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띠아 500개를 말던 날

매년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나에게 이 날은 조금 특별하다. 국가적으로도 여러 행사가 열리는 날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내를 처음 만난 날이기도 해서 쉽게 잊을 수 없다. 달력에 적힌 수많은 기념일 중 어떤 날은 국가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어떤 날은 아주 사적인 마음으로 기억된다. 내게 4월 20일은 그 두 가지가 겹쳐 있는 날이다.


특수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에도 장애인의 날은 학교에서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우리 학교는 같은 사학 재단 안에 있는 한 전문대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장애인 재활과 관련된 전공이 특화된 학교였고, 장애인의 날을 맞아 그곳에서 큰 축제가 열렸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버스를 나눠 타고 행사장으로 이동했고, 선생님들은 각자 맡은 부스에서 하루 종일 행사를 운영했다. 그날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날이 아니었다. 학생들에게는 축제가 수업이었고, 선생님들에게는 부스가 교실이었다.


축제라고 하면 보통 체험부스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날의 부스는 일반적인 체험부스와는 조금 달랐다. 학생이나 관람객이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보는 방식이라기보다, 선생님들이 부스 안에서 계속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행사에 온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형태였다. 말하자면 체험이라기보다 제공에 가까웠다. 손이 바쁠 수밖에 없었고, 재료도 어마어마하게 필요했다.


내가 배정받은 부스는 또띠아였다.


토르티야라고도 부르는 그 멕시코 음식이 맞다. 얇은 빵 위에 여러 재료를 얹고 돌돌 말아 먹는 음식. 말로만 들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500인분을 넘게 만들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또띠아는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업무가 된다. 재료 박스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축제 준비인지, 급식소 납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침 일찍부터 학교 트럭에 재료를 실었다. 소시지, 채소, 소스, 포장지, 조리도구까지 챙기다 보니 짐이 끝도 없이 나왔다. 박스를 들고 옮기는 것만으로도 허리가 뻐근했고 팔이 후들거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운전이었다. 지난번 IT챌린지 대회 때처럼, 이번에도 1종 보통 면허가 있다는 이유로 내가 학교 탑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학교에 탑차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것을 교사가 직접 운전한다는 사실은 더 놀라웠다. 참 많은 일이 “선생님이 할 수 있죠?”라는 말 한마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운전석에 앉아보니 일반 승용차와는 전혀 달랐다. 뒤가 보이지 않았다. 백미러 없는 탑차를 처음 운전하는 나는 거의 앞만 보고 달렸다. 뒤쪽 세상은 내 것이 아니었다.


출발하기 전, 학교 창고 지붕에 아주 살짝 닿았던 일은 조수석에 함께 탄 선생님과 나만의 비밀로 남겨두기로 했다. 다행히 아주 살짝이었다. 아주, 아주 살짝.


행사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부스를 차렸다. 재료를 꺼내고, 조리대를 정리하고, 소시지를 굽기 시작했다. 또띠아는 단순히 빵에 재료를 넣고 말기만 하면 되는 음식이 아니었다. 특히 소시지를 굽는 일이 생각보다 중요했다. 너무 덜 익으면 안 되고, 너무 타도 안 된다. 노릇하게 구운 소시지를 넣고, 샐러드와 소스를 얹은 뒤, 손에 들고 먹기 좋게 포장해야 했다.


나는 주로 소시지를 굽는 일을 맡았다.


평소라면 노릇하게 구워지는 소시지 냄새에 침이 고였을 것이다. 그런데 철판 위에 수백 개의 소시지를 계속 올리고 뒤집고 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보기만 해도 느끼했다. 기름은 끊임없이 올라왔고, 뜨거운 열기는 얼굴을 달궜다. 4월이었는데 왜 그렇게 더웠는지 모르겠다. 철판 앞에 서 있으니 봄볕도 여름처럼 느껴졌다.

우리 부스에는 대략 5~6명의 선생님이 함께 있었다. 한 사람은 또띠아 빵을 펼치고, 한 사람은 채소를 올리고, 한 사람은 소스를 뿌리고, 한 사람은 소시지를 넣고, 또 한 사람은 포장했다. 완벽한 분업이었다. 공장 컨베이어 벨트처럼 손이 움직였다. 처음에는 웃으며 시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줄었다. 점심도 도시락으로 대충 때웠다. 모두의 목표는 하나였다.


‘제발 재료가 빨리 줄어들었으면.’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평만 나오지는 않았다.


힘들 때마다 부스 앞에 오는 아이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휠체어를 타고 온 학생, 보행이 불편해 천천히 다가오는 학생, 보호자의 손을 꼭 잡고 기다리는 아이들. 누군가는 또띠아 하나를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고, 누군가는 맛있다는 표현을 말 대신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몸을 마음대로 가누기 어려운 학생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있었고, 휠체어에 앉은 한 아이는 또띠아를 받아 들고 엄지를 번쩍 들어 보였다.


이상하게 힘이 났다.


조금 전까지는 소시지 냄새만 맡아도 지칠 것 같았는데,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 다시 철판 앞에 설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간식 하나였을지 모르지만, 그날 그 아이들에게는 축제의 한 장면이었다. 손에 쥔 따뜻한 또띠아 하나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순간을 보며, 나는 한 사람에게라도 더 맛있는 것을 만들어주고 싶어졌다.


해가 조금씩 기울 무렵, 드디어 부스를 정리할 시간이 되었다. 함께 일한 선생님들이 하나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켰다. 하루 종일 사용한 집기들을 닦고, 조리도구를 정리하고, 박스를 접었다.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팔에는 기름 냄새가 배어 있었고, 옷에는 소스와 열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남은 재료가 없었다.


정말 깨끗하게 모두 소진되었다.


아침에는 끝도 없이 많아 보였던 재료 박스들이 텅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박스를 보는데 기분이 좋았다. 올 때는 무겁기만 했던 짐이 돌아갈 때는 이상하게 가볍게 느껴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하루 종일 무엇인가를 만들고, 나누고, 비워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충만함이 있었다.


나는 대학에서 악기를 전공했기 때문에 해본 아르바이트라고는 대부분 개인 레슨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악기를 불고, 음악으로 돈을 버는 일이 익숙했다. 반대로 몸을 써서 일하는 경험은 많지 않았다. 공장이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해본 친구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나도 한 번쯤 그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한 적도 있었다.


그날의 또띠아 부스는 내게 그런 경험이었다. 허리가 아프고, 손이 느끼하고,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 그런데 그 반복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는 일. 힘든 일을 하면 분명 배울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랬다. 몸으로 하는 일은 머리로 하는 일과 다른 방식으로 사람을 가르친다.


요즘 기준으로 그날을 돌아보면, 조금 놀라운 행사였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장애인의 날이라고 해도, 교사들이 하루 종일 부스에 동원되어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일이 요즘이라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누군가는 업무 범위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안전과 바카라임을 물을 수도 있다. 탑차 운전까지 교사가 했다고 하면 아마 더 복잡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날을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그 방식이 항상 옳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의 기준으로는 조심해야 할 부분도 많고, 개선되어야 할 점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서만큼은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있었다. 보도자료를 위한 행사가 아니었고, 누군가의 칭찬을 기대한 일도 아니었다. 초과근무수당이나 거창한 출장비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아이들이 좋아하니 조금 더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뜨거운 철판 앞에서 끝없이 소시지를 굽던 손, 비닐장갑 안에 고이던 땀, 또띠아를 받아 들고 웃던 아이들의 얼굴, 그리고 텅 빈 재료 박스들. 그 모든 장면이 한꺼번에 떠오를 때가 있다. 교사라는 일이 늘 칠판 앞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철판 앞에서 배웠다.


어떤 날의 교육은 악보 위에 있고, 어떤 날의 교육은 운동장에 있고, 또 어떤 날의 교육은 또띠아 한 장 위에 있다.


그리고 가끔은, 하루 종일 구운 소시지 냄새 속에도 있다.

20130416_084025.jpg<모든 재료를 소진하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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