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 누워!”
체육관 안에 그 말이 울려 퍼지는 순간, 나는 잠시 내가 학교 교직원 체육대회에 온 것인지, 전국체전 결승전에 온 것인지 헷갈렸다.
말씀을 하신 분은 우리 학교 체육부장 선생님이었다. 평소에는 점잖고 차분한 분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늘 조용히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시던 분이었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달랐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체육관 천장을 뚫을 것처럼 컸고, 눈빛은 이미 승부의 세계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있었다.
“다 누워! 이건 말이 안 돼!”
나는 그 말을 듣고 정말 잠시 망설였다.
‘누워? 여기서? 진짜로?’
그런데 옆에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둘 코트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등을 대고 누웠고, 누군가는 억울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앉았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코트 위에 털썩 앉았다. 20대 젊은 기간제교사였던 나는 그 순간 선택권이 많지 않았다. 때로는 학교생활에서 분위기의 힘이 막강하다.
이 황당한 장면이 벌어진 곳은 경상북도 특수학교 교직원 체육대회였다.
특수학교라는 특수한 환경과 사립학교라는 공간에 어느 정도 적응해갈 무렵, 나를 기다리고 있던 또 하나의 빅이벤트였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행사, 바로 교직원 체육대회였다. 정확한 명칭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교육감배 대회였던 것 같다. 경상북도 안의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바탕 경쟁을 벌이는 행사였다.
우리 학교도 당연히 참가했다. 그런데 단순히 참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느낌으로 말하자면 출전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우승.
대회 종목은 의외로 단순했다. 배구와 윷놀이. 운동장 전체를 뛰어다니는 종목도 아니고, 복잡한 경기 방식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할수록 승부욕은 더 선명해지는 법이다. 특히 배구는 학교의 자존심이 걸린 종목처럼 여겨졌다.
20대 젊은 남교사였던 나는 당연하다는 듯 배구 선수 명단에 들어갔다. 내 의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젊다. 남자다. 키가 아주 작지는 않다. 이 세 가지 조건이면 충분했다.
“하 선생님도 배구 해야지?”
“제가요? 저 배구 잘 못하는데요.”
“괜찮아. 하면 돼.”
무서운 말 이다.
하면 돼.
정말 하면 되는 줄 알고 시키는 말인지, 아니면 어차피 해야 하니 마음을 비우라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말 뒤에는 늘 일이 따라왔다.
우리는 대회를 한 달쯤 앞두고 본격적으로 연습을 시작했다. 체육부장 선생님을 중심으로 팀이 꾸려졌다. 키가 190cm가 넘는 장신 선생님, 배구 구력이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베테랑 선생님, 운동신경이 좋은 젊은 선생님들이 모였다. 특수학교는 학생 수에 비해 교직원 수가 많은 편이라 연습 인원도 제법 나왔다. A팀과 B팀을 나누어 실전처럼 경기를 했다.
처음에는 살짝 놀랐다. 나는 그냥 친목 체육대회 정도를 생각했는데, 분위기는 생각보다 진지했다. 서브 자세부터 리시브 위치, 블로킹 타이밍, 로테이션까지 하나하나 짚었다.
“하 선생님, 공 올 때 팔 이렇게 모아야 돼요.”
“이렇게요?”
“아니, 팔이 너무 따로 놀잖아. 붙여요, 붙여.”
“이렇게요?”
“그렇지. 근데 몸은 왜 도망가?”
공은 내 쪽으로 오는데 몸은 자꾸 뒤로 빠졌다. 머리로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본능은 피하라고 외쳤다. 특히 반대편에서 강한 스파이크가 날아올 때면 공이 아니라 작은 운석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무회전으로 날아오는 공은 어디로 튈지 몰랐고, 얼굴 쪽으로 오는 공은 배구공이라기보다 인생의 시련처럼 느껴졌다.
나는 공격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키 큰 선생님들은 점프를 거의 하지 않아도 공을 툭툭 넘겼다. 반면 나는 서브로 네트를 넘기는 것부터 어려웠다. 공을 손바닥으로 힘껏 쳤는데도 네트 앞에서 힘없이 떨어질 때면, 내 자존심도 함께 떨어졌다.
게다가 나에게는 손가락 문제가 있었다. 플루트를 전공한 사람에게 손가락은 꽤 예민한 부위다. 악기를 오래 해온 습관 때문에 늘 손을 조심했다. 농구를 해도 손가락이 꺾일까 걱정했고, 축구를 해도 골키퍼는 웬만하면 피했다. 그런데 배구는 손으로 공을 받아야 하는 운동이었다. 손가락을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생님, 겁먹지 말고 받아요!”
“저 안 겁먹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공이 오면 내 몸은 이미 겁먹고 있었다.
연습 환경도 만만치 않았다. 학교 체육관은 협소했고, 안에는 탁구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운동장에서 연습했다. 모래바닥 위에 분필로 코트 선을 긋고, 네트를 설치했다. 5월 말이라 아직 한여름은 아니었지만, 모래바닥은 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공 하나를 살리려고 몸을 던지면 무릎이 까질 각오를 해야 했다.
오후 5시, 일과가 끝나면 선생님들이 하나둘 운동장으로 모였다. 주 3일 정도는 꼬박 연습했다. 나 같은 기간제교사에게 불참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대학 시절 선배 연주회에 ‘필참’해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인지, 가야 해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가야 하는 자리. 그때의 배구 연습이 딱 그랬다.
여성부 경기도 있었다. 젊은 여자 선생님들도 정말 열심히 연습했다. 서브 하나를 넣기 위해 수십 번씩 공을 쳤다. 손목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면 또 운동장에 나왔다.
“아, 손목 너무 아파요.”
“그래도 어제보다 잘 들어가던데요?”
“그럼 오늘도 해야죠.”
모두가 이상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물론 나는 그 진심이 가끔 부담스러웠다. 퇴근 후에는 임용시험 공부도 해야 했다. 몸은 피곤했고, 마음은 늘 조급했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자 이상하게 나도 조금씩 배구에 익숙해졌다. 여전히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팀에 큰 구멍은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공이 오면 도망가지 않고 팔을 모을 수 있게 되었고, 서브도 가끔은 네트를 넘겼다. 아주 가끔.
대회를 하루 앞둔 저녁, 우리는 또 하나의 특별한 경험을 했다.
출정식이었다.
선생님들이 학교에 모여 수육을 삶고, 막걸리와 맥주를 준비했다. 특수학교 교실에는 조리 시설이 갖춰진 공간이 많았는데, 그날은 그 시설이 절묘하게 활용되었다. 교실 하나가 순식간에 출장뷔페장처럼 변했다. 누군가는 고기를 썰고, 누군가는 상을 펴고, 누군가는 김치를 담았다. 손재주 좋은 선생님들이 많아 회식장은 금세 완성되었다.
“내일은 무조건 이깁니다!”
“우승해야죠!”
“하 선생님, 내일 리시브 믿어도 되죠?”
“믿지는 마시고요. 기대만 조금 해주세요.”
웃음이 터졌다.
그날의 분위기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남아 고기를 삶고, 술을 나누고, 다음 날 대회를 앞두고 전의를 다지는 교사 공동체. 요즘 기준으로 보면 어딘가 낯설고, 어쩌면 조금 무리한 풍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자리에서는 모두가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같은 학교 이름을 달고, 같은 색 티셔츠를 입고, 다음 날 함께 싸우러 가는 사람들이었다.
다음 날 아침, 모든 교직원이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 안동체육관으로 향했다. 우리는 노란 티셔츠를 맞춰 입었다. 배구 유니폼처럼 멋있지는 않았지만, 멀리서도 서로를 알아보기에는 아주 좋은 색이었다. 체육관 안에 들어서자 다른 학교 선생님들도 학교별로 모여 있었다. 어디선가 윷놀이 응원 소리가 들렸고, 배구 코트 쪽에서는 공 튀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부 배구는 토너먼트였다. 첫 경기에서 지면 끝이었다. 그 뒤로는 대회가 끝날 때까지 어디선가 앉아 있어야 했다. 한 달 동안 흙먼지를 마시며 연습한 결과가 한 경기로 결정되는 구조였다.
첫 상대는 다른 지역의 특수학교였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팀의 전력은 나쁘지 않았다. 키도 컸고, 경험자도 있었고, 한 달 동안 손발도 맞췄다. 그런데 문제는 심판이었다. 심판 판정이 생각보다 엄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대회는 학교 간 승부욕이 워낙 강해서 판정 시비가 자주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진짜 배구 심판을 모셔와 비용을 지불하고 경기를 진행한다고 했다.
공정한 것은 좋은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진짜 배구 선수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장신 선생님은 키가 너무 큰 탓에 블로킹을 하다 손이 네트를 넘어가 반칙을 받았다. 다른 선생님은 네트를 살짝 건드려 실점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억울한 장면들이 이어졌다.
“아니, 이 정도는 봐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회기 때문에 안됩니다.”
“우리가 프로냐고요.”
코트 안팎에서 작은 탄식이 계속 나왔다.
경기는 팽팽했다. 한 점을 얻으면 한 점을 잃었다. 우리가 앞서가나 싶으면 범실이 나왔고, 상대가 달아나나 싶으면 우리 팀의 강스파이크가 터졌다. 결국 경기는 듀스까지 갔다. 체육관 안의 공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그리고 문제의 순간이 왔다.
매치포인트였다. 우리 학교 선생님의 강한 스파이크가 상대 코트로 날아갔다. 공은 선 근처에 떨어졌다. 안인지 밖인지 정말 애매했다. 워낙 빨라서 보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었다. 우리 쪽에서는 분명 들어간 것 같았다. 아니, 들어갔어야 했다.
심판의 판정은 아웃이었다.
경기 종료.
우리의 패배.
순간 우리 팀 벤치가 폭발했다. 그중에서도 체육부장 선생님이 가장 먼저 일어섰다.
“심판! 그게 어떻게 아웃입니까!”
목소리가 체육관에 울렸다. 평소 점잖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분명히 선에 걸쳤습니다! 다시 보셔야 합니다!”
심판은 단호했다. 판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그러자 체육부장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잠시 후, 그 유명한 한마디가 나왔다.
“바닥에 누워!”
우리는 정말 누웠다.
정확히는 누운 사람도 있고, 앉은 사람도 있고, 어정쩡하게 쭈그려 앉은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코트를 비우지 않았다. 다음 경기를 진행하려면 우리가 나가야 했지만, 우리는 나가지 않았다. 이른바 드러눕기 작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위 가져와!”
체육부장 선생님이 후배 체육선생님에게 말했다.
“가위요?”
“네트 잘라버리게!”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진짜 자르시려는 건 아니겠지?’
지금도 나는 믿고 있다. 선생님이 정말로 네트를 자르려고 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그만큼 억울하고 화가 났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나는 꽤 진지하게 걱정했다. 저 네트가 잘리면 우리 학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배상은 누가 하는 것일까. 기간제교사인 나는 이 현장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 네트는 무사했다.
한참의 항의 끝에 판정이 번복되었다. 다시 매치포인트 상황에서 경기가 속개되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분위기상 뭔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영화라면 여기서 극적인 역전이 나와야 했다. 우리는 다시 일어섰고, 모두가 이를 악물었다.
상대편의 서브가 날아왔다.
그런데 그 서브는 강하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정말 천천히 우리 진영 중앙으로 넘어왔다.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너무 강하지도 않았고, 너무 어렵지도 않았다. 문제는 위치였다. 누가 받아야 할지 애매한 지점이었다.
“마이!”
누군가 외쳤어야 했다.
하지만 아무도 확실히 외치지 않았다.
나도 한 발 움직이다 멈췄고, 옆 선생님도 움직이다 멈췄다. 모두가 아주 짧은 순간 서로를 믿었다. 아니, 서로에게 미뤘다.
공은 우리 코트 한가운데에 털썩 떨어졌다.
정말 털썩.
우리의 기대도 함께 털썩 떨어졌다.
십 분 넘게 누워서 얻어낸 기회가 이렇게 끝났다. 허무함의 끝이었다. 체육관에는 잠깐 정적이 흘렀고, 곧 상대팀의 환호가 들렸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누군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럴 거면 왜 누웠냐…”
그 말에 모두가 웃고 말았다.
결국 그날 우리의 남자부 배구는 첫 경기에서 끝났다. 남은 시간은 선생님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다른 경기를 구경하고, 방금 있었던 사건을 계속 되새기며 보냈다. “가위 가져오라던 순간 봤어요?” “하 선생님, 그때 표정이 제일 웃겼어요.” “아니, 그 공은 누가 받았어야 해?” 같은 말들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학교 밖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학교 선생님들이 체육대회에서 판정에 항의하고, 코트에 드러눕고, 네트를 자르겠다고 했다니. 점잖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고, 유치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그날을 나쁜 기억으로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좋은 쪽에 가깝다.
요즘처럼 모든 것이 개인화된 시대에, 온라인 게임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한 달 동안 함께 연습하고, 전날 고기를 삶아 먹고, 같은 버스를 타고 원정을 가고, 한 점에 함께 억울해하고, 결국 허무하게 지고도 같이 웃는 경험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그날 우리는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분명 하나였다.
가족 같은 학교라는 말은 조심스럽다. 나도 이제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진짜 가족을 먼저 챙겨야 하는 온라인 게임인이 되었다. 온라인 게임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말이 때로는 누군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그 말을 쉽게 믿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그 시절, 젊은 기간제교사였던 나에게 그 학교는 잠시 가족 같은 곳이었다.
퇴근 후 혼자 원룸으로 돌아가 임용시험 바카라을 펼치던 날들 사이에서, 함께 땀 흘리고 웃고 고기를 나누던 시간이 있었다. 그것이 나를 조금 덜 외롭게 해주었다. 어쩌면 나는 배구를 배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한편이 되는 감각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교직원 체육대회도 거의 사라지는 추세다. 시대가 바뀌었고, 각자의 삶이 더 중요해졌다. 그 변화가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가끔은 아쉽다. 퇴직하기 전에, 배구는 아니더라도 선생님들과 축구팀을 만들어 한 번쯤 대회에 나가보고 싶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같은 공을 바라보고, 같이 뛰다가 지면 같이 아쉬워하는 그런 하루를 다시 한 번 가져보고 싶다.
아마 그런 날이 온다면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훗날 퇴직하는 날, 교직생활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나는 분명 그 체육관을 떠올릴 것이다.
노란 티셔츠를 입은 선생님들.
억울한 판정에 코트 바닥에 드러눕던 사람들.
그리고 느린 서브 하나가 우리 코트 한가운데 털썩 떨어지던 순간.
그 허무하고도 웃긴 장면 때문에, 나는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선생님 하길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