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칭다오 교사 생활은 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지금처럼 공립학교에 근무하다 보면 몇 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기는 일이 자연스럽다. 정든 학교를 떠나고, 익숙한 교무실 바카라상을 비우고,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일은 교사에게 반복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그런데 1년 만에 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조금 다른 감정을 남긴다. 막 뿌리를 내리려던 화분을 다시 들어 올리는 느낌이랄까. 아직 흙냄새도 제대로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다시 어디론가 옮겨 심어져야 하는 기분이었다.
칭다오는 내게 첫 교직생활의 무대였다.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고, 처음으로 내 이름 앞에 ‘선생님’이라는 말을 매일 들었다. 서툰 수업도 많았고, 부끄러운 장면도 많았지만 그곳에서 나는 분명 자랐다.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했을 일들을 경험했고,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교사라는 일을 몸으로 배웠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정했을 때, 마음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떠나야 할 이유는 분명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좋은 기억만으로 한 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칭다오에서의 시간은 아름다웠지만, 그 아름다움 안에도 크고 작은 피로와 불안이 함께 고여 있었다.
우선 근무 여건이 만만치 않았다. 주당 음악수업이 스물두 시간 정도였다. 숫자로만 보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문제는 수업 대상이었다. 유치원 6, 7세 아이들부터 초등학생, 중학생, 중학교 3학년까지 모두 내가 맡아야 했다. 하루는 유치원 아이들과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르다가, 바로 다음 시간에는 중학생들에게 음악사를 설명해야 했다. 오전에는 “선생님, 화장실 가도 돼요?”라는 말을 열 번쯤 듣고, 오후에는 사춘기 아이들의 삐딱한 눈빛 속에서 수업을 이어갔다.
목은 늘 쉬어 있었다. 저녁이 되면 목 안쪽이 모래밭처럼 까끌거렸다. 한국에서 가져온 목캔디와 감기약을 바카라상 서랍에 넣어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먹었다.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하루 동안 내 목소리가 학교 건물 어딘가에 다 흩어지고 몸 안에는 텅 빈 울림만 남은 것 같았다.
수업 준비도 쉽지 않았다. 나는 중등 음악교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학에서 배운 것도, 교생실습에서 경험한 것도 모두 중등교육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칭다오에서는 초등학교 1학년도 가르쳐야 했고, 병설 유치원 아이들도 만나야 했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수업을 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였다. 아이들은 내 앞에 앉아 있었고, 나는 어쨌든 무언가를 가르쳐야 했다. 부족한 교사가 성실함만으로 매일을 메워가던 시간이었다.
행정 시스템도 아날로그했다. 한국 학교에서 당연하게 쓰는 나이스 같은 시스템이 없었다. 출석 체크도 손으로 했고, 시험과 채점도 대부분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문서는 워드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출력하고, 결재를 받아 보관했다. 그때는 그것이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첫 교직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학교란 이렇게 종이를 들고 다니며 결재를 받는 곳인 줄 알았다.
그래서 다음 해 한국 학교에서 처음 나이스를 접했을 때, 나는 스무 대답지 않은 말을 자주 했다.
“세상 참 좋아졌네요.”
옆자리 선생님들이 웃었다. 이제 막 교직에 들어온 젊은 교사가 할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느꼈다. 중국의 아날로그 학교를 지나온 내게 한국의 행정 시스템은 마치 미래에서 온 문물처럼 보였다.
처우 문제도 있었다. 월급은 중국 인민폐로 받았다. 호봉제라는 개념도 거의 없었고, 음악 교과 특성상 보충수업이나 방과후수업 수당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기본급으로 한 달을 살아가는 느낌이었다. 당시 환율로 계산하면 월급이 한국 돈으로 2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당시 중국 물가가 한국보다 저렴한 부분도 있었지만,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었다.
한국 마트에 가면 사고 싶은 것도 많았다. 된장, 김치, 라면, 커피믹스, 고추장 같은 것들이 낯선 도시에서 나를 위로했다. 문제는 그런 위로가 싸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국 물가가 아무리 낮아도 한국 음식은 그리 싸지 않았다. 여름방학 때 한국에 다녀오면 지출은 더 커졌다. 부모님이나 친구가 칭다오에 놀러오면 안내도 해야 했고, 식사도 해야 했고, 괜히 내가 조금은 성공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기도 했다.
환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도 같이 출렁거렸다.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면 내가 교사로 일하고 있는 건지, 낯선 도시에서 매달 버티는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교사는 박봉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하지만 막상 초임교사로, 그것도 외국에서 혼자 살아보니 그 말은 훨씬 구체적인 표정으로 다가왔다. 처음에는 사명감만으로도 충분할 줄 알았다. 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생활은 생각보다 현실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생활 앞에서 작아진다. 월세, 식비, 교통비, 병원비 같은 단어들은 꿈보다 훨씬 자주 삶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결국 한국의 경쟁과 비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칭다오의 바다는 넓었고, 중국의 하늘은 컸다. 그 안에서 나는 꽤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어디에 취직했는지, 누가 임용에 붙었는지, 누가 유학을 갔는지 잠시 잊은 듯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한국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다.
함께 임용시험을 준비하던 후배들과 가끔 연락을 주고받았다.
“선배, 저는 내년에 노량진 가려고요.”
“이번에는 진짜 올인해보려고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 아이들은 다시 출발선 앞에 서고 있었다. 나는 칭다오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출발선에서 혼자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자유로워진 것이 아니라 뒤처진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며들었다.
중고등학교 동창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누군가는 좋은 온라인 게임에 들어갔고, 누군가는 안정적인 회사원이 되었고, 누군가는 결혼 이야기를 시작했다. 스물대 중반의 소식들은 왜 그렇게 빠르게 사람을 초조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모두가 자기 길을 찾아 달려가는 것 같았고, 나만 낯선 도시 한가운데서 임시로 세워진 표지판처럼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말하지 않아서 아무도 몰랐겠지만, 애초에 내가 중국에 온 이유에는 작은 패배감이 깔려 있었다. 한국에서 기간제 교사 자리조차 쉽게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 데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고, 중국행은 멋진 도전이라기보다 어쩌면 피난에 가까웠다. 물론 그 피난지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젠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사람들이 많이 걷는 길 위에 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해 11월쯤, 나는 임용시험 원서를 접수했다. 금요일 밤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들어가, 가장 가까운 서울 시험장에서 시험을 치를 계획이었다. 조금씩 공부도 해두었다. 비행기 값이 아까워서라도 시험을 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참 나다운 계산이었다.
그런데 하필 비행기를 타야 하는 금요일이 학교 축제 날이었다.
그 축제는 요즘 학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늦게까지 이어졌다. 밤 9시가 되어서야 모든 순서가 끝났다. 아이들은 들떠 있었고, 선생님들은 뒷정리로 분주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공항으로 가야 하나.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하나. 애초에 시험을 보러 가기로 한 것은 나였고, 그 계획도 분명 중요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생님, 이것 좀 같이 옮겨주세요.”
“하 선생님, 무대 정리 좀 부탁해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축제의 잔향처럼 이어졌다. 나는 결국 학교에 남았다. 축제 뒷정리를 마치고 나니 비행기는 이미 멀리 떠나 있었고, 나는 그해 임용시험의 결시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 초과근무수당도 없었고, 일과 시간 이후 밤늦게까지 이어진 행사였다. 시험을 보기 위해 원서도 접수했고, 비행기까지 준비했으니 가는 것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상하게 그렇게 하지 못했다. 교사로서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젊음은 때때로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그 비효율 속에 그 시절의 진심이 들어 있기도 하다.
2학기가 끝나고, 찬 바람이 쌩쌩 불던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나는 칭다오에서의 1년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처음 떠날 때 들고 갔던 이민가방은 여전히 컸지만, 안에 담긴 것은 달라져 있었다. 옷가지와 악보 사이에 아이들의 편지, 사진, 낯선 도시의 기억, 그리고 조금 자란 내가 함께 들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다시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기간제 교사 자리를 구해야 했다. 문제는 내 경력이 너무 특이하다는 것이었다. 중국 국제학교에서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을 하고, 유치원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음악을 가르쳤다는 경험을 자기소개서에 어떻게 녹여야 할지 막막했다. 면접에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고민이었다.
“해외 경험이 장점이 될까, 아니면 이상한 이력으로 보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며칠 밤을 보냈다.
이미 중국에 있을 때 몇 장의 원서는 국제우편으로 보내두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다시 몇십 장의 원서를 썼다. 2013년 1월은 원서와 자기소개서, 증명서와 우편봉투 사이에서 지나갔다. 바카라상 위에는 늘 종이가 쌓여 있었고, 프린터는 자주 걸렸으며, 나는 또다시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터넷 카페에서 임용시험 스터디를 찾았다. 나는 성격상 무작정 쉬는 사람이 아니었다. 동시에 한 곳에 모든 것을 걸고 올인하는 적극투자형 인간도 아니었다. 일도 해야 했고, 시험도 준비해야 했다. 조금 비겁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게 나다운 방식이었다. 안전망을 붙잡고 다음 길을 찾는 사람.
그 겨울,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섰다.
칭다오의 바다는 멀어졌고, 한국의 겨울은 매서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한 번 낯선 땅에서 살아본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도 해봤고, 유치원 아이들과 장구도 쳐봤고, 중국 시장에서 손짓 발짓으로 음향 케이블도 사봤다. 그러니 또 어떤 학교에 가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 찾아왔다.
내가 다음으로 가게 된 곳은 특수학교였다.
칭다오에서 배운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그곳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