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그해 나는 공부를 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나를 공부시키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녔다.


원룸에 앉아 있으면 공부가 되지 않았다. 바카라상 앞에 앉으면 바카라보다 벽지가 먼저 보였고, 형광펜으로 칠한 문장보다 천장 모서리에 집을 짓는 거미가 더 선명했다. 조금만 습한 날이면 지네가 기어 나오는 방이었다. 시골 면 소재지에 하나뿐인 원룸 건물 1층. 그곳에서 나는 기간제 교사이자 수험생으로 살았다.


처음 교원임용시험에 도전한 것은 대학교 졸업반 때였다. 그때의 나는 졸업과 동시에 공무원이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상상을 했다. 스터디원을 모집했고, 계획표를 만들었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그래도 아주 절망적인 실패는 아니었다.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 불합격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도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내가 세운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 칭다오로 떠났고, 국제학교에서 1년을 보냈다. 그해 임용시험은 원서까지 접수해놓고도 학교 축제 때문에 응시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특수학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좋은 경험이었지만,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자꾸 경고음이 울렸다.


‘이러다 어영부영 장수생이 될 수도 있겠다.’


장수생이라는 말은 오래 공부한 사람이라는 뜻일 뿐인데, 그 말 속에는 특별한 두려움과 낙인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그 단어가 내 이름 옆에 붙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결정했다. 기간제 교사와 수험생을 병행하기로. 마음에는 꽤 낭만적인 결심이었지만, 몸의 입장에서는 지옥문을 여는 결정이었다.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좋았다. 특수학교의 학생들은 내 수험생활에 생기를 주었다. 자칫 메마르고 삭막해질 수 있는 하루에 아이들은 작은 꽃처럼 피어났다. 복도에서 나를 보고 웃어주는 얼굴, 음악 시간에 악기 하나를 붙잡고 집중하던 손, 느리지만 분명하게 반응하던 눈빛들이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만나며 내가 교사가 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자주 떠올렸다.


수업 준비의 부담이 비교적 덜했던 것도 다행이었다. 물론 특수학교 수업이 쉽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매 순간 학생들의 상태를 살피고, 반응을 기다리고,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대응해야 했다. 다만 고등학교처럼 복잡한 진도와 평가, 야간자율학습 감독에 시달리는 구조는 아니었다. 퇴근 이후에는 비교적 온전한 시간이 주어졌다. 문제는 그 시간이 온전히 공부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나는 일부러 학교 가까이에 방을 구했다. 다른 선생님들은 조금 멀어도 생활이 편한 곳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마트도 있고, 식당도 있고, 사람 사는 느낌이 나는 곳. 하지만 나는 외로운 공부 싸움을 하겠다며 학교 코앞의 원룸으로 들어갔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고, 남는 시간을 모두 공부에 쓰겠다는 계산이었다.


계산은 맞았지만, 마음은 계산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방에는 가구가 거의 없었다. 바카라상 하나가 전부였다. 벽에는 온갖 암기거리가 붙어 있었다. 교육학 개념, 음악 이론, 작곡가 이름, 시대별 특징, 예상 답안 문장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암기 카드가 보였고, 샤워를 하면서도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퇴근 후에는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큰 고민이었다. 혼자 먹는 밥은 빠르게 배를 채워주었지만, 마음까지 채워주지는 못했다.


어느 날은 방 안이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정신이 혼미해졌다. 바카라장을 넘기는 소리,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창문 밖에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사람은 소음 속에서도 지치지만, 지나친 고요 속에서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결국 나는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내게는 작은 소형차가 있었다. 결혼 전 누나가 타던 차를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차는 그해 내 공부방이자 친구였고, 때로는 도피처였다. 퇴근 후 원룸으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나는 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녔다. 누군가 보면 수험생이 놀러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놀러 가는 일이 아니었다. 나를 어떻게든 공부하게 만들기 위한 생존 전략이었다.


가장 자주 간 곳은 경주 보문단지였다. 차로 50분쯤 걸렸다. 지금 생각하면 공부하러 가기에는 꽤 먼 거리였지만, 그 길이 필요했다. 시골길을 지나고, 어두운 도로를 달리고, 보문호 근처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면 마음이 조금 풀렸다. 한국식 마루처럼 꾸며진 스타벅스가 내 주요 공부방이었다. 커피 향이 나고, 사람들의 말소리가 적당히 섞이고, 배경음악으로 재즈가 흐르는 곳. 그 정도의 소음이 오히려 나를 붙잡아주었다.


나는 구석자리에 앉아 바카라을 펼쳤다. 혼자였지만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다. 주변에는 누군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고, 누군가는 친구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소리들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원룸의 고요가 나를 삼키는 느낌이었다면, 카페의 소음은 나를 현실에 붙들어두는 얇은 끈 같았다.


어떤 날은 한 카페에서 집중이 흐트러지면 다른 카페로 옮겼다. 또 어떤 날은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야 하는데, 지금 누우면 너무 오래 잘 것 같았다. 그럴 때는 새벽 찜질방으로 향했다. 찜질방에서 불편하게 두세 시간 정도 자면, 집에 돌아와서는 오래 잘 수 없다는 사실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처절하고 우스운 방법이었다. 좋은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일부러 불편한 곳에서 잤다. 수험생의 생활은 때때로 합리적이기보다 집요하다.


그렇게 돌아다니면 시간이 아까울 법도 했다. 하지만 나름의 방법이 있었다. 나는 시험과 관련된 암기 내용을 녹음했다. 그냥 읽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 가사에 맞춰 개사하기도 했다. 교육학 이론이 유행가 멜로디를 타고 흘러나왔고, 음악사 개념이 내 목소리로 끝없이 반복되었다. 녹음 파일의 전체 재생 시간이 14시간쯤 되었다. 2배속으로 들으면 운이 좋은 날에는 하루에 두 번 가까이 들을 수 있었다.


듣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운전할 때도 틀어놓고 따라 했다. 차 안에서는 누가 듣는 사람이 없으니 큰 소리로 외울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음악관은…”


어두운 시골길을 달리며 나는 혼자 강의하고, 혼자 대답하고, 혼자 노래했다. 옆 차가 있었다면 꽤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에는 차도 많지 않았다. 밤의 국도는 내게 거대한 독서실이었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켜져 있었고, 논과 산은 검은 그림자처럼 지나갔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중얼거렸다. 시험장에 가져갈 수 없는 모든 문장들을 내 몸 안에 집어넣으려는 사람처럼.


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샤워를 하면서 스피커를 켜놓고 따라 외웠다. 머리를 감으며 교육학을 중얼거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음악사를 떠올렸다. 밥을 먹을 때도 들었고, 시골길을 걸을 때도 들었다. 그해의 나는 조용히 있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혼자 있을 때면 늘 무언가를 듣거나 말하고 있었다.


공부라는 것이 결국 별게 없다는 생각도 그때 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머리가 특별히 좋아서 한 번에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뒤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해서 듣고 외우는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바카라상에 앉아 오래 버티는 재능도 부족했다. 그래서 환경을 바꾸었다. 방에서 안 되면 카페로 갔고, 카페에서 안 되면 차 안으로 갔고, 차 안에서 안 되면 찜질방으로 갔다. 나는 공부를 잘한 것이 아니라, 공부가 되는 장소를 찾아 계속 떠돌았다.


부끄럽지만 그해에는 저축을 거의 하지 못했다. 기간제 교사 월급은 바카라값, 강의료, 기름값, 커피값, 외식비, 원룸 임대료로 사라졌다. 공부를 위한 낭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낭비처럼 보이는 투자라고 해야 할까. 그때의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도박이었고, 거의 처음 해본 올인이었다.


독기는 결국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임용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합격의 대가도 분명했다. 가장 먼저 잃은 것은 건강이었다. 매일 다섯 시간 정도 자며 버텼으니 몸이 멀쩡할 리 없었다. 마지막 관문인 면접시험을 보고 난 뒤, 나는 본가에서 거의 20시간 가까이 내리 잠을 잤다. 허리 통증과 배고픔 때문에 깼을 뿐, 그대로 두었다면 더 잘 수도 있었다.


몸은 엉망이었다. 체중은 불어 있었고, 피부도 많이 상했다. 오래 앉아 있고 잠을 줄인 탓인지 몸 전체가 굳어 있었다. 두 다리를 앞으로 뻗어도 거의 직각 정도밖에 벌어지지 않았다. 그 굳은 몸은 이후 몇 년 동안 쉽게 풀리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몸을 버리고 직업을 얻은 셈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독하게 준비했을까.


그 답은 조금 서글프다. 결국 경쟁에서 이기고 싶었던 것 같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많이 듣고 자랐다. 세상은 시험이고, 시험은 순위이고, 순위에서 밀리면 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고 믿었다. 전쟁에 참전했다면 살아남는 방법은 이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이 교사가 되었을 때 생긴다.


나는 첫 발령지인 남자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보며 자주 마음이 흔들렸다.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 쉽게 포기하는 학생,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학생을 보면 속에서 질문이 올라왔다.


‘왜 안 하지?’

‘왜 포기하지?’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왜 멈추지?’


내가 살아온 방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부를 조금 안 하는 것이 죄는 아니었다. 아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잘못은 아니었다. 누구나 같은 속도로 자기 삶을 향해 달릴 수는 없다. 누군가는 늦게 출발하고, 누군가는 중간에 멈춰 서고, 누군가는 아예 다른 길을 바라본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첫 발령지에서 몇 달 동안 그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너무 경쟁적인 사람이라서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긴 경험 하나를 붙잡고, 아이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버티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 교사가 된 기쁨과 함께 그런 불안이 따라왔다.


그때 뜻밖의 사람에게서 작은 답을 얻었다. 고등학교 친구였다. 어느 날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친구는 잠시 듣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도 그 애들의 인생에 지금 교사가 너였다는 건 변하지 않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조용해졌다.


친구가 말을 이었다.

“그게 좋은 기억이 될지, 별 의미 없는 시간이 될지는 모르지. 그래도 너는 이미 그 애들 인생의 한 페이지에 들어간 거야. 그러니까 너무 완벽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소중하게 여겨.”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누군가의 인생 한 페이지에 들어간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운 일이었고, 동시에 조금은 다정한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완전히 바꿀 수 없었다. 모든 학생을 공부하게 만들 수도 없고, 모두를 경쟁에서 이기게 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교사는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바카라임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한 시절의 페이지 위에 잠시 머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페이지가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사람.


가능하다면 작은 밑줄 하나쯤 남기는 사람.


특수학교 옆 원룸에서 보낸 그 지독한 1년은 내게 직업을 가져다주었다. 동시에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그 방식이 학생들을 만날 때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도 보여주었다. 나는 합격했지만, 합격 이후에도 배워야 할 것이 많았다.


그해 밤마다 차 안에서 외웠던 문장들은 이제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교육학 이론도, 음악사 암기 문장도 세월 속에서 많이 흐려졌다. 하지만 경주 보문단지로 향하던 어두운 길, 카페 구석자리의 커피 향, 시골 원룸 벽에 붙어 있던 종이들, 그리고 친구가 해준 말은 아직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뒤에 딱지가 앉을 때까지 공부했다.


그리고 교사가 된 뒤에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몰아붙인다고만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누군가의 한 페이지에 들어간 사람은, 이기는 법보다 먼저 곁에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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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과 마지막 작별하는 날 남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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