했다. 누군가의 여행에 함께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IMG_2401.JPG<오월드에서>

마지막 날, 우리는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장을 찾았다.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여행의 피로가 몸에 잔뜩 쌓여 있었지만, 순천에 도착하는 순간 눈이 먼저 깨어났다. 넓게 펼쳐진 정원은 마치 여러 나라의 계절을 한곳에 모아놓은 것 같았다. 길마다 다른 색이 있었고, 정원마다 다른 공기가 있었다. 물길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흔들렸고, 바람은 억새 사이를 지나며 오래된 비단처럼 사각거렸다.


그때는 억새가 절정이었다. 순천만의 억새는 멀리서 보면 은빛 물결 같았고, 가까이서 보면 가느다란 붓끝들이 하늘을 향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면 억새밭 전체가 몸을 눕혔다가 다시 일어섰다. 마치 땅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관광객도 많았다. 휠체어를 밀고 다니기에는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앞사람과의 간격, 옆에서 뛰어오는 아이들, 갑자기 멈추는 관람객, 좁은 길, 턱, 경사로. 나는 손잡이를 더욱 단단히 잡았다. 이곳까지 왔으니 대충 보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힘들면 말해.”


내가 학생에게 말했다.


학생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 가고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그날 휠체어는 정말 많이 달렸다. 물론 실제로 빠르게 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달리고 있었다. 한 나라의 정원을 지나고, 또 다른 나라의 정원으로 갔다. 흙길도 지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길도 지났다. 경사가 높은 다리 앞에서는 잠시 숨을 고른 뒤 힘껏 밀었다. 계단이 나오면 동료 선생님을 불렀다.


“선생님, 여기 한 번만 같이 들어주세요!”


“갑니다!”


둘이서 앞뒤를 잡고 휠체어를 들어 올렸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나씩. 계단 몇 칸을 오르는 데에도 작은 작전이 필요했다. 학생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우리는 다시 길 위로 나아갔다.


사실 나도 그곳을 전부 보고 싶었다. 순천은 멀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이어서 또 다른 생각이 찾아왔다.


‘이 학생은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들자 쉽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멋진 풍경 하나를 포기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갔다. 정원과 정원 사이를 지나고, 바람과 억새 사이를 지나고, 사람들 틈을 조심조심 통과했다.


그날 우리는 수많은 나라의 정원을 다녀왔다. 한국 안에 있었지만, 한나절 동안 세계를 한 바퀴 돈 기분이었다. 학생은 말이 많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충분히 말하고 있었다. 눈이 조금 더 커지고, 입가가 조금 더 올라가고, 가끔씩 나를 돌아보며 엄지를 세웠다. 그 작은 신호들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다.


수학여행을 마치고 학교 근처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 팔이 얼얼했다. 손바닥에는 휠체어 손잡이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3박 4일 동안 밀고, 당기고, 접고, 들었던 시간의 흔적이었다. 방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으니 몸이 그대로 바닥에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공부가 잘 되었다.


나는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돌아오면 바카라상 앞에 앉아야 했다. 평소 같으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바카라을 덮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이 이상하게 또렷했다. 학생과 함께 보낸 3박 4일이 내 안에 어떤 확신을 남긴 것 같았다.


‘나는 결국 교사로 살아야겠구나.’


수학여행 내내 학생과 나는 하나의 팀처럼 움직였다. 휠체어의 속도와 내 걸음의 속도가 맞아야 했고, 학생의 시선과 내 판단이 함께 움직여야 했다. 말이 많지 않아도 서로의 리듬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언제 물어봐야 하는지, 어느 순간 그냥 밀고 가면 되는지 몸으로 배웠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잘한 날과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이었다. 시험 문제를 맞히거나 수업 계획을 완성하는 기쁨과도 달랐다. 한 사람의 여행을 조금 더 넓게 만들어주었다는 감각.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역시 조금 더 넓어진 것 같다는 느낌.


요즘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안전 기준도, 인솔 방식도, 교사의 업무 범위도 더 세밀해졌을 것이다. 10년도 훌쩍 지난 이야기를 지금의 기준으로 그대로 가져오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 따뜻하게 남아 있다.


우리 지역의 공립 특수학교에는 아직도 일반 중등 음악교사가 전보로 갈 수 있다. 가끔 교직 생활에 매너리즘이 찾아오거나, 학교와 학생에게 마음이 지치는 날이 오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노란 학교의 복도, 느리지만 깊었던 음악수업, 그리고 순천만의 억새 사이를 달리던 휠체어.


언젠가 교직 생활 중 한 번쯤 다시 특수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곳에서는 내가 잊고 지내던 교사의 얼굴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성과와 평가와 행정 문서 사이에서 흐릿해진 마음이 있다면, 그곳의 학생들이 다시 천천히 닦아줄 것만 같다.


그 가을, 순천만의 바람은 억새를 흔들었고, 나는 휠체어 손잡이를 꼭 잡고 있었다.


바퀴는 천천히 굴러갔다.


그러나 그날의 여행은 내 마음속에서 아직도 계속 달리고 있다.

1380698500347.jpg<순천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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