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교에 가게 되면서 나는 말 그대로 ‘특수한’ 환경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학교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뿐 아니라 졸업 이후의 전공과까지 함께 있었다. 다행히 중국 국제학교에서처럼 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모든 학년을 오가며 수업하지는 않았다. 나는 고등학교 음악수업을 전담하게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나이만 놓고 보면, 일반적인 고등학생들과는 조금 달랐다. 교실은 내가 생각하던 고등학교 음악실보다 훨씬 넓은 의미의 삶을 품고 있었다.
비담임이라는 이유로 여러 업무도 함께 따라왔다. 음악교사였으니 가을 예술발표회와 축제를 맡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문화예술부 소속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의 부서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교육정보부였다.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뜬금없이 정보부라니.
업무 내용을 들어보니 더 낯설었다. 방과후에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지도해서 ‘장애학생 IT챌린지’ 대회에 출전시키는 일이었다. 음악실에서 피아노와 악보를 만지던 내가, 이제는 컴퓨터실에서 타자 연습과 정보 검색, 심지어 e-스포츠까지 지도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선생님, 이 업무는 천천히 인수인계해드릴게요.”
처음 한 달 정도는 본격적으로 손대지 못했다. 특수학교에 처음 근무하는 일반교사였던 나는 수업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더 급했다. 학생들에게 어떤 말의 속도로 설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음악 활동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그래서 정보부 업무는 한동안 내 바카라상 한쪽에 조용히 놓인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인수인계를 받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 일은 생각보다 꽤 큰 일이었다.
당시 학교는 시골에 있었다. 그냥 시골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차가 없으면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나는 기간제교사로 근무하면서도 임용시험을 준비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학교 인근 원룸에서 자취를 했다. 학교 입장에서는 내가 저녁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교사처럼 보였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퇴근 후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임용시험 바카라을 펼쳐야 하는 사람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학교 가까이에 사는 젊은 기간제교사였다.
그래서였을까. 방과후 컴퓨터 수업은 자연스럽게 내 몫이 되었다.
수업 대상은 주로 기숙사에 사는 학생들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저녁 시간에 아이들을 데리고 컴퓨터실로 갔다. 이름은 컴퓨터 수업이었지만, 아주 거창한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었다. 기본 타자 연습,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법, 그리고 당시 대회 종목 중 하나였던 e-스포츠 연습이 중심이었다. e-스포츠 종목은 카트라이더였다. 학교에서는 게임 사이트 접속이 막혀 있었기 때문에,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대회 준비를 위한 예외 조치까지 요청해야 했다. 게임을 하기 위해 공문을 쓰는 일이라니, 교직생활은 생각보다 상상력을 많이 요구하는 직업이었다.
학생들을 선발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특수학교 학생들은 발달 수준, 지적 능력, 신체 기능, 집중력에서 개인차가 컸다. 어떤 학생은 정보 검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해력은 있었지만 시력이 좋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카트라이더 맵을 놀라울 정도로 잘 외웠지만, 갑작스러운 돌발행동이 있어 대회장에서의 상황이 걱정되었다. 또 어떤 학생은 타자는 꽤 빨랐지만 집중력이 오래가지 않았다.
마치 여러 재료가 한데 섞인 비빔밥 한 그릇 같았다. 각자의 색과 맛은 분명했지만, 그 조합을 어떻게 살릴지는 교사의 몫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단호하게 멈춰 세우기도 하면서 수업을 이어갔다.
저녁의 컴퓨터실은 낮의 학교와는 조금 달랐다. 복도는 조용했고, 기숙사에서 나온 아이들의 발소리만 드문드문 울렸다. 컴퓨터 전원을 켜면 모니터가 하나둘 파랗게 밝아졌다. 그 빛 앞에 앉은 아이들의 얼굴도 조금씩 환해졌다. 기숙사 생활이 답답했던 아이들에게 컴퓨터실에 가는 시간은 나름의 외출 같았다. 아이들은 내색은 안 해도 그 시간을 꽤 기다리는 눈치였다.
솔직히 나는 조금 힘들었다.
퇴근 후 저녁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은 체력적으로도 부담이었고, 무엇보다 임용시험 공부 시간을 줄여야 했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공부해야 한다는 불안과, 눈앞의 아이들을 그냥 보낼 수 없다는 바카라임감이 매번 마음속에서 서로 줄다리기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5월이 되었다.
드디어 장애학생 IT챌린지 지역예선대회가 열렸다. 생각보다 큰 대회였다. 장소도 멀었다. 아이들을 어떻게 데리고 갈지 고민하고 있는데, 같은 부서에서 먼저 근무하고 있던 선생님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했다.
“학교 봉고차 운전해서 가야 해요.”
“제가요?”
“네. 선생님이 인솔하시니까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1종 보통 면허가 있었으니 법적으로 운전은 가능했다. 하지만 가능하다는 것과 자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운전 경력이 많지 않았고, 승합차 같은 큰 차는 더더욱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대회장까지는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왕복 네 시간. 고속도로를 타야 했고, 대회가 끝난 뒤에는 기숙사에 살지 않는 학생들을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는 임무도 있었다.
학교 카드를 받아 기름을 넣으면 된다고 했다. 행정실에서 보험도 처리해주셨던 것 같은데, 자세한 기억은 희미하다. 그때는 눈앞에 놓인 일들을 하나씩 해치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어쨌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학교 봉고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은 뒤에 타고 있었다. 누군가는 창밖을 보며 들떠 있었고, 누군가는 대회장에 가면 무엇을 먹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운전대를 잡았다. 하지만 손바닥에는 땀이 났다. 고속도로에 올라섰을 때, 백미러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제발 오늘 하루 아무 일 없이 끝나게 해주세요.’
대회장은 지방의 한 대학교였다. 도착하자마자 정신없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종목별로 장소가 달랐고, 학생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야 했다. 같은 부서 선생님 한 분이 함께 인솔해주셨지만, 장애가 있는 학생 6~7명을 챙겨 대회에 출전시키고, 밥을 먹이고, 간식을 사주고, 이동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고단했다.
특히 e-스포츠 경기는 잊히지 않는다. 카트라이더 경기장은 대학교 안의 멋진 전산실이 아니라, 학교 근처 PC방을 통째로 빌린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담배 냄새가 채 빠지지 않은 공기가 먼저 우리를 맞았다. 아직 환기가 덜 된 PC방 안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진행요원들이 명찰을 매고 기록지를 들고 다녔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대회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수선했고, 놀이처럼 보기에는 모두가 너무 진지했다. 학생들은 자신의 종목 앞에서 누구보다 집중했다. 카트라이더를 하던 아이의 눈빛은 평소 수업시간과 전혀 달랐다. 손가락은 빠르게 움직였고, 화면 속 자동차가 코너를 돌 때마다 몸도 함께 기울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나는 첫 출장이라는 사실에 조금 들떠 있었다. 아이들과 멀리 나가는 일이 소풍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오후가 되자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아이들을 챙기는 일은 머리와 몸을 동시에 쓰는 일이었다. 한 명을 찾으면 다른 한 명이 사라지고, 점심을 먹였다고 생각하면 누군가 화장실에 가야 했다. 대회장에서 하루를 보낸 뒤 나는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매일 얼마나 많은 감각을 열어두고 사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정보 검색대회에 참가한 학생이 1위를 했다. 디자인 대회에서는 3위가 나왔고, 타자대회에서도 2위를 한 학생이 있었다. 총 세 명의 학생이 입상했다. 그리고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지도교사상을 받았다.
교직에 들어와 처음으로 받은 상장이었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아이들이 상을 받은 것은 기뻤지만, 내가 상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내가 대단한 지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정해진 저녁 시간에 아이들을 컴퓨터실로 데려갔고, 타자를 보게 했고, 검색을 시켰고, 카트라이더 연습을 도왔을 뿐이었다. 특별한 비법도 없었고, 거창한 전략도 없었다.
그래도 기쁜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교장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교장선생님, 아이들이 상을 받았습니다. 저도... 지도교사상을 주네요”
전화기 너머 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환해졌다.
“정말입니까? 아이들이 해냈네요. 하 선생님도 고생 많았어요. 너무 잘됬습니다!”
나는 휴대폰으로 몇 장의 사진을 찍어 보냈다. 상장을 들고 웃는 아이들, 조금은 어색하게 서 있는 나, 대회장 풍경들. 그 사진들은 다음 주 지역신문에 실렸다. 신문에 나온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시골 특수학교의 아이들이 자기 이름으로 세상에 한 줄을 남긴 것 같았다.
그 상은 내 인생을 바꾸는 거대한 서사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만큼은 아이들이 자기 자리에서 빛났다. 누군가는 정보를 검색했고, 누군가는 디자인을 했고, 누군가는 타자를 쳤고, 누군가는 게임 속 트랙을 완주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해냈다.
그 경험은 나에게도 힘이 되었다.
맡은 일을 해내고, 그 안에서 작은 성과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처음으로 제대로 느꼈다. 교직슬롯에서 상장이 전부는 아니지만, 젊은 기간제교사였던 나에게 그 상장은 교직슬롯에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작은 불씨가 되어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자리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는 또 한 번 배우고 있었다.
가을에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대회에도 출전했다.
이번에는 기차를 탔다. 학생 두 명과 함께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지역대회 때처럼 봉고차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은 정말 소풍 같았다. 아이들은 창밖을 바라보며 들떠 있었고, 나는 혹시라도 놓치는 것이 없을까 계속 가방과 일정표를 확인했다.
전국대회의 결과는 지역대회만큼 극적이지 않았지만, 그 여정 자체가 오래 남았다. 낯선 역, 숙소, 대회장, 함께 먹은 밥, 기차 안에서 오가던 짧은 대화들. 아이들은 대회에 나간 선수이면서 동시에 여행을 떠난 학생들이었다. 나는 인솔교사이면서도,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과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해 정보부 업무를 맡으며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 배움의 대부분은 학생들에게서 왔다. 몇몇 아이들은 컴퓨터 앞에 앉으면 놀라울 정도로 집중했다. 평소에는 산만해 보이던 학생도 자신이 잘하는 종목 앞에서는 눈빛이 달라졌다. 화면을 바라보는 집중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끝, 실수해도 다시 해보려는 태도. 그 모습은 내게 꽤 오래 남았다.
처음에는 안쓰러운 마음이 앞섰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함께 지낼수록 그 감정은 조금씩 바뀌었다. 아이들은 단지 도와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배우고 있었고, 때로는 나보다 훨씬 밝은 에너지로 하루를 살아냈다. 그 순수함은 단순히 착하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세상을 조금 덜 계산하고, 조금 더 곧게 바라보는 힘이 있었다.
문득 그때의 신문기사를 찾아본 적이 있다.
놀랍게도 아직 기록이 남아 있었다. 화면 속 사진을 바라보는데, 오래전 컴퓨터실의 불빛과 대회장으로 향하던 봉고차의 핸들이 함께 떠올랐다. 아이들의 웃음, 상장을 들고 있던 손, 피곤해서 말이 줄어들었던 돌아오는 길까지.
그 시절의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러 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배우고 온 쪽은 나였다.
선생님에게 배움을 준 그때의 제자들이 문득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